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녕 Sep 21. 2020

건물주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월세 좀 감면해주시면 안 될까요?"

올해 2월. 코로나 19 사태 이후 주민들의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하던 마을카페는 모든 소모임과 프로그램 홍보를 멈추었다. 마을카페를 이용하는 주민 대다수가 학교나 어린이집을 가지 못하는 자녀들을 둔 엄마들인 데다, 계속되는 사회적 거리두기로 소모임을 열기가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렇잖아도 겨울이면 쉬는 소모임 때문에 겨울을 겨우 버텼는데, 코로나 때문에 소모임 회비와 음료 매출이 없으니 운영비 마련이 큰 걱정이었다. 주민들의 발길은 뚝 끊어졌어도 월세와 공과금은 똑같이 나가니까. 대책이 필요했다.


3월 운영위원회 회의에서 건물주에게 말이라도 좀 꺼내 보면 어떻겠느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어차피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되면 이대로 계속 월세를 내며 버티는 건 무리였다. 하지만, 건물주와는 좀체 연락을 주고받는 일이 없는 터라 선뜻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우리는 힘없는 을이 아닌가.     


건물주에게 말을 꺼내볼까 말까 어영부영하는 사이. 국내의 코로나 확진자 수는 2월 말만큼은 아니지만 수도권을 중심으로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였다. 시의 사립 작은 도서관으로도 등록된 마을카페는 '휴관 권고 요청'이 내려온 상태였고, 언제 정상화될지도 예측할 수 없었다.  


올봄 내내 주민들의 발길이 멈춘 마을카페. 이 공간은 사람들이 안에서 북적거릴 때에야 존재의 의미가 살아난다.


4월 월세를 내야 되는 날이 가까워오자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느낌이었다. 더 이상 체면치레를 할 형편이 아니었다. 안 되겠다. 말이라도 꺼내 보자. 그래도 이 건물에서 우리가 월세를 내며 지내온 지 벌써 7년인데. 재개발이 된다고 동네가 들썩일 때 계속 있어도 된다며 오히려 우리를 안심시키던 건물주 아닌가.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지만. 혹시 깎아줄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월세가 하루 이틀 늦을 때 양해의 문자를 보낸 것 말고는 써본 적 없는 장문의 문자 메시지를 건물주에게 보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2층에 마을 북카페 나무입니다. 저희는 시의 지원금 없이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봉사하고 프로그램 회비로 운영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3월 내내 문을 닫고 있다 보니 수입이 전혀 없는 상황입니다. 4월에도 당분간 문을 열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사장님도 코로나 사태로 어려우실 것 같아 이런 말씀드리기 송구스럽지만, 월세를 조금이라도 감면해주시면 안 될까요?


휴대폰을 붙잡고 한참을 기다렸지만 몇 시간 동안 답신은 오지 않았다. 괜히 건물주의 속만 긁어대는 문자를 보낸 건가. 역시 안되나 보다, 포기하고 있던 그때. 건물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사장님도 코로나 때문에 힘드실 텐데 이런 문자 드려서 죄송해요."     


우리 코가 석자인 데다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걱정이 건물주 걱정이라지만, 인근 계곡에서 부부가 함께 식당을 운영하는 건물주도 평소보다 어렵긴 마찬가지일 터. 죄송하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어떻게 해주면 되겠어요?"     


건물주가 먼저 된다, 안된다 말해줄 줄 알았는데. 저렇게 물어오니 대답하기가 참 난감했다. 내가 예상한 답은 "저희도 그렇게는 좀 어렵겠습니다."거나 "00만 원 깎아줄 테니 00만 원만 보내세요."였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정말 솔직하게 "이번 한 달은 그냥 넘어가 주시면 안 될까요?" 하고 싶었지만, 너무 양심이 없는 것 같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무슨 말이라도 해야 된다는 마음에 불쑥 튀어나온 말.


"저... 월세를 반만 깎아주시면 안 될까요?"


정말 반을 깎아줄 거라는 기대로 말한 것은 아니었다. "반은 너무 많고, 30% 로 합시다."하고 나름 절충안을 제시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건물주는 별로 주저하는 기색 없이 통쾌하게 말했다.


 "50%요? 그렇게 해요, 그럼."     


아예 못 낸다고 했어도 그러라고 할 기세의 말투였다. 


"정말 고맙습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해주면 되겠어요?"

"한 달 안에 코로나가 진정되면 다행인데, 만약 계속되면..."

"계속 힘들면 다음 달 가서 또 얘기해 봅시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지난 5월부터 현재까지 월세를 50%만 내고 있다. 수도권 10인 이하로 코로나가 완전히 진정될 때까지 월세를 50%만 내기로 건물주와 협의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쯤 모든 집기를 팔고 폐업 절차를 밟았을 것이다.




별다른 수입도 없는 마을카페가 그나마 코로나 사태 초기를 버틸 수 있었던 건 1월 말에 꾸린 계모임(일명 '나무계') 덕분이었다. 대표인 내가 계주를 맡고 마을카페를 포함한 주민 11명이 함께 모여서 총 12좌의 계모임을 꾸렸다.  그렇게 꾸린 나무계의 첫 목돈을 마을카페가 받았다. 목적은 수입이 일정치 않은 마을카페가 조금이나마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이자 없이 돈을 마련하는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론 '코로나 19'를 버티는 힘이 되었다. 하지만 계모임은 결성을 위해 만난 첫 모임 이후 한 번도 성사되지 못했다.


하루는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있는 운영위원이자 계원인 J로부터 안부 전화가 왔다.     


"집에서 어떻게 지내세요?"

"요즘 코로나도 그렇고, 손목도 계속 아파서 애들이랑 집에서 배달시켜먹으며 지내."     


종종 아프던 손목 통증이 심해져서 요리도 그렇고 설거지도 제대로 못 하는 상태가 몇 주째 계속되는 중이었다. 얘기를 들은 J는 한참을 '어떡하냐'며 걱정하더니 친정엄마가 끓여주신 곰탕을 좀 갖다 주겠단다.   

  

"나오지 말고 그냥 집에 계세요. 문 앞에 두고 갈게요."     


J의 이 말은 코로나로 인해 도래한 언컨택트(Uncontact) 시대가 어떤 것인지를 피부 깊숙이 느끼게 해 주었다. 가족이 아닌 타인과는 되도록 만나지 말 것을 권고하는 사회.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세상이었다.


아무래도 J가 택배기사처럼 음식만 문 앞에 두고 가게끔 놔두는 건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얼굴은 볼 수 없어도 마음은 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냉장고를 뒤져 간식거리를 쇼핑백에 담아 미리 문 앞에 내놓았다. 코로나로 밖에 나가질 못하니 이것저것 온라인으로 주문해서 쟁여둔 음식들이었다.


"문 앞에 작은 쇼핑백 2개 있을 텐데 챙겨 가. 간식으로 먹으라고. 떡이랑 빵은 냉동이라 해동해야 돼" J에게 문자를 미리 보냈다.


잠시 후 J에게서 전화가 왔다.


“문 앞에 두고 가요. 그런데 간식을 뭘 이렇게 많이 주셨어요? 잘 먹을게요.”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이미 집 앞까지 다녀간 모양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와 보니 먹거리가 가득 담긴 상자가 문 앞에 놓여 있었다. 아픈 손목으로는 못 들 만큼 상자가 무거웠다. 큰 아이에게 부탁해 상자를 들여와 음식들을 꺼냈다. 곰탕뿐 아니라 찐 옥수수며 고구마, 만두, 떡볶이, 파김치, 돈가스, 시래기 된장까지. 족히 일주일은 먹을 분량이었다.



반찬과 간식이 골고루 있어서 정말 알뜰하게 잘 먹었다.



J의 반찬 나눔이 너무 고마워서 SNS에 소문을 냈더니, 며칠 간격으로 다른 이들의 방문이 이어졌다. 새로 담근 장아찌를 전해주겠다며 아파트 주차장에서 마스크를 낀 채 쇼핑백만 후다닥 주고 간 동갑내기 L, 직접 만든 전복 볶음밥과 겉절이와 함께 기분전환용이라며 딸기 케이크까지 전해주고 간 S언니. 아파트 소화전에 영양제를 잔뜩 넣어주고 간 후배 K.


딱히 줄 것이 마땅치 않았던 나는 집에 있던 자잘한 간식들을 나누기도 하고, 마침 친정언니가 직접 만들어서 보내 준 마스크를 이들과 몇 장씩 나누었다. 언니가 여러 가지 디자인으로 마스크를 꽤 많이 보내온 덕에 몇몇 출자자들이 마스크를 왕창 사가기도 했다. 언니는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좋은 일이라며 마스크를 더 만들어 보내주었다. 마스크 판매로 예상치 못한 수익을 올린 우리는 여세를 몰아 J의 친정어머니가 담가 주신 명이나물도 팔고, 직접 오이소박이도 담가 팔며 여름을 버텼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말, 만나면 안 된다는 말 때문에 공동체에도 위기가 왔구나 싶었는데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가 서로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 이자도 없이 마을카페를 믿고 곗돈을 맡겨준 주민들과 문 앞에 음식을 놓고 간 이웃들, 흔쾌히 월세를 깎아준 건물주까지.


그들 모두와 마음 편히 얼굴을 마주 하고 차 한 잔 마실 수 있는 날이 하루빨리 왔으면 좋겠다. (건물주께서 운영하는 식당에 회식도 하러 가고!)





이전 08화 카페에서 명이나물을 판다고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