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노래홀릭 06화

그렇게 소녀는 슬픈 어른이 된다

영화 포카혼타스 중 'farewell'

by 글쟁이 써니

나의 어린 시절, 당시 소녀들에게 디즈니 영화가 가지는 위상은 대단했다. 소녀들이 원하는 모든 것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독립적인 공주, 멋지고 유머 있는 왕자, 그리고 해피엔딩. 소녀들의 세계에서 해피엔딩은 불문율이자 절대 진리였다. 디즈니사는 매년 여름마다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알라딘 같은 영화를 개봉하여 소녀들에게 즐거움을 선물했다. 그리고 사춘기 소녀 시절의 진입기에 있었던, 말라깽이 단발머리 소녀였던 나는, 그 해 여름에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던 새 디즈니 영화 포카혼타스를 보러 갔다.

아직 친구들이랑 영화를 보러 간 적은 없기에 부모님, 동생과 함께 갔다. 학교는 이미 기다리던 여름 방학을 했고 여름 저녁의 서늘한 공기와 붉게 노을이 지는 하늘에 가슴이 설레어왔다. 극장이 있는 시내 중심가는 일이 끝나고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 방학을 맞은 아이들이 뒤섞여 기대와 느슨함이 뒤섞인 열기로 가득했다.

부모님은 애니메이션이 별로 내키지 않으셨는지 옆 상영관에서 하는 "프렌치키스" 라는 영화를 보시겠다며 나에게 동생과 둘이서 보라고 하셨다. 나는 "프렌치키스" 가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제목도 정말 어른 영화 같다는 생각을 했다. 동생과 둘이서만 영화를 본다는 것에 약간 긴장했던 것 같기도 하다. 영화는 역시 다른 디즈니 영화가 늘 그래왔듯 소녀들의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재미있었다. 머릿속에는 나무 요정이 부르던 신비로운 멜로디가 며칠 밤을 계속 맴돌았다.

여주인공 포카혼타스는 역대 디즈니 영화의 여주인공들에 비해 미모가 좀 떨어지는 것 같았으나 자유로움과 당당함이 부각되어 오히려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멋진 남자 주인공과의 로맨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빚어내는 안타까운 아름다움, 평화에 대한 그럴듯한 메시지까지 지금 보면 적당히 교훈적이고 적당히 예쁘게 다듬어지고 인디언에 대한 폭력을 미화된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봤다. 하지만 결말이 주는 충격에 한동안 헤어나오지 못했다. 두 사람은 헤어진 것이다. 보는 내내 생각했다. 이게 끝이 아닐 거야. 다시 만날 거야. 하지만 두 사람이 이별한 채로 영화는 끝나버렸다. 며칠 간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왜? 저렇게 사랑하는데 왜 헤어져야 하지? 그녀는 왜 이별을 선택한 거지? 하지만 좀 멋지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니. 이별한 남자가 가는 배를 언제까지나 바라보고 있는 여자의 쓸쓸한 뒷모습은 아름다웠고 그래서 부럽기까지 했다.

나는 이 영화가 너무 좋아서 용돈을 모아 OST가 담긴 카세트테이프를 사고 엄마를 졸라 비디오 테이프까지 구했다. 집에서 몇 번이고 다시 봐도 재미있었다. 친구가 놀러오면 친구와 같이 봤다. 귀여운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했던 그 친구는 여주인공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배를 잡고 깔깔대며 웃었다. 뭐야, 진짜 못생겼다. 여주인공 맞아?

나는 영화의 주제가 "colors of the wind" 가 너무 좋아서 종이에 가사를 받아썼는데 가사가 무슨 내용인지 참을 수 없이 궁금했다. 당시 다니던 학원의 영어 선생님께 해석해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바쁜 선생님을 졸라서 한 줄씩 알아낸 의미는 마치 보물이 숨겨진 지도를 해석하는 것처럼 흥미진진했다.

하지만 시간은 흐른다. 그리고 되고 싶지 않지만 피할 수 없는 그것, 어른이 되어간다. 자신이 아무 것도 몰랐던 것은 온실 속에 있었기 때문이고, 그럴 수 있었던 건 그 누군가가 자기 대신에 모진 비바람을 맞으며 지붕이 되어주었기 때문임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지붕이었던 존재, 예를 들어 옆 상영관에서 우리는 어른들이 보는 영화를 볼 테니 동생을 잘 부탁한다는 이야기를 건넸던 부모님 같은 존재는 어느덧 늙고 지치고 약해진 모습으로 조금씩 희미해져 가고 있다.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늘 혼자만의 짝사랑에 빠지기 일쑤였으나 어른이 되어 영화 속 공주들처럼 진짜 사랑을 한다. 처음으로, 사랑에 빠진 사람이 역시 본인을 사랑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나 이루어지던 기적 같은 첫사랑을 체험하고 서로의 손을 어루만지며 이젠 죽어도 한이 없을 것 같다고 웃기도 한다. 하지만 많은 첫사랑들이 그렇듯 결국 좌절된다. 영화 속 그녀처럼 현실의 벽에 떠밀려 원치 않지만 어쩔 수 없는 이별을 선택한다. 하지만 영화 속 그녀처럼 의연하고 아름답지 못하게 온 몸의 물을 다 쏟아내듯 지옥 같은 이별을 한다. 그리고 알게 된다.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사랑 같은 건 아름답긴 커녕 순도 100프로, 아니 그 이상의 절대 고통일 뿐임을. 너무 아파서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축복임을.

어릴 때는 부모님의 잔소리를 들으며 공부를 하던 소녀는 이제 공부가 아닌 일을 한다. 금요일 밤엔 주중의 잿빛 노동에 지친 심신을 위로하며 맥주를 마시고 티비를 본다. 티비에서는 청년들의 아프리카 배낭 여행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다. 마음은 언제나 어디든 훌쩍 떠나고 싶으나 몸은 언제나 사슬 같은 것에 매어있고 티비 여행 프로를 보며 대리만족을 할 뿐이다. 그 때 웅장한 폭포에 서린 무지개와 그 광경을 보며 감동으로 넋을 잃은 청년들을 비추며 멀리서부터 익숙한 멜로디가 들려온다. 까마득한 옛날, 어디선가 수없이 많이 들어본 멜로디. 잃어버린 낙원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조용하고 잔잔하면서도 깨끗한 멜로디에는 한 조각의 그리움과 슬픔이 서려 있다.

기억이 날듯 날듯 나지 않는 그 때, 희미한 영상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황금빛 햇살을 받으며 바다를 바라보는 여자의 뒷모습이다. 바다에는 배가 한 척 떠 있고 여자는 하염없이, 언제까지나 그 배를 바라보고 있다. 그제야 기억이 난다. 바로 영화 포카혼타스의 마지막 장면이다. 어쩌면 인간의 청각에는 기억을 불러오는 칩 같은 것이 심어져 있는지도.

배경음악은 다름 아닌 영화 포카혼타스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었지만 가장 좋아했던 장면, 활발하고 순진하고 엉뚱한 공상을 좋아하던 말라깽이 소녀였던 시절, 돌려보고 또 돌려보던, 그래서 이젠 머리에 완전히 각인되어버린 그 장면에서 나왔던 노래, "farewell" 이었던 것이다.
가사가 없는 곡은 조용하고 잔잔한 멜로디로 시작한다. 남자와 여자는 손을 잡고 있고 주변엔 걱정스러운 표정의 사람들이 둘러서 있다. 남자는 아파서 떠나야 하지만 여자의 손을 놓고 싶지 않다. 남자는 특유의 유머감각으로 헤어지는 와중에도 농담을 한다. 여자는 서글픈 미소를 짓는다. 미소는 곧 사라지고 이별이 다가오고 있음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 남자는 진지한 눈빛으로 묻는다.

"함께 가 줄래요?"

"난 여기 남아야 해요"

"그럼 나도 여기 남겠어요."

"안돼요. 당신은 가야만 해요. 우리가 떨어져 있다 해도 우리 맘 속에 언제나 우린 함께 있을 거예요."

두 사람은 작별의 키스를 한다. 잔잔하던 음악은 별안간 애절해진다. 손을 부여잡고 서로를 바라보는 둘에게 동료 선원들이 가야 한다고 재촉한다. 둘의 맞잡은 손이 떨어지고 여자는 본인이 한 선택을 본인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망연한 표정을 짓는다. 사람들도 눈물을 흘린다.


이별이란 맞잡은 손을 놓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잡지 못하는 것이다. 영원히.


출발을 알리는 선원들의 고함 소리 가운데 배는 출발한다. 갑자기 여자는 정신이 드는 듯 정반대 방향으로 달려간다. 음악의 템포는 빨라지고 멜로디는 격렬해진다. 전속력으로 달리던 그녀의 발은 벼랑 앞에서 멈춘다. 한 발만 더 디디면 낭떠러지이다. 그곳에서 그가 탄 배가 보인다. 그의 마지막 모습이라도 볼 수 있게 되었다.

화면은 다시 그를 비춘다. 누워있는 그를 향해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에 익숙한 그녀의 향이 섞여 있는 것 같아 그는 숨을 들이마신다. 그리고 그녀 쪽을 향해 작은 몸짓으로 그녀가 보지 못할 작별의 인사를 한다. 그녀가 가르쳐준 인디언식 작별 인사다.

그녀는 언제까지고 그가 탄 배를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배는 점점 멀어져간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다만 담담한 표정으로 마지막으로 배를 향하여 그에게 가르쳐준 인디언식 인사를 할 뿐이다. 이것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여행 프로그램은 이미 끝나있고 캔맥주는 비워져 있다. 금요일 밤은 깊어가는데 쉽게 잠이 오지 않는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른이 된 소녀는 고개를 빼고 뒤를 돌아보고 있을 뿐이다. 이미 온실의 지붕은 무너졌고 맨몸으로 노출된 실제 세계는 황량하고 혹독하고 무미건조하다. 핑크빛보다 잿빛에 가깝고 첫사랑은 좌절된다. 그러고도 생은 아무렇지도 않았다는 듯이 지속된다. 그렇게 소녀는 슬픈 어른이 된다. 아무리 고개를 돌려봐도 절대로 낙원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래서 슬픈 어른이 된 소녀는 과거의 소녀를 향해 말한다. farewell(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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