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간의 마을카페 장례를 치르며
브런치에 "이별 후에 알게 되는 것들"이라는 매거진을 만들고 글을 쓰면서 알게 된 것이 하나 있다. 아끼고 사랑하던 이들과의 이별은 충분히 애도하지 않으면 어느 날 이유 없이 차오르는 슬픔처럼 심연을 건드린다. 공간이나 장소 역시 그렇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대학 진학을 위해 스무 살에 떠난 고향집 때문이다.
마흔이 넘어서부터인가 부쩍 고향집이 나오는 꿈을 자주 꾸었다. 꿈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은 결혼 후 아이들을 낳고 6년간 살았던 신혼집도 아니고, 7년째 살고 있는 지금의 아파트도 아니었다. 성인이 된 후 알고 지낸 사람들과 고향은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 꿈속에서 사람들과 만나고 대화하고 음식을 나누는 곳은 늘 폐가가 돼버린 시골집이었다.
하루는 고향집에서 어린 시절의 나를 안아주는 꿈을 꾸다가 깼는데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 집에 무슨 감정을 두고 온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같이 고향집에 가보자고. 언니와 함께 둘째 아이까지 대동하고 먼 길을 떠났다. 무려 17년 만이었다. 사람의 발길이 끊긴 고향집은 집이 가진 포근함과 아늑함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옆집 아주머니가 텃밭처럼 마당에 심은 작물들이 아니었다면 아무런 생명도 없는 황량한 폐가에 불과했을 것이다.
목재와 시멘트로 지은 시골집은 곳곳에 금이 가고 곰팡이가 핀 것은 물론, 화장실마저 예전 재래식 그대로여서 정작 하룻밤도 머물 수 없었다. 나는 2박 3일간의 여정에서 돌아오자마자 글을 썼다. 가난한 농부였던 부모님의 고달픈 삶이 담긴 그 집에 대해. 아궁이에 불을 피워 짓던 가마솥 밥 냄새와 커다란 장독대와 뒷마당의 감나무에 대해. 그리고 작은 책으로 만들어 친정 식구들에게 택배로 보냈다.
며칠 후 큰 오빠게서 전화가 왔다. 내가 시골집을, 부모님을 어떻게 기억하며 살아왔는지 처음 알았다고 했다. 통화를 하면서 우리는 서로 울먹거렸다. 함께 여행을 다녀온 언니도 마찬가지였다. 가족이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고향이라는 작은 세계의 추억들 때문이었다.
그제야 오랫동안 찾지 않던 고향집이 자꾸만 꿈에 나타나던 이유가 짐작되었다. 네 살 무렵 아버지가 직접 지은 고향집은 나라는 존재를 보살펴준 생존의 공간이자, 언어와 관계를 아는 인간으로서 만난 첫 세계였다. 어린 육체와 정신을 길러준 고향을 떠나면서 나는 제대로 된 이별을 하지 못했다. 고향을 떠나 더 넓은 세계로 간다는 설렘에 들떠 집과의 헤어짐에도 의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못한 것이다.
마을카페는 사회적 존재로써 나를 성숙하게 만들어준 공간이다. 카페지기인 나뿐만 아니라 공간을 아껴준 많은 이들과 마음을 나누고 관계망을 영글어간 공간이기도 하다. 이곳이 문을 닫고, 재개발로 허물어지고 나면 어떤 방식으로든 아쉬움이 남을 것이다. 왜 그렇게 문을 닫아버렸을까 후회하거나, 소식을 듣지 못한 이들로부터 원망을 들을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공간의 대표였던 나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상주를 맡게 되었다. 상주로 행사를 준비하며 자주 질문했다.
지난 시간을 짧은 장례 기간 동안만이라도 문상객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다만 마을카페가 크지 않은 공간이다 보니 손님을 맞이하는 것도 넉넉지 않은데, 그간의 추억을 보여주기엔 공간이 비좁았다. 기획단 회의를 거쳐 오랫동안 세입자가 없는 3층의 빈집을 전시장으로 활용하기로 하면서 전시 공간 문제가 해결되었다.
마을북카페 나무는 기본적으로 차를 마시고, 밥을 먹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처음엔 커피와 음료만 팔다가 나중에는 매출을 올리기 위해 라면, 샌드위치, 백반, 술안주, 반찬에 이르기까지 먹는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팔았다. 나중에는 그릇이 부족해서 집에서 안 쓰는 그릇들을 가져오기도 하고 폐업하는 가게에서 얻어오거나 주변에서 기증받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모양새가 다른 온갖 종류의 그릇들이 싱크대 안에 꽉 차게 되었다.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들을 나눠먹으며 친밀감을 쌓고 관계망을 만들어 온 역사가 깊기에 공간의 역사를 보여주기에 그릇만 한 게 없다고 생각했다.
"나무"라는 이름의 공간을 상징하던 자작나무도 위층 다락방에 전시했다. 사람들이 작별인사를 쓸 수 있도록 메모지와 펜을 준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주방에는 공간의 역사를 보여줄 수 있는 사진 영상을 틀어두었다. 그동안 카페에서 했던 수많은 소모임을 비롯해 우리가 나누던 음식, 공간을 채워준 물건들까지 많은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조문객을 맞이할 분향소는 가장 큰 방에 마련하였다. 공간을 처음 만들던 2013년에 세 명의 실무자가 함께 만든 간판은 오랫동안 방치해둔 탓에 꽤나 더러운 상태였는데, 애도행사를 위해 깨끗하게 씻겨서 물기를 말려두었다. 행사 전날, 잘 마른 간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향로와 국화꽃을 준비했다.
나는 3일장을 치르는 내내 검은 옷을 입고 손님들을 맞이했다.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사람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다 같이 웃으며 인사를 찍곤 했다. 손님이 다녀간 분향소에서 괜히 간판을 쓰다듬어보기도 하고, 때로는 몰래 눈물을 훔쳤다.
이틀 째가 되던 날에는, 이 공간을 만드는데 가장 손을 많이 보탠 3명의 초기 실무자들에게 공로패를 전달하는 행사가 진행되었다. 처음 카페를 만드는데 누구보다 노고가 컸던 이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었다. 상주단에 참여하는 카페 운영위원들과 고민한 끝에 감사패를 제작하기로 했다. 아무것도 없던 빈 공간을 마을카페로 만들고 운영해온 초기 실무자들에게 감사를 전할 수 있는 가장 값진(24k) 방식으로. 감사패에 들어갈 문구는 짧게 작성했다.
나무라는 세계를 열어준 당신의 용기와 열정에 감사드립니다.
공간을 만들자고 제안했을 때 선뜻 함께 나서 준 그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었고, 내가 듣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정작 공간을 열 때는 주지 못했던 감사패를 공간을 닫는 순간에 준다는 것이 이상했지만, 이렇게라도 감사 인사를 전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마지막을 슬픔이 아닌 감사로 마무리할 수 있어서.
개소식처럼 방문객에게 떡과 기념수건을 나누어주며 떠들썩하게 치른 3일간의 애도행사가 끝난 후 페이스북에 조촐한 감사 인사를 남겼다.
지난주 [안녕, 마을북카페 나무!]를 많은 분들의 도움과 위로 속에 잘 치렀습니다.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나무의 마지막을 행복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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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을 넘어 지역의 소중한 자산으로 남을 나무의 출발을 응원해주신 출자자님과 나무에 삶의 이야기를 공유해주신 모든 소모임 회원들께도 감사 인사드립니다. 여러분 덕분에 나무가 태어났고 숨 쉴 수 있었습니다.
행사에 다녀가신 많은 분들이 나무에 응원의 메시지를 남겨 주셨습니다. 나무는 사라져도 이 공간에서의 경험이 씨앗이 되어 또 다른 공간으로, 새로운 활동으로 이어졌으면 좋겠다고요. 분명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보낸 8년 6개월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니까요. 이 공간에 머물렀던 우리의 마음속에 나무는 어느새 잎을 피웠고 열매를 맺었고 그늘을 내어주었으니까요. 새로운 곳에서 작은 씨앗으로 다시금 뿌리내릴 우리 안의 나무를 꿈꾸어 보아도 좋겠습니다.
마을북카페 나무 카페지기 드림.
이제 카페는 텅 비었다. 책과 테이블, 의자, 일부 그릇은 인근 지역의 지역아동센터가 학부모들을 위해 새롭게 만드는 공간에서 필요하다고 하여 옮겨갔고, 주인을 찾지 못한 다른 물건들은 폐기 처분되었다. 차마 버리지 못한 몇 개의 물건들은 우리 집 베란다로 향했다.
며칠 후 재개발 사무실에 전화를 걸었다.
"저희 공간 다 정리했어요."
담당자가 오더니 싱크대 문을 하나하나 열어보며 확인한다.
"깨끗하게 정리하셨네요."
며칠간 계속 정리해오던 공간인데 막상 텅 빈 공간을 보니 기분이 헛헛했다. 경험은 마음의 상자에 담고 활자로 남겨두었건만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없으니 그 긴 시간이 한여름밤의 꿈처럼 사라진 것만 같았다. 8년이 넘는 시간 동안 꼭꼭 눌러 담아왔던 기억의 물방울이 바다에 툭 떨어져 번지는 느낌이었다. 단순히 공간을 닫은 것이 아니었으니까. 나의 영혼을 살찌워 준 작은 세계 하나가 문을 닫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