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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Aug 22. 2020

경기도가 우리 카페에 2,100만 원을 준 이유

'먹튀'는 안 됩니다. 


마을카페를 하면서 겨울이 이렇게 무서운 줄 처음 알았다. 여름방학보다 두 배나 긴 소모임 휴식기. 이것은 곧 회비 수입과 매출이 동시에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했다. 게다가 겨울에 틀 수 있는 난방 기구라고는 오픈할 때 기증받은 낡은 등유 난방기 하나뿐. 등유를 넣어야만 온풍 기능이 되는 난방기다 보니 번번이 5만 원에 달하는 등유 값이 들어가는 것은 물론이고, 가동할 때마다 두통을 일으키는 등유 냄새를 빼기 위해 창문을 열어야만 했다.


난방기를 교체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운영비 마련으로도 허덕이는 마당에 새 난방 기구를 살 형편이 될 턱이 없었다. 간판에 불이 안 들어와 저녁에는 찾아오기가 어렵다거나, 실내조명이 어두워 오래 있으면 눈이 침침하다는 불편한 목소리도 자주 들렸다. 게다가 창고나 수납장이 부족해서 작은 방에는 냅킨이며 테이크아웃용 포장용기 박스가 마구잡이로 쌓여갔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고 했던가. 우연히 들어간 경기도청 홈페이지에서 공동체 공간 리모델링을 지원하는 공모사업을 발견했다. 곧 다가올 겨울을 대비해야 할 계절이었던 터라 되든 안 되든 무조건 신청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정된다면 시설 개선으로 당분간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김칫국을 마시면서 서류를 준비했다.      


초조한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렸다. 결과 발표 예정일은 12월 1일. 하지만 발표일로부터 며칠이 지났는데도 결과와 관련된 전화나 문자가 오지 않았다. 대부분 탈락자에게는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탈락을 직감했지만, 메일로라도 공문이 온 게 있나 싶어 확인해 보았다. 역시나 선정됐다는 메일 같은 건 없었다. 아직 발표가 안 된 건가?  담당부서에 전화를 걸었다. 


“이 번에 공동체 공간 지원 사업에 지원한 공동체인데요, 혹시 결과가 언제 발표될까요?” 

“며칠 전 도청 홈페이지에 선정 공지 올라갔어요.” 


이미 공지가 되었다고? 그런데도 아무런 연락을 못 받다니. 떨어졌구나 싶었다. 


“아... 네.”      

“직접 확인해 보세요.”     


공무원 특유의 무미건조하고 형식적인 말투에 풀이 죽은 채 전화를 끊었다. 같은 지역에서 두 곳이 신청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아마 다른 곳이 선정된 모양이었다. 그냥 사업도 아니고 큰 예산을 지원하는 공간 리모델링 사업인데 현장을 와보지도 않고 신청 서류만으로 선정하다니.  밀실행정 아니야?     


대체 어느 곳이 되었는지 확인이라도 해야겠다 싶어 서둘러 홈페이지에 들어가 공지를 확인했다.      


신청 건수 110건, 선정 건수 27건. 

    

경쟁률 4:1. 경기도가 31개 시군이니 27건이면 거의 각 시군별로 1곳씩 선정된 셈이다. 나는 선정된 도시들과 장소들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갔다. 시흥시, 김포시, 하남시, 남양주시... 화면을 내려가다 보니 13번째 우리 시가 있다.      


가만. 그 옆에 쓰인 이름이 낯익다. 


마을카페 나무? 뭐야. 왜 됐는데 아무도 연락을 안 해줘? 


혼잣말을 하다가 순간 밀실행정을 의심한 것이 미안했다.      




이듬해인 2016년 4월. 일손을 모아 책과 집기를 정리한 뒤 본격적인 공사를 시작했다. 등유가 필요 없는 냉난방기를 천장에 설치하고, 간판도 전기가 들어오는 형태로 교체했다. 내부가 어두워 눈이 침침하다던 주민들의 의견에 따라 실내조명을 추가로 설치하고, 잡다한 짐을 정리할 수납장도 작은 방과 부엌에 두었다.      


 

(좌)잡다한 짐으로 가득하던 작은 방. 형광등 조명이라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아니면 어두웠다.  (우)짐들을 정리하고 좌식으로 바꾼 작은 방. 조명을 바꾸니 훨씬 밝아졌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오면 눕힐 데가 마땅치 않던 작은 방을 좌식으로 바꾸고, 수유도 가능하도록 미닫이문을 설치해 좀 더 독립적인 공간으로 꾸몄다. 중고이긴 했지만 로망이던 원목의자 몇 개도 홀에 들여놓았다.  


청소와 정리 후, 보름 동안 닫았던 문을 다시 열고 동네 주민들과 잔치를 열었다. 미리 떡을 돌리고 찾아 올 주민들을 위한 음식도 따로 마련했다. 기타 동아리와 우쿨렐레 모임에서 축하 공연을 하고 지역 방송국에서는 취재를 나왔다. 경기도청과 마을공동체를 지원하는 중간 지원 조직에서도 마을의 사랑방임을 인증하는 작은 간판을 들고 축하해주기 위해 카페를 찾았다.      


새롭게 공간을 정비하고 주민들과 함께 축하하기 위해 직접 샌드위치를 만들고, 떡도 맞추어 음식을 준비했다.


버티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싶었지만, 물리적 환경이 바뀐다고 운영이 저절로 나아지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어차피 월세와 운영비를 마련하는 일은 우리의 몫이니까. 하지만 행정의 지원은 하드웨어적인 변화뿐 아니라 공간을 이용하는 지역주민들의 인식에 변화를 가져왔다. 


'우리끼리 책 읽고 수다 떨고 밥해 먹는 곳'이라고만 생각했던 공간이 행정의 지원을 받으면서 '사회적 관계망을 보듬고 지역주민의 행복에 기여하는 소중한 공간'이라는 인식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공공성의 재발견이라고나 할까.      


경기도가 소중한 세금을 들여 마을카페 나무와 같은 주민 커뮤니티 공간을 지원해준 이유도 여기에 있을 터였다. 주민 스스로 필요한 걸 기획하고 실행하는 데 부족한 부분을 행정이 지원하는 것. 주민자치, 참여예산제와 같은 제도는 행정의 책임과 권한이 미치지 못하는 골목과 마을에 주민들이 직접 나서 목소리를 내고 실천할 때 그 가치를 발휘하는 거니까.     


어떤 사람들은 행정의 공모사업 예산이 '눈먼 돈'이라고 말한다. 정말 필요한 곳이나 사람들에게 가지 못하고 그저 정보를 아는 약삭빠른 이들에게 뿌려지는 돈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낡은 주택가에 자리한 마을카페에서 이웃을 만나고, 음식을 나누고, 무언가를 함께 배우며, 세상은 아직 살 만하다고 느끼는 우리에게는 '눈 부릅뜬 귀한 돈'이었다.      


(좌)방부목에 폐현수막 목봉을 칠하고 못을 박아 직접 만든 설립 초기 간판. 불이 안 들어와서 저녁에는 찾아오기가 어렵다거나 무섭다는 의견이 많았다. (우)공사후 교체한 간판



<사람, 장소, 환대>의 저자 김현경은 말한다. 


인간은 자신이 한번 의미를 부여한 장소를 쉽게 잊지 못하는 존재다.
장소가 바로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마을카페가 존재하는 의미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마을에 언제든 자신이 방문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것, 이 곳에서 타인에게 환대받을 수 있다는 것. 이러한 의미를 부여받은 공간을 사람들은 쉽게 잊지 않을 것이다. 이 공간에서 타인과 주고받은 상호작용의 경험이 크든 작든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로 작용할 테니까. 




리모델링 이후 마을카페에는 더 많은 주민들이 찾아온다. 다른 공동체와의 만남과 연대활동도 늘어났다. 귀한 세금을 지원받았으니 제 몫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도 그만큼 늘어났다. 운영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버틴 건 그 때문이었다. 물론 지원금을 받을 때 3년은 운영해야 한다는 경기도와의 약속도 있었다. '먹튀'는 하면 안 되니까.     


이제 3년 운영이라는 의무 기간을 넘기고도 더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문을 열고 주민들을 만난다. 여전히 잔바람에 가지가 휘청일 만큼 마을에 깊이 뿌리내리지는 못했지만, 이 공간에서 나누는 소박한 풍요가 더 많은 이웃들에게 골목 구석구석 퍼져 나가기를 기대하면서.  



*빨리 코로나 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되어 마을카페에서 자유롭게 소모임을 열고 주민들을 만날 수 있길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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