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렇지 않은 듯, 차라리 다행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하며 식품공장 주차장을 기쁘게 돌아나오는 나의 머릿속은 다시 뒤숭숭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그렇게 집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남편에게 큰소리치고 나온 마당에, 겨우 이틀 만에 꼬리 내리고 투항할 수는 없으니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나는 다시 도전해보기로 각오를 다졌다.
일단 집으로 향하는 도로변에 멈춰선 채, 근처에서 발견한 ‘벼룩시장’ 이라는 지역구인구직정보지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수많은 구인광고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잠깐동안 살펴보아도 다양한 업종과 일자리에서 사람을 찾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렇게나 많은 일자리가 있는데 왜 사람들은 일할 곳이 없다고 하는 걸까.
나는 이잡듯이 꼼꼼히 하나하나 구인공고를 읽어나갔다. 내가 원하는 조건에 맞는 자리를 찾아보는 것이다. 우선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정하고 근무시간이나 근무형태를 따지며, 집에서의 거리와 급여 등을 체크한다. 볼펜하나를 꺼내어 일단 눈에 들어오는 자리마다 표시를 하고 좀더 마음에 드는 곳을 선별하다보니 뜻밖에도, 정작 내가 할 수 있거나 나를 원할 것같은 자리는 많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럴수록 점점 마음도 급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오늘의 해고소식을 남편에게 알리지 않을 생각이며, 오늘중으로 다시 새로운 자리를 찾아야만 한다. 그리고 나의 취업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내일도 모레도 그렇게 이어져야만 한다.
타블로이드지를 한참 뒤적인 끝에 ‘주부환영!’이라는 구인광고를 발견했다.
눈이 번쩍 뜨인 나는 집과의 거리를 따져보았다. 20-30여분이 걸리던 식품공장과 달리 그곳은 집에서부터 불과 6분정도 소요되는 짧은 거리였다. 예전에 강아지가 살아있을 때, 함께 산책을 종종 다녔던 집근처 산업단지내에 그 사업체가 있었다.
주부환영이라니, 딱 내가 할 수 있는 일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한달음에 달려가 면접을 신청했다. 그러고 보니 그날이 크리스마스이브인 12월 24일이었는데, 크리스마스 지나고 26일부터 출근하라는 답을 들었다.
나는 기뻤다. 어찌됐든 다시 일을 할 수 있게 됐으니까.
나는 그날 퇴근시간 무렵 자연스럽게 집으로 돌아갔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틀만의 해고와 새로운 취업도 나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그리고 한동안 식품회사에 그대로 다니고 있는 것처럼 남편과 데면데면하게 지내기로 마음먹었다.
두 번째로 일하게 된 곳은 일본에서 대규모로 수입되어오는 중고의류(일명 구제의류)를 스타일과 섬유혼용률을 기준으로 수십 가지로 설정해놓은 분류조건에 따라 분류하는 곳이었다. 쉽게, 아파트단지나 주택단지의 골목근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활용의류수거함에 수거된 중고의류와 잡화들을 한데 모아다 분류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렇게 일관성있게 분류하여 수십 톤씩 하나의 묶음으로 완성되면 뜻밖에도 새로운 부가가치가 창출되는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무려 5주 동안이나 일했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지나 새로 시작되는 한해의 첫달은 엄청나게 추웠다.
놀랍게도 일은 끔찍스럽게 힘들고 고되었으며 1년도 훨씬 지난 현재까지도 최악이었다고 기억한다.
물론, 그럼에도 아직까지도 바로 그곳에서 일년 이년 묵묵히 여전히 일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렇게까지 말하는 게 미안하기는 하지만,
그곳에서의 5주는 나에게 그 어떤 시간보다도 길고 깊고 어두운 터널 속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지금도 가끔 그곳을 떠올릴 때면 지옥에서의 천년과 같은 생각이 들곤 한다.
그곳에서는 10여명의 주부들이 매일 같은 작업을 반복했다.
그 당시 장기근속자는 4-5명 정도, 근무기간은 1년 남짓이었고 그 외에는 나를 포함하여 일을 시작한지 몇 달에서 1-2주일 정도의 초보자들이 절반이었다. 4-5명의 남자직원들은 1차 선별되어 바퀴가 달린 대형 카트에 켜켜이 쌓아올려지고 압축된 구제의류더미들을 우리가 하루 종일 각자의 자리에서 주어진 분류조건에 따라 선별할 수 있도록 옮겨주는 역할을 했다.
각각의 카트는 200-500킬로그램 정도되는 무게라고 했다. 그들은 여자들에게 카트를 갖다주기 전에 1차분류된 더미의 무게를 먼저 확인한다. 그 카트들을 하룻동안 얼마나 많이 해체하여 분류작업을 완성하느냐에 따라 개개인의 작업속도와 생산량이 산정되는 것이다.
나는 그 한달 남짓한 기간동안 스웨터분류작업구역에서 일했다. 스웨터는 실로 짠 모든 의류를 일컬었으며 분류기준은 이렇다.
우선 섬유혼용률에 따라 울, 나일론, 아크릴, 폴리에스테르 등의 내용을 확인한다. 그리고 재생가능한 섬유인 울과 캐시미어는 무조건 따로 분류하고 나머지 스웨터들은 두께와 무늬, 소매길이, 반짝이 유무 등등의 다양한 기준에 따라 끼리끼리 분류한다.
그것들은 매일 반복되었고 주어진 하루 8시간의 작업시간동안 최대한 많이, 정확하고 빠르게 분류할 것을 요구 당했다.
내가 일을 시작한지 2-3주정도 되었을 때, 사업장의 주인이라는 재일교포 3세 부회장이 등장했다. 그는 늘 사업장에 상주하는 것은 아니며 본거지인 일본에 머물다가 한달에 한두번 사업장 점검차 들른다고 했다.
어느날 아침, 그는 아침일찍 출근하자마자 주부사원들을 썰렁한 컨테이너 사무실로 불러 세워놓고 그동안의 매일매일 근무성적표를 펼쳐보며 일을 열심히 하지 못한다고 서툴고 어눌한 한국어로 책망했다.
비교대상은 김해, 부산, 말레이시아....알고 보니 그 회사는 그렇게 한국을 비롯하여 해외의 여러 곳에 구제의류분류사업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그림이 그려졌다. 그는 일본에서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는 중고구제의류들을 거의 거저로 긁어모아다 한국 등 여러 곳에 풀어놓고 쓸만한 것들을 골라모아 중고의류판매업자들에게 역시 헐값에 넘겨 이익을 창출하는 것이다.
이미 알다시피 우리나라도 동네마다 재활용의류수거함이 있다. 누구라도 그곳에 입던 옷을 버릴 때는 그냥 던져 넣는다. 그중에는 재활용가능한 의류나 잡화들이 쌓인다. 그러면 업자들은 그것들을 수거해다가 이 회사의 업주처럼 그 어느 낙후된 다른 나라로 돈을 받고 수출하거나 할 것이다.
알고 보니 그야말로 밑천이 들지 않는 기막힌 사업아이템이 아닐 수 없어보였다.
매일아침, 널직한 그 공장 마당에는 수많은 외제차들이 도착했다. 그들은 서울 강남을 비롯한 전국의 구제의류판매업자들이라고 했다.
우리 작업자들이 하루종일 눈에 불을 켜고 난방도 되지 않는 컨테이너 공장내 혹한의 추위 속에, 낡은 옷더미를 뒤적일 때마다 끊임없이 엄청나게 쏟아져날리는 먼지 구덩이속에서 알뜰히 선별해낸 그것들은 그들에게 넘겨진다.
나는 궁금했다.
그들은 굳이 왜 난방도 되지 않고 먼지구덩이나 다름없는 공장으로 꼭두새벽부터 외제차를 끌고 달려와 온종일 헌옷더미를 뒤지는 걸까.
남들이 입던 중고의류 나부랑이가 얼마나 돈이 되길래?
그때부터 나는 내가 하게 된 일의 경제적 매커니즘에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고 나를 면접했던 여직원 영순씨가 알려준 내용은 이렇다.
선별작업이 완료된 구제의류더미는 1킬로그램에 6,050원으로 책정되는데, 최종적으로 선별되어 카트에 압축되어 쌓인 옷더미의 무게는 기본 최소단위가 40킬로그램.
구제의류판매업자는 최소 한번에 40킬로그램짜리 두덩어리를 구매하게 되어 있다. ‘구매’라고는 하지만 그 더미를 자기가 완전히 가져가는 건 아니다. 일단 구매한 옷더미 두 개를 드넓은 공장 내 적당한 자리에 풀어놓고 구매자 자신이 원하는 스타일의 옷이나 잡화들을 찾아내는 작업을 한다. 자신들이 운영하는 중고의류판매점에 걸어놓고 판매하기에 적합한, 상품이 될만한 물건들을 꼼꼼히 골라내는 것이다.
물론 80킬로그램 분량을 몽땅 다 가져가도 되는 것은 맞지만 굳이 그러는 사람은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고 보면 된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40*2=80킬로그램의 구제의류들을 뒤지는 이들은 이른바 진흙 속에서 진주를, 흙속에서 금덩이를 찾아내는 것이다. 실제로 그중에는 새 상품 못지않게 상품성이 좋은 중고의류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매커니즘을 알게되자 나는 자연스레 계산기를 두드려보게 되었다.
말이 80킬로그램이지, 압축되어 쌓인 그 더미에는 적어도 수백장의 옷가지가 들어있다. 약 50만원을 내고 80킬로그램 더미를 확보한 뒤 그 속에서 최소한 100가지를 골랐다고 해보자. 그리고 100가지 의류를 최저 약 1만원씩에 판매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럴 때 업자들은 50만원의 수익을 올리게 된다.
직관적으로는 수익 50만원이 적은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그저 최악의 상황을 상정할 때의 최저 이득에 불과하다. 골라낸 100개의 옷가지 중에는 1만원보다 더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는 질좋은 상품들이 충분하고도 반드시 포함되어 있으므로, 실제로 100가지 구제의류를 제대로 매만져 판매할 경우 업자가 올리게 되는 실제 수익은 예상최저소득 50만원보다 반드시 더 높아지게 될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물론, 그 공장에서 골라낸 구제의류들은 판매업자들 나름대로 세탁과 다림질 등의 매만짐과 보완작업을 거친다고 한다. 그것은 보다 높은 수익을 위한 그들만의 노하우이자 최소한의 노력이며 투자인 것이다.
실제로 서울 강남에서 매장을 운영하는 어떤 판매업자의 경우에도, 자신이 구매한 구제 옷더미를 뒤지다가 진흙 속 진주처럼 숨어있던 여성용 밍크의류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는 그것을 세탁과 수선 등의 보완작업을 거쳐 자신의 매장에 전시했고 중고의류임에도 약 100만원 정도의 가격으로 판매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일은 실제로 드물지 않은 일이라고 했다.
바로 그런 이유로, 매일 새벽부터 공장 한 켠은 금덩이같은 구제의류를 하나라도 더 잘 고르기 위해 천리길도 마다않고 벤츠나 아우디 따위 고급승용차를 몰고 달려온 구제의류 판매업자들로 북적거리는 것이다.
나는 그들이 그렇게 매일 땡잡듯이 골라가는 상품성좋은 구제 스웨터의류를 제대로분류하기 위해 먼지와 심각한 매연과 끔찍한 추위를견디어 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