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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Jul 22. 2021

8년 동안 돈 못 번 마을카페, 문 닫습니다.

8년 차 무임금 카페지기의 속내 고백

"마을카페를 올 해까지만 하고 닫아야 할까 봐요."


이런 말을 입버릇처럼 하던 때가 있었다. 오픈한 지 1년도 안되어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한 겨울 매출이 10만 원도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 후로도 운영은 쉬이 나아지지 않았다. 월세를 내야 하는 날이 다가올 때면 적자가 더 늘어나기 전에 이 공간을 접어야 한다는 생각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적자가 너무 심해서 닫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것 같아요."


그때마다 사람들의 반응은 비슷했다.


"문을 닫는다니 너무 아쉬워요."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저희가 도울 일이라도..."


솔직히 말하면. 바라던 반응은 그런 게 아니었다. 도와준다는 말은, 이 공간을 앞으로도 계속 유지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일테니. 공간 책임자인 나로선 도망갈 퇴로가 막히는 셈이었다.


2013년 여름, 문을 연 주민 커뮤니티 공간 '마을북카페 나무'. 올 해로 만 8년을 맞았다.


이곳은 카페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마을'이라는 이름을 걸고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설립한 주민 커뮤니티 공간이다. 아무리 '대표'라는 직함을 걸고 운영을 책임지는 사람이라도, 함께 했던 사람들의 동의 없이 함부로 닫을 수다. 정확히는 닫고 싶어도 닫을 수가 없었다. 문을 닫으면, 공간을 설립할 때 받은 주민 출자금과 그간의 차입금을 상환해주어야 하는데 그럴 돈이 부족했으니까.  솔직히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계속 유지하는 것 말곤.


어쩔 수 없이 운영위원들과 머리를 맞대며 끙끙거렸다. 월세를 마련하자! 이번 달만, 이번 달만 어떻게. 돈이 모자라면 현금서비스를 받고, 보험약관대출을 받고, 사람들에게 차입금이나 출자금이란 명목으로 돈을 빌렸다. 협동조합 디자이너로 간간이 일하며 수익금이 발생하면 공간 유지비를 후원하고 차입금을 갚아나갔다. 올 해만 살아남자고 다짐하면서. 그렇게 8년이란 시간을 버텼다. 내가 월급을 받는 직장인이었거나 자영업자였다면 어땠을까.


진작 사표를 쓰거나 폐업을 했을 것이다. 마을카페라는 주민 커뮤니티 공간을 통해 지역공동체성을 회복하고 우리의 삶을 조금이나마 풍요롭게 하는 일이라는 가치는 분명 소중하지만, 적자 운영을 견디며 8년이란 시간을 유지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2016년 경기도의 지원을 받아 처음 천장에 냉방기를 달고, 조명이 켜지는 간판을 다는 리모델링을 했을 때. 사람들이 남겨준 응원의 메세지들.
메모로 다 남기지 못할 만큼 많은 일손을 보태준 주민들과 기증품들.


공간을 유지해야 한다는 이 숙제가 너무 무겁고 어려웠기에 도망치고 싶은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럴 때마다 나를 붙잡은 건 공간에 대한 사람들의 애정과 연대의 손길이었다.




올해 5월 15일은 마을카페를 계약한 지 꼭 8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월세를 내고 문을 닫기로 예정된 날이기도 했다. 계속되는 코로나 사태와 재개발 이주를 앞두고 어쩔 수 없이 내린 선택이었다.


"이젠 정말 어쩔 수가 없네요."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비슷한 질문을 던졌다.


"다른 데로 이사 안 가요?

"혹시 새로운 공간 알아보고 있어요?"


이렇게 되묻는 이유는 대략 셋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단순한 호기심이거나 새로운 공간에 대한 기대감, 혹은 아쉬움.


공간 운영이 어려워서 닫아야겠다고 하소연할 때마다 사람들이 내비치던 서운함과 비슷하지 않을까. 달라진 게 있다면 사람들의 질문에 더 생각해볼 것도 없다는 투로 말하는 나의 대답이다.


"아뇨. 그냥 문 닫아야 할 거 같아요. 돌려받는 보증금으로 새로운 공간 마련하려면 그때보다 돈이 더 많이 필요할 거예요. 공간 설립과 운영에는 사람들의 에너지가 많이 필요한데 솔직히 저는 이제 나이도 들고, 체력도 예전 같지 않거든요. 돈도 벌어야 하는 상황이고, 지치기도 했고요. 예전처럼 제가 나서기는 어려워요. 공간에 대한 욕구를 지닌 분들이 새롭게 사람 모으고, 돈 모아서 하는 게 맞을 것 같아요. 8년 전 출자하셨던 금액은 공간 접으면서 모두 돌려드리고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죠."


꾸민 말은 아니었다. 그저 무임금 노동에 더 이상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쓸 여력이 없음을 그렇게 에둘러 표현했을 뿐이다. 나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사람들에게 일일이 이야기하지는 못했다. 코로나19로 수입이 끊긴 작년에 모아두었던 얼마간의 돈은 바닥났고, 손목 통증과 부러진 팔의 후유증으로 디자인일을 놓아야 했으며 2년간의 대학원 재학 중 학자금 대출뿐 아니라 생활비 대출까지 받아야 할 만큼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았다고. 남편의 허리 수술로 5백만 원이 넘는 돈을 카드로 긁은 데다 고3인 아이에게 끊임없이 들어가는 사교육비를 감당하는 것도 버겁다고. 그래서 보증금 속에 묻힌 남편의 출자금을 돌려받아야 하는 상황이라고.


8년이 넘도록 공개적으로 하지 못했던 '돈과 생계'에 대한 토로. 이 말을 겨우 몇 주 전에야 운영위원들에게 털어놓았다. 




마을카페를 만든 후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다양한 삶을 마주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성찰할 기회를 얻었다. '좋은 일을 한다' 거나 '멋지게 산다'는 칭찬도 듬뿍 받았다. 리더로서 책임지는 경험 속에서 내면이 단단해지고,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는 기쁨도 누렸다. 화폐로는 절대 환산할 수 없는 값진 경험이었다. (이런 일을 하며 돈까지 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우아한 백조가 물아래서 미친 듯이 다리를 휘젓는 것처럼 고달팠던 것 또한 사실이다. 처음 시작할 때는 즐겁고 좋은 일만 있을 것 같았지만, 현실은 당장 때려치우고 싶을 만큼 힘든 날도 많았다. 월세 내는 날이 다가올 때면 걱정으로 잠이 안 올 정도였으니까.


게다가 늘 마이너스인 생활비 통장과 적금 하나 없는 노후 준비, 끊임없이 오르는 물가, 성큼성큼 자라는 아이들. 들어갈 돈은 점점 늘어나는데 돈이 안 되는 마을카페를 하느라 시간을 들이고 노동하는 일이 점점 버거워졌다. 공간을 책임져야 하는 자리에 있는 한, 먹고사는 문제에 올인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혼자 문을 박차고 나올 수는 없었다. 이곳은 공동체 공간이고, 안정적으로 대표직을 승계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구성원 간의 합의가 필요한 건 말할 것도 없고. 


이렇게 말하면 대표가 마치 혼자 다 일한 것처럼 말한다고 느끼는 이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맞다. 공동체 공간이 한 사람의 의무감이나 책임감으로 운영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 되어서도 안 된다. 한 사람에게 너무 많은 역할과 책임이 집중되는 건 공동체의 지향과도 맞지 않을뿐더러 건강한 방식이 아니니까. 모든 공동체가 그러하듯 이 곳 역시 사람들의 연대와 상호부조로 운영되어온 공간이다. 그럼에도 '대표'라는 이름이 때론, 무겁고 버거웠음을 고백한다. 




사람은 항상 겪어보고 나서야 그 일이 지닌 경험과 무게를 실감한다. 막연히 상상하던 것과 직접 온몸으로 부딪히는 현실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존재한다는 걸. 있잖은가. 선택한 뒤에는 돌이키기 어렵고 되돌릴 수도 없는 일들.


이런 일들은 절대 머리로는 알 수 없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풍덩 빠진 후에야 내가 발을 들인 이 세계가 어디인지를 깨닫게 된다. 벗어나려 허우적거리기도 하고, 끝을 보겠다는 심정으로 아예 깊이 들어가 보기도 하면서 수천 번 벼려지다 보면. 막연하고 불투명했던 시작이 서서히 명료함이라는 끝에 다다른다. 나에게는 결혼이 그랬고, 두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이 그랬다. 그리고 마을카페 역시 그러했다.


주민들과 함께 마을카페를 운영해 온 8년은 무엇보다 개인으로서의 약점과 부족함을 생생히 알게 해 준 시간이었다. 막연하게 꿈꾸던 이상에서 내려와 날카로운 현실세계로 발 딛게 해 준 시간이기도 했다. 기쁨과 즐거움 뒤에는 언제나 수고와 노력이 뒤따른다는 것도. 돈의 긍정적 가치와 사람의 귀중함을 깨달은 것도 마을카페 덕분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 8년간 긴 숙제를 한 기분이 든다. 무척이나 개인주의적이고 냉소적이던 내가 이곳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몽글어진 것을 보면. 아마도 고통과 행복이 동시에 존재하던 이 공간을 따뜻함에 가깝게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시간이 흐르고 나면 힘들었던 일 대신 이곳에서 사람들과 함께 반짝거리던 추억만 남을 테니.  




8년째 대표라는 타이틀을 달고 버텨 온 내게 재개발은 어쩌면 호재(?) 인지도 모른다. 이주비와 보상금이 주어지는 덕분에 출자금과 차입금을 상환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어차피 다음 대표를 못 구한다면 이렇게 닫는 것도 방법이다 싶어 속 시원하다가도, 정말 이 공간이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면 서글퍼진다. 오랫동안 찾지 않은 마을카페 매거진에 글을 쓰기 시작한 건 이 때문이다. 한동안은 그럴지 모르겠다. 아마 문을 닫기 전까지, 어쩌면 문을 닫은 후에도. 


한편으론, 많은 사람들의 수고와 도움으로 여태껏 버텨왔는데 마치 혼자 고생한 것처럼 푸념과 투정을 이렇게 늘어놓아도 되나 싶기도 하다. 좋았던 추억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그래도 힘든 순간이 많았던 건 사실이니. 이 매거진의 글들을 읽은 분들이라면 이 글에 다 쓰지 못한 전후맥락과 복잡다단한 심정을 이해해주시겠지 싶어 구구절절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지난달부터 이 공간을 이용해왔던 소모임 구성원들을 초대해 질문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낡은 건물을 허물고 새 건물이 들어오면 정말 우리의 삶은 나아지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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