암울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1년도 되지 않아 새엄마가 온 후부터였다. 중학교에 입학한 뒤 1년간은 오락실을 배회했다. 중2 때부턴 만화방을 즐겨 찾았다. 그곳에서 떡볶이를 먹으며 만화책을 보는 동안에는 열다섯 살 인생의 모든 불행을 잊을 수 있었다. 엄마의 부재로 인한 원망. 그리움. 아버지에 대한 미움. 새엄마에 대한 거부감 같은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
시골 읍내에 하나뿐인 만화방은 사춘기를 겪는 내게 아지트이자 비상구였다. 단골이 된 나는 주인아주머니가 잠시 가게를 비울 때면 가게를 봐주기도 하고, 일요일에도 들러 수십 권의 만화책을 빌려가기도 했다. 가상의 세계와 캐릭터들이 만들어가는 이야기는 언제나 홀린 듯 나를 끌어당겼다.
만화방을 들락거린 지 2년 차. 어느새 마음속에 만화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자리 잡았다. 어떻게 만화가가 되지? 유명한 만화가가의 문하생으로 들어가야 하나? 하지만 “만화가가 되겠어요.”라고 가족들에게 말하면 누구도 잘 생각했다며 박수를 쳐주진 않을 것 같았다.
학창 시절 그렸던 그림들. 아직도 몇 장은 보관 중이다. 순정만화를 너무 많이 봐서 그리는 것마다 순정만화 느낌 물씬 풍기는 8등신 캐릭터들.
당시 나의 가장 큰 소망은 고향을 떠나는 것이었다. 초등학교를 서울에서 다니다가 내려온 내게 인구 3만 명인 고향은 너무나 작은 곳이었고, 늘 떠나고 싶은 곳이었다. 전략을 세웠다. 가족들에게 만화가가 되고 싶다는 사실을 숨긴 채, 일단 대학에 가자. 그럼 자연스럽게 도시로 나가게 되고, 그다음엔 내 마음대로 해도 되지 않을까.
전공은 영어로 택했다. 즐겨 듣던 팝 음악의 영향이 컸다. 중학생 때 친구에게 받은 'WHAM' 테이프를 통해 처음 팝 음악을 접했다. 팝송을 자주 듣고 따라 부르면서 나도 모르게 영어 발음이 교정되었고, 영어 선생님께 몇 번 칭찬을 받으며 어깨가 으쓱해졌다. 고등학생이 된 후 뉴욕에 사는 40대의 유태인 아저씨와 해외 펜팔을 몇 번 해보았고, 독일에 사는 동갑내기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영어의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다른 나라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거였다. 딱히 전공적합성 같은 걸 따지던 시대도 아니었던지라 인문계열 학생인 내게 ‘영문학과’는 그럴듯한 선택으로 보였다.
원하던 영어 전공으로 대학에 합격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만화동아리 가입. 어차피 내가 갈 길은 만화가였으니까. 전공 공부는 멀리 팽개치고, 매일 만화동아리로 출퇴근 도장을 찍었다. 딱히 만화가가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고향을 떠나 대학이라는 좀 더 넓은 사회에서 새로운 친구들과 먹고 노는 게 너무 좋았다.
대학교 1학년 겨울방학때 혼자 몇 페이지 그리다 만 만화. 나이들어 북아트 작업을 하면서 집어넣었다. 지금 보면 오그라드는 설정인데, 당시엔 꽤 괜찮은 작품이 나올 줄 알았다.
어차피 제대로 공부할 마음도 없고, 끝까지 졸업할 마음도 없던 전공이라 대충 1학기 시험을 치렀다. 다행히 출석 점수가 나쁘지 않아 성적이 바닥을 치지는 않았다.
6개의 전공과목 중 가장 성적이 잘 나온 건 영어회화 수업이었다. 결석을 서너 번 했고, 수업 시간에 진행한 토론에도 참여하지 않았는데 A가 나왔다. 기말고사를 잘 봤나 보다 싶었다. 스스로 정한 주제로 자유롭게 발언하고 외국인 교수와 대화를 나누는 시험이었는데 나는 ‘한국 영어교육의 문제’를 주제로 잡았다. "한국 영어는 독해와 문법 위주로만 가르친다. 태어나서 외국인과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지금 너무 떨린다... 블라블라... “I’m so afraid of you”라고 말했더니, 덩치 큰 백발의 교수가 손사래를 치며 자긴 나쁜 사람 아니니 무서워하지 말라고 했다. 솔직한 표현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2학년이 된 1997년. IMF가 터졌다. 사춘기 시절에는 집안꼴이 마음에 안 들더니 대학에 오니 나라꼴이 마음에 안 들었다. 1학년 2학기에서도 2점대는 유지하던 성적이 고꾸라지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였다. 한국사회가 이 모양인데 그깟 학점이 무슨 소용이냐 싶었다.
2학기에 동아리 회장을 맡은 후 점점 더 수업을 자주 빼먹었고, 공부와는 완전히 멀어졌다. 대신 선배들과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했다. ‘미국은 우리의 우방’이라는 인식이 처음으로 와르르 무너졌다. 이승복 어린이의 ‘공산당이 싫어요’를 학교 강당에서 보고, 반공 표어 짓기와 반공 포스터 대회에서 상을 받은 나였는데. 학교와 사회에서 주입받은 이데올로기로부터 뒤통수를 맞는 기분이었다. 팝 음악을 좋아하고, 영어로 세계인들과 소통하고 싶어 했던 학창 시절의 추억에도 금이 갔다. 미 제국주의 언어를 전공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영어에는 정말 하나도 관심이 없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첫 학사경고를 맞았다.
그리고 맞이한 3학년 1학기. 등록만 하고 수업을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았다. 만화가라는 꿈도 버렸다. 썩어빠진 한국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라면 만화가가 되느냐, 되지 못하느냐는 하등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개인의 안위와 꿈은 조국의 운명에 비하면 하찮은 투정에 불과했다. 3학년 1학기가 끝나고 0 외에는 아무 숫자도 쓰이지 않은 학점을 받았다. 0.00, 올 F였다. 두 번째 학사경고. 이제 한 번만 더 맞으면 제적이었다.
보다 못한 학생회 선배들이 3학년 2학기 만은 학사경고를 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난 여전히 졸업장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미 고삐가 풀린 공부는 다잡아 지지 않았다. 미래를 걱정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겠다! 이런 심정이었다.
금수저 집안도 아니면서 뭘 믿고 그랬을까. 농사일을 접고 경제력이 없는 아버지 대신, 결혼까지 한 나이 많은 두 오빠들이 학비와 생활비를 책임지느라 애쓰는 걸 알면서도. 당시 나는 생활을 책임지는 문제에 대해 무지했고, 철이 없었다. 오로지 삐뚤어진 나라를 바로잡는데 일생을 바쳐야 한다는 과도한 사명감만이 가득했다.
3학년 2학기 겨울. 총여학생회 선거에 나가보지 않겠느냐는 선배들의 권유를 받았다. 선거를 치르고 총여학생회 회장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4학년 1학기 개학을 앞두고 세 번째 학사경고와 동시에 제적. 학적 상으로는 더 이상 학생의 신분이 아닌데 학생회장이 된 묘한 상황이 벌어졌다. 학교 측에서는 학생회장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무슨 배짱이었는지, 학생처가 마련한 학생회 간부회의에도 들어가고 거처를 옮겨 총여학생회실에서 먹고 자고 생활했다. 학교에선 뭐 이런 애가 다 있나 했을 거다.
하지만 각 단과대 학생회장들은 모두 나를 총여학생회장으로 인정했다. 학생일 때,학생들의 손에 의해 당선되었으니까. 다른 학생회장들과 함께 신입생 해오름식에서 연설도 하고, 등록금 삭감을 외치며 함께 혈서도 썼다. 비록 올 F로 등록금을 고스란히 날리고, 이제 등록금 낼 일도 없어졌지만. 대한민국 100만 학우들과 IMF로 고통받는 그들의 부모님들에겐 여전히 필요한 투쟁이라고 믿었다.
학교에선 나를 학생회장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경찰들은 달랐다. 당시 대부분의 대학교 학생회는 전국 대학생 대표자협의회(전대협)의 후신인 한국대학 총학생회연합(한총련)에 가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학생회장에 당선되면 당연직으로 ‘한총련’ 대의원이 되었다. 학적에 따르면 나는 학생이 아니므로 대의원이 아니었지만, 경찰은 나더러 한총련을 탈퇴하라며 압박을 해왔다. 내가 아닌 가족들에게.
생각지 못했다. 학생회장 당선으로 한총련 대의원이 되는 순간 경찰의 내사 대상이 되리라는 걸. 경찰은 상관도 없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협박했다. 딸자식 교육 제대로 하라고. 지금 딸이 그러고 있는 거 아느냐고. 뒤늦게 상황을 안 오빠들이 줄줄이 학교를 찾아왔다. 그중 한 명이 나 대신 탈퇴에 동의한다는 동의서를 써서 학생처에 제출했다. 나는 탈퇴를 번복한다는 탈퇴 번복서를 천리안 통신(인터넷 없던 시절)에 올렸다.
결국 온 가족들이 대책회의를 하러 모였다. 장소는 학교 인근의 한 식당.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먼 남쪽에서 비행기 타고 온 둘째 오빠가 꼭 나와야 된대서 어쩔 수없이 얼굴을 비쳤다. 어차피 한 번은 가족들과 부딪혀야 할 일이었다.
나이가 18살이나 많은 큰 오빠는 “그때 엄마가 너를 서울로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라며 말문을 열었다. 서울로 초등학교를 보낸 엄마 때문에 내가 부모 정을 못 받아서 이리되었다는 게 오빠의 분석이었다.
“그 탓에 선배들 꼬임에 넘어간 거지.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만이라도 엄마 품에서 학교 다녔으면 그렇게 정에 굶주리지는 않았을 텐데.”
그리고 미안해했다. 용두동 단칸방에 함께 지낼 때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나를 제대로 챙기지 못한 것에 대해. 하긴. 그땐 숙제나 준비물도 꽝, 밥 대신 라면과 떡볶이를 입에 달고 살았고, 방과 후면 오락실을 어슬렁거렸다. 머리는 안 감아서 늘 부스스하고, 손톱 밑엔 까만 때가 가득했다. 이런 나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오빠들은 운동권 학생이 되어버린 막내 여동생의 행동이 ‘피 끓는 청춘의 신념’ 때문이 아니라 어릴 적 받지 못한 사랑과 돌봄의 부재가 불러온 결과라고 생각했다.
그날 참석은 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통화한 아버지는 오빠들과 다른 방식으로 나를 이해했다.
“우리 조상 중에 안중근 의사가 안 있나? 니가 그 피가 흐르는 모양이다.”
일제 치하를 겪고 일본 놈들이라면 학을 떼면서도 독재정권 때가 살기 좋았다던 아버지로서는 파격적인 해석이었다.
사실 안중근 의사는 우리의 직계 조상이 아니다. 본관은 순흥으로 같으나 안중근 의사는 참관공파이고, 우리는 판관공파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도산 안창호 선생 역시 같은 순흥 안 씨이나 파가 다르다. 아버지가 그때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일제 치하에 첩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 학교라고는 가보지 못한 아버지에게 여섯 형제 중 유일하게 대학에 간 막내딸을 끝까지 자랑스러워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어쨌든 나는 끝까지 탈퇴서를 쓰지 않았고, 연말에는 총장실 점거 농성에도 동참했다. 그리고 학생회장으로서의 임기가 끝나자 학교를 나왔다. 선배들은 학교에 남아 더 학생운동에 투신할 것을 권했지만, 더 이상 학생도 아닌 처지에 학교에 남는 건 아닌 것 같았다. 3번의 학사경고로 제적까지 당한 걸 모든 가족들이 아는데, 재입학을 하겠다고 다시 등록금을 받을 수도 없었다.
마치지 못한 공부를 끝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마흔이 되어서였다. 대학원에서 원하는 공부를 하고 싶은데 받지 못한 학사학위가 걸림돌이었다. 이제 와 20년 전 다니던 학교에 등록하는 건 무리였다. 전적 대학의 이수 학점이 너무 적었고, 다시 다닌다면 최소한 2년은 다녀야 했다. 재입학금과 한 학기에 수백만 원이나 하는 등록금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재입학이나 편입을 통하지 않고, 기존의 학점을 인정받으면서 학위를 딸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뿐이었다. 학점은행제 혹은 독학사 시험. 학점은행제는 한 학점당 8만 원의 학비가 들었고, 독학사 시험은 혼자 교재를 사서 공부하고 시험을 통과하기만 하면 되었다.
학점은행제로 졸업을 하려면 들어야 할 학점이 80학점이나 되었다. 1학점 당 80,000 × 80학점. 무려 640만 원이나 되는 학비가 필요했다. 물론 학교를 다시 2년 다니는 것보다는 저렴하지만. 외벌이에 두 아이를 키우는 우리 입장에서는 큰돈이었다. 결국 독학사로 방향을 잡고 교재를 구입했다.
독학사는 1~4단계에 이르는 시험을 1년에 한 번씩 본다. 빠르게 시험을 보면 1년 안에도 4년제 학위를 취득할 수 있다(고 홍보한다). 모든 단계의 과목을 과락 없이 한 번에 통과하기만 한다면.
안 하던 영어공부를 20년 만에 하려니 머리에 쥐가 났다. 그나마 전적 대학 학점을 발판 삼아 1, 2 단계는 수월하게 넘어갔다. 3단계부터는 학부 때도 성적이 좋지 않았던 영문법에서 고전했고, 배운 적 없는 영어학 개론은 4점이 모자라 탈락했다.
(좌)지금 봐도 뭔 소린지 모르는 영어학 개론 (우)학부때와 달리 재밌게 공부한 19세기 영미문학
다음 해 가을. 낙제한 과목을 다시 공부해서 합격하고 겨울에 4단계 시험을 통과했다. 이듬해 2월, 드디어 집에 학위증서가 도착했다. 친정 가족들이 모인 밴드에 학위증서 사진을 올리고 글을 남겼다. 그때 등록금 날리고 속 썩여서 미안하다고. 마치지 못한 공부를 20년 만에 마쳤노라고.
그리고 작년. 학사학위를 취득한 목표였던 대학원에 진학했다. 내 이름으로 등록금을 대출받아하는 대학원 공부는 소홀하려야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들어가는 돈이 얼만데!’하는 생각이 수시로 들었다. 수업을 빠지거나 과제를 내지 않는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마치 20년 전 받은 세 번의 학사경고를 만회하려는 듯 성실히 출석하고 과제를 냈다. 그렇게 얻은 성적은 3학기 연속 전 과목 올 A+. 대학교 성적이랑 퉁치면 2점대는 되겠지. 그렇다고 대학교 성적증명서의 숫자가 바뀌지는 않겠지만.
막상 공부를 다시 시작해보니, 그때가 아니면 하기 어려운 경험들을 놓친 게 아쉬웠다. 한 번도 받지 못한 성적 장학금, 우리 집 형편에는 어렵다는 생각에 일찌감치 포기한 어학연수, 어차피 성적 때문에 신청할 수도 없었을 교환학생 같은 것들. 대학생이면 간다는 유럽 배낭여행과 워킹홀리데이도.
독학사를 준비하기 1년 전부터 마을카페에서 영어 낭독 모임을 하고, 코로나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도 스크린 영어를 따로 공부한 건 이런 미련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외국인과 대화할 일은 없고, 외국은 한 번도 나가보질 못했지만. 언젠가는 다른 나라 사람과 대화할 일이 있지 않을까. 막연한 상상을 해본다. 올해 2학기 전공수업으로 예정되어 있던 해외연수가 코로나 때문에 취소되지만 않았어도, 몇 마디쯤 써먹을 일이 있었을 텐데.
이제는 공부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공부는 평생 하는 것. 인생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일들로 우리를 기다리고,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건지 늘 궁금하니까. 이 불안을 견디고, 잘 살려면 공부라도 해야지 싶어서.
학생이라고 다 공부 열심히 해야 되느냐고 묻는(저항하는) 둘째 아이에게도 종종 이야기한다.
"학교 공부를 잘할 필요는 없는데. 어차피 공부는 평생 해야 돼. 세상이 계속 변하잖아. 너도 변하고. 세상을 알고, 너 자신을 알려면 공부해야지. 엄마 봐봐. 이 나이에도 공부하잖아. 그리고 네가 꼭 하고 싶은 공부가 분명히 있을 거야. 그게 뭔지 앞으로 잘 찾아봐."
"엄마가 말이야, 한때 만화가가 꿈이었어." "그럼 이거 한 번 그려 봐." 초등학생이던 아이들이 좋아하는 캐릭터를 그려주자 그제야 고개를 끄덕끄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