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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how Mar 25. 2018

살아남은 자들의 소통

_죽음보다 힘든 삶의 무게를 이겨내는 방법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수많은 관계 속에 얽혀 살아간다.

부모와 자식으로서의 관계, 형제자매 관계, 상사와 부하직원의 관계, 이웃사촌으로서의 관계…… 관계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정이나 관대함보다는 냉정함과 비판성이 증가되는 속성이 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일이 아닌 먼 타인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자초지종에 대한 깊은 이해보다는 표면적이고 섣부른 판단이 앞서기도 한다.


수많은 인간관계 속에서 자칫 뒤틀린 매듭을 풀지 못하고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다.

사고사와 달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가족에게 미치는 고통으로 인해 더욱 비극적이다.


자신의 가족이 자살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사실에 가족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수치심을 느끼기 때문이다. 또한 죽은 사람에 대하여 분노를 느끼기도 한다. 그럼으로써 정작 사건의 당사자로서 받는 스트레스가 크지만 그것을 해소할 방법을 찾지 못해 우울증과 불안, 수면장애 증상에 시달린다. 심하면 그 자신마저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한다.


이처럼 자살자 유가족들은 가족의 죽음에 책임 당사자라는 주변의 잘못된 시선과 인식 때문에 어디에도 속 시원하게 자신의 심정을 하소연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적절한 애도와 슬픔의 감정도 드러내지 못함으로써 마음의 병을 얻게 된다.


이들의 마음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이 바로 '소통'이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자살 유가족들의 자조모임’이다.
자살자의 유가족들이 모여 각자의 경우를 이야기하고
다른 유가족들의 경험을 수용함으로써
서로 위로를 얻는 효과가 있다.

                       

40대의 장형수 씨는 다니던 회사가 구조조정에 휘말리자 위로부터 부장이던 자신에게 팀원들 몇몇을 해고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그는 그동안 동고동락해온 동료직원들을 차마 자신의 손으로 자를 수 없어 며칠을 고민했다. 그러던 중 그는 차라리 자신이 사표를 던지는 것으로 결론을 내고 말았다. 그로써 문제가 해결되었을까.

그에게도 먹여 살려야 할 가족들이 있었다. 마침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심정이 된 그는 사표를 낸 며칠 후 아내와 함께 결혼기념일 여행을 떠났다.

승용차를 운전하여 고속도로를 달려가던 중 휴게소에 들렀던 그는 담배를 피운다며 화장실 쪽으로 갔다.

'무슨 담배를 이렇게 오래 피우는 거야...?'

아무리 기다려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불현듯 이상한 생각이 든 아내가 남편을 찾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한참 후에야 아내는 화장실 뒤편에서 그를 발견했다. 남편은 이미 화장실 뒷벽에 기대어 세워져 있던 철제 사다리에 밧줄로 목을 맨 뒤였다.

"여보----!!!!"

아내의 비명을 들은 사람들이 달려와 필사적으로 그를 끌어내렸으나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결국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죽을힘을 다해 남편을 구하려 했음에도 결과가 그렇게 되자 시부모는 그녀에게 비난의 화살을 던졌다.

“죽어도 못 헤어진다며 결혼하더니 결국은 네 년이 남편을 잡아먹는구나. 독한 년 같으니라고!”


남편의 죽음을 목격한 당사자로서의 충격과 스트레스만으로도 그녀는 엄청난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그런데도 주위에서조차 싸늘하고 냉담하게 반응하는 것은 더욱 참기 힘든 일이었다. 그것을 견디다 못한 그녀 스스로도 자살 충동을 느끼곤 했다. 누구보다 위로하고 감싸주어야 할 시부모가 그렇게 나오자 그녀는 어디에도 자신의 심정을 하소연할 수가 없었다.


그 이후로 그녀는 몇 년째 날마다 불면증과 우울증, 죽은 남편에 대한 분노로 하루하루가 고통스럽기만 했다.

그러던 중 자살자 유가족 모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임에 나가서야 그녀는 비로소 조금씩 닫힌 마음이 열리고 쌓여 있던 분노와 고통스러운 감정이 희석되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처럼 자살자 유가족들이 심적 고통에 시달리는 이유는 충분한 애도 과정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떤 죽음이든 슬프고 안타깝지 않은 것은 없다. 그럼에도 특히 자살에 대한 부정적 사회인식 때문에 유가족들 혼자서만 슬픔을 끌어안은 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주위의 냉담한 시선 때문에 속으로만 삭이다 보면 그 자신이 우울증과 같은 마음의 병을 앓게 되고 나아가 똑같은 방법으로 생을 마감하는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주변 사람들의 생각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

유가족들이 슬플까 봐, 혹은 아픈 데를 건드릴까 봐 그 이야기에 대해 외면하고 모르는 체할 것이 아니라 진심 어린 애정과 관심을 보여야 한다.

유가족들도 슬픔에 대한 감정을 무조건 삭이기만 할 것이 아니라 드러내서 표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들 유가족 모임은
자신과 같은 아픔을 가진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위로를 얻는 것은 물론 혼자만의 슬픔에 젖어
세상과 단절된 듯한 고립감에서 벗어나 고통을 이겨낼
힘을 얻을 수 있는 긍정적 소통의 힘을 보여준다.
모임을 통해 현재의 절망적인 심리적 상황을 극복하고 이겨낼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배우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같은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비슷하게 겪는 두려움과 걱정에 대해 터놓고 의논할 수 있으며,
그런 과정을 통해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긍정적 사고도 가능해진다.

이처럼 능동적이고 긍정적인 인식의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소통'이다.

혼자만의 방에 숨어 있을 때는 아무런 대안도 긍정적인 인식도 할 수 없지만 아픔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만나 서로의 상처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마음의 위안과 더불어 막힌 것이 뚫리는 듯한 소통의 기쁨을 비로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변에 가족의 자살과 같은 말 못 할 슬픔에 젖어 있는 이가 있는가.

그들을 외면하거나 뒤에서 수군거리거나 상처를 건드리지 않는 것은 배려가 아니라 무관심이다. 따뜻한 관심을 표현하고 세상 속으로 이끌어주어야 한다.

그들은 아픔조차도 터놓고 이야기함으로써 세상과 소통하도록 도와줄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길 바란다.


somehow@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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