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노래홀릭 04화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비포 선셋, A waltz for a night

by 글쟁이 써니

어떤 사람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가 사랑하는 인연을 만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어떤 행운아들에게는 그야말로 물흐르듯 너무 쉽게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말이다.
비포 시리즈(비포 선라이즈, 선셋, 미드나잇) 커플은 상당히 멀고 번거롭고 고통스럽기까지 한 과정을 거쳐서, 돌고 돌아 그 인연을 이룬다.
두 사람은 젊고 치기 어린 20때 초반에 만나 사랑에 빠지고 짧고 불같은 사랑을 나눈다. 아름다운 여행지에서의 낭만적인 사랑이다. 그때는 인생이 마냥 장밋빛으로 보일 시기이고 앞으로 펼쳐질 날들에 수많은 기회와 좋은 일들이 남아있을 거라 믿는 시기이기도 하다. 사랑에서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가 운명이라면 아마 다시 만날 것'이라고 연락처 교환이나 다시 만날 약속 같은 걸 하지 않다가 마지막 순간 퍼뜩 정신이 든 듯한 남자 주인공 제시의 제안으로 6개월 뒤 이 기차역에서 만나자는 실로 실오라기 같이 위태롭고 연약한 약속을 한다. 그들 말대로 그들은 'young and stupid' 했던 것이다. 인생이 한없이 길고 풍요롭다고 생각하는 그 나이대 청년들이 할 만한 생각이다. 그러나 이는 중대한 착각이자 오류이다. 인생은 길지 않고 풍요롭지도 않다. 오히려 짧은 순간에 중요한 기회들은 재빨리 지나가 버리며 이를 놓치면 좀처럼 다시 잡기 어렵거나 다시는 그 기회가 안 주어지기도 한다.

6개월 뒤 안타깝게도 셀린의 할머니는 하필 그 때 돌아가셨고 두 사람의 재회를 위한 천금 같은 기회는 무산되었다. 제시는 다시 셀린을 만날 기회를 잡으려고 작가가 된다. 그리고 9년 뒤, 파리에서 천금 같은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 두 사람은 그 동안 하고 싶었지만 못한 말을 봇물 터지듯 한다. 여전히 영혼의 소울 메이트처럼 같이 있으면 너무 재미있고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제시는 갖은 핑계를 대며 어떻게든 더 셀린 옆에 있으려 한다. 아무리 아닌 척 연기하지만 둘은 여전히 서로를 원한다. 하지만 제시는 유부남이고 4살 난 아들까지 있는 상황이다. 제시는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고 결혼 생활이 힘들지만 아들을 너무 사랑하고 아들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참을 수 있다고 한다. 다시 만난 두 사람의 인연은 거대한 벽에 가로막혀 있는 것이다.



"늘 꿈을 꾸었어.난 플랫폼에 서있고.넌 기차를 타고 내 곁을 스치고 또 스치고.지나가. 그러다 다시 꿈을 꾸지. 임신한 네가 내 옆에 누워있어.그 부드러움때문에 눈물이 날 거 같은데."
"나는 가끔 악몽을 꿔. 창밖으로 네가 지나가고 또 지나가고 또 지나가고..."
"진작 사랑따윈 포기했어야 해. 자기가 날 바람 맞춘 그 날. 그 날 포기했어야 해.."
"난 아직도 꿈이 많지만 사랑에 대한 꿈은 접었어..그게 제일 슬프지..."
"내겐 남은 게 없어 너와 보낸 그날 밤, 나의 로맨티시즘을 모두 쏟아 부었기 때문이야. 니가 나의 모든 것을 다 가져가 버린 것 같아"
"내 말은...너네 할머니가...일주일 더 늦게 돌아가셨거나...아니면 우리가 일주일 더 먼저 만나기로 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우리 삶은...정말 많이 달라졌을거야...그치"

제시는 인연의 어긋남, 그 미묘함과 아슬아슬함에 절망한다. 인연의 각도가 한치만 틀어졌더라도 셀린과 함께할 수 있었을 미래를 수없이 상상하고 그것이 현실이 될 수 없음에 절망한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그녀는 현실이 아니라 꿈이었다. 현실에는 그가 셀린 대신 차선으로 선택한 여자, 지금의 아내가 있을 뿐이었다.
이것은 그의 꿈으로 수없이 나타난다. 그는 기차역에서 그녀를 기다린다. 그에게 셀린은 수많은 인연 중에서 가장 사랑했던 여자,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이 안되는, 마음도 몸도 아니 영혼의 모든 조각이 완벽하게 들어맞는 것 같았던 여자이다. 그래서 단 한 번의 만남이었지만 결코 잊을 수 없어서 책으로 남기고 그녀를 만날 기회를 얻기 위해 작가가 되게 만들었던, 그런 여자.
셀린 쪽에서도 제시가 운명의 남자였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놓치고 말았다. 그 이후로 여러 남자를 만났지만 누구도 제시 만큼 완벽히 잘 맞는 소울 메이트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만난 제시에게 농담처럼 "프랑스 남자와는 잘 맞지 않아. 뭐랄까 그들은 좀 덜 밝힌달까, 그런 게 나랑은 안맞아." 라고 농담같이 한 말에 그녀의 진심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녀는 내심 제시같은 남자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 비엔나에서의 그 완벽한 순간을 재연할 수 있는 남자를. 하지만 제시가 아닌 어떤 남자와도 그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녀는 제시를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노래를 만들었다.


Let me sing you a waltz

왈츠 한번 들어봐요

out of nowhere, out of my thoughts

갑자기 떠오른 생각들

Let me sing you a waltz

왈츠 한번 들어봐요

About this one night stand

하룻밤 사랑의 노래

you were for me that night

그날밤 당신은 나만의 남자였죠

Everything I always dreamt of in life

내가 살면서 꿈꾸던 모든것을 줬죠

But now you're gone you are far gone

하지만 이제 당신은 멀리 떠나갔죠

All the way to your island of rain

당신의 아득한 섬으로

it was for you just a one night thing

당신에게는 그저 하룻밤의 일이겠죠

But you were much more to me

하지만 당신은 나에게 너무나 소중했어요

Just so you know

당신도 알다시피

I hear rumors about you about all the bad things you do

당신의 안 좋은 행동들에 대한 루머들을 들었어요

But when we were together alone

그러나 우리가 단 둘이 있을 때

You didn't seem like a player at all

당신은 전혀 그런사람처럼 안보였어요

I don't care what they say

남들이 뭐라고 하든

I know what you meant for me that night

그날 당신이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알아요

I just wanted another try

다시 돌아가고 싶어요

I just wanted another night

그날 밤을 한번더 보내고 싶어요

Even if it doesn't seem quite right

어리석은 꿈일지라도

You meant for me much more

내게는 너무 소중한 당신

Than anyone I've met before

내가 전에 만났던 누구보다더

one single night with you little, 'Jesse'

단 하룻밤의 사랑 나의 제시

Is worth a thousand with anybody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어

I have no bitterness, my sweet

저는 행복해요, 내사랑

I'll never forget this one night thing

저는 그 하룻밤의 추억을 잊지 못해요

Even tomorrow, another arms

다른 사람 품에 있어도

My heart will stay yours untill I die

제가 죽을때까지 제 마음은 당신에게 있어요

Let me sing you a waltz

왈츠 한번 들어봐요

One of nowhere, out of my blues

우울한 마음에 떠오르는

Let me sing you a waltz

왈츠 한번 들어봐요

About this lovely one night stand

하룻밤 사랑에대한 노래


그녀는 시종 제시 앞에서 우리식으로 말하면 '내숭'을 떤다. 제시를 그리워하지 않았다는 듯, 잘 지내고 있다는 듯 행동하는 그녀는 전형적인 쿨한 파리지앵처럼 보인다. 심지어 제시에게 비엔나의 그 밤, 관계를 가진 것을 모른 척 한다. 제시가 어떻게 그걸 기억 못할 수 있냐고 하니 잊어버렸다며 대수롭지 않게 둘러댄다. 이 모든 것은 진심이 아니었다. 성공한 작가가 되어 다른 여자와 결혼하여 아이까지 있는 제시 앞에서 괜찮은 척 연기한 것이었다. 그런 그녀의 서러움과 제시에 대한 본심은 공항 가는 택시 안에서 폭발한다. 제시에게 본심을 이야기하다보니 서러움이 북받치고 소리지르며 화를 내게 된다. 그녀의 노래를 듣고 싶다며 집까지 따라 들어온 제시에게 그녀는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러준다. 노래에 제시의 이름까지 넣어서. 노래를 부른 후에는 "설마 이 노래가 너에 대한 노래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라며 역시 특유의 새침함을 보이지만 제시는 이미 그녀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이 노래는 돌고 돌아 다시 만난 제시에 대한 셀린느의 우아한 유혹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 김광섭 시인의 '저녁에' 라는 시가 생각난다. 인연의 신비와 이별의 안타까움에 대해서 이렇게 간결하고도 아련하게 표현한 시는 보지 못했다. 수많은 사람 중에서 사랑하는 인연을 만난다는 것은 사실 기적에 가깝다. 수를 헤아릴 수도 없는 저렇게 많은 별들 중에 어느 별 하나가 나를 바라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 한 사람이 그 별을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인연은 영원할 수 없다. 회자정리(만난 사람은 반드시 헤어진다)라는 말처럼 영원히 지속되는 인연은 없는 것이다. 아무리 정다운 사이였다 하더라도 결국 이별을 맞이하게 된다. 밤이 깊으면(시간이 흐르면) 별은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별을 생각할 때면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렇게 정다운 너와 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 것인지. 불교의 윤회 사상을 생각하면 환생하여 지금과 서로 다른 모습으로 만나게 될 것이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다시 만난다 해도 지금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인연은 영원하지 않기에 더욱 애틋하고 소중한 것임을 이 시는 말해주고 있다. 이 시는 인연의 애틋함에 대한 찬가이고 이별의 숙명에 대한 애가이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저녁에, 김광섭


국적도 서로 사는 대륙도 다른 제시와 셀린은 기차 안에서 기적처럼 만났다. 그러나 젊음의 치기로 인한 순간의 실수, 그리고 우연으로 인한 운명의 장난 때문에 그 소중한 인연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9년의 세월이 흐른 뒤 돌고 돌아 다시 만났다. 그리고 셀린은 '노래' 라는 우아한 유혹으로 다시 손끝을 빠져나가려는 인연의 끝자락을 붙잡은 것이다.

인연이란 얼마나 난해한 것인가. 이 거대한 세상에서 서로를 만나고 알아보고 사랑을 이루고 인연이 끊어질 뻔하고 그것을 다시 이어나가는 과정은 얼마나 지난하고 아슬아슬한 것인지 생각해보게 하는 영화였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