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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해와 오해 사이

_처음부터 허락따위는 필요없었다

by somehow

생애 처음 식품공장에서 하루 8시간의 노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어둑한 거실은 폭풍전야처럼 고요했다.

남편은 여전히 자기 방에서 일을 하는 중이고, 나는 조심조심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저녁 준비를 했다.

잠시 후 식탁에 마주 앉은 남편은 굳은 표정으로 무거운 음성으로 물었다. 정말로 몹시 이해가 안된다는 듯.


_왜..., 니가 그런 일을 하냐?


가슴이 두근거렸다. 흔쾌히 나의 결정을 인정하고 지지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당연한 순서가 시작되었을 뿐, 그럼에도 나는 흔들림 없이 나아가리라.

편지에 쓴 그대로, 나는 내 결정을 철회하거나 우회하지 않으리라고 답했다.


그러나 지금 와서, 그날의 기억은 사실 아주 아득하고 희미하다. 어쩐 일인지 그와 내가 정확히 어떤 워딩을 주고받았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대체로 어렴풋이 생각나는 내용을 재구성해 볼 뿐이다.


남편이 다시 묻는다.


_일을 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네 전공을 살려서 네 경력을 살려서 그에 맞는 일을 해. 그런 거라면 상관하지 않을게.


나는 풋, 하고 웃을 뻔했다. 바보 같은 게, 저렇게 모른다.

웃음을 삼켜 넣으며 대답한다. 찾아봤지, 안 찾아봤을까? 네가 짐작 못하는 아주 많은 시간 동안 ‘벼룩시장’이며 ‘잡 코리아’며... 취업 구직구인 사이트를 이 잡듯이 뒤져보았고 내 전공과 경력의 나침반 바늘을 따라가 보았지. 해보고 싶은 일, 나를 필요로 할 것 같은 직종, 내 적잖은 경력이 요긴하게 쓰일 것 같은 구인공고에 이력서를 수없이 냈고 지금도 내고 있지. 맨 처음 한 장 두 장 이력서를 띄우며 당장 내일이라도 연락이 올까 봐 걱정스럽기도 했다. 한꺼번에 여러 곳에서 면접을 보자 하면 어쩌지, 그러면 제일 원하는 곳을 골라야지....


아, 그런데 정말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느긋한 마음으로 이력서를 보냈던 어느 한 곳에서도 나를 찾는 소식은 오지 않았다. 그저께도 어제도 그그저께도...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현실을 깨닫고 상황 파악이 되면서 기대와 희망은 실망과 좌절로 빠르게 변질되어갔다. 기대치는 한 계단씩 낮아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더 이상 내려갈 계단이 없다.

그렇게 생산직에 도전하는데도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했던 게 사실이다.

그저 오늘의 첫 출근이 단 한 번의 검색으로 단 한차례의 도전으로 따낸 성공이 아니었다. 전화를 걸어 면접을 보게 해 달라는 그 말 한마디를 꺼내기까지, 네가 상상할 수 없는 수많은 고민과 갈등과 계산과 숙고의 시간을 보냈다. 오랜 시간 끝에 나는 결국 나 자신의 용기와 열정을 믿기로 결심했고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의 삶을 위해 나선 것이다.


네가 아무리 뭐라고 해도, 나는 살아야겠다.

계약금을 받기 위한 글쓰기, 돈을 좇는 글쓰기로 변질된 위선은 이제 지겹다.

그동안 충분히 해왔으니 이제는 다른 일을, 좀 더 역동적이고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다.

생산직 경력은 아무것도 없는 나에게 기회를 준 OO식품회사가 너무나 고마워서 진심으로 눈물이 날 지경이다. 여기서 가능한 한 버티어 경력을 쌓아볼 것이다.



물론 그날의 대화에서 나는 남편을 완전히 이해시키지 못했다. 아무리 설명해도, 나의 논리는 그에게는 어눌한 말더듬이의 변명처럼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나의 노력이 부족하다고 설득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창의적 글쓰기에서 충분히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거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나도 그렇게 늘 생각했다. 더 잘, 더 최선을 다해 글쓰기에 몰두했다면 결과가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인정. 그것을 나는 나의 ‘한계’라고 설명한다. 거기까지가 나의 능력, 나의 최선. 그리고 나는 늘 그보다 역동적인 일을 원했다.


글로써 새로운 창작물을 완성하듯, 그와 다르게 두 손으로 무언가를 조물락거려 만들어내는 것을 나는 분명 즐거워하고 재능도 있었다.

그런 자각이 들 때마다 나는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된다.


나의 부모님은 두 분 다 손재주가 뛰어난 사람들이다.

초등학교 1학년 무렵 어느 때였던가, 하루 이틀, 아버지가 뚝딱뚝딱하시더니 딱 내게 맞는 앉은뱅이책상을 만들어내셨다. 세상에!

희미하고 빛바랜 기억이지만 나의 첫 책상에 대한 느낌과 감동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 후로도 아버지는 늘 집안에 무언가 필요한 게 있으면 이리저리 재료를 구해 영락없이 완성해내곤 하셨다.

어머니 또한 훌륭한 재능의 소유자이시다.

젊은 시절, 전통한복 바느질 기술을 스스로 깨우쳤다. 흔하게 한복을 입던 시절에 태어나셨으니 한복 치마저고리쯤이야 얼마든지 가까이할 수 있었기에 어느 날부턴가 그것을 보고 그대로 만드는 법을 혼자서 터득할 수 있었다. 그렇게 습득한 재능은 어머니 인생의 전반에 걸쳐 귀중한 자산이었으며, 한량이나 다름없었던 아버지 대신 평생 가계를 꾸리고 가족을 부양하는 필수적인 도구가 되어주었다.

나에게 한분 계셨던 이모님 또한 그 옛날에 양장 기술을 익혀 오랜 세월 ‘양장점’을 운영하셨다.

요즘처럼 기성복이 보편화되기 전, 그 시절의 멋쟁이 여성들은 대부분의 외출복을 주로 ‘양장점’ 혹은 ‘의상실’이라고 부르던 개인상점에서 맞춰 입었는데 그 시절이 이모님의 <아라크네 의상실>도 호황기였을 것이다.


아무튼, 이처럼 놀라운 감각과 재주의 피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인지, 일찌감치 어머니의 재봉틀을 타고 놀며 스스로 터득한 덕분인지 나 역시 어릴 때부터 고사리 같은 손으로도 제법 그럴듯한 인형 옷을 만들어 입히곤 했던 것이다.

그보다 멀지 않은 과거인 결혼 후에는 한동안 도자기 작업에 빠져들었다. 흙덩어리를 치대어 물을 발라가며 손으로 주물럭거리거나 물레를 이용해 세상에 하나뿐인 접시와 공기, 술잔이나 술병, 꽃병들을 만들어 냈다.

그저 하나의 흙덩이에서 구체성을 띤 물체가 내 손 안에서 태어나는 과정은 놀랍도록 흥미롭고 한편으로는 매우 신비롭다.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과 닮아있다고나 할까.

가장 최근의 손작업으로는 2012년에 시작했던 가죽 가방 제작이 있다.

글쓰기를 하는 동안에도 혹은 그 이전부터도 늘 무언가 어떤 다른 일을 열망해왔음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점점 지쳐가는 글쓰기 대신 내 두 손을 열렬히 움직여 할 수 있는 그 어떤 일. 그러다 새롭게 알게 된 ‘핸드메이드 가죽 가방 제작’에 꽂힌 뒤, 인터넷을 수없이 뒤지고 확인한 끝에 마음에 드는 핸드메이드 가죽 가방 제작 공방을 찾아냈다. 그리고 1년 가까이 가방 제작 과정을 공부했고, 작업실을 꾸미고 나만의 상표등록도 마치고 4-5년간 열렬히 핸드메이드 가죽 가방을 디자인하고 만들어 주위 사람들에게 적잖이 판매도 했었다.


물론 그런 모든 결정에는 역시 남편의 지지가 있었다. 남편은 늘 나의 관심과 열정에 열렬한 지지자임에 틀림없다.


그날, 첫 출근과 첫 퇴근 후 남편과의 첫 대화는 그저 그렇게 끝이 났던 것 같다. 나는 결코 뜻을 굽힐 생각이 없고, 남편도 나의 황당한 선택을 순순히 인정할 의사가 없어 보였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남편은 그저 빨리 지쳐 나 스스로 나가떨어지기를 바라기로 한 듯했다. 완전한 동의도 완전한 거부도 아닌.

나는 속으로 그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완전한 이해도 오해도 필요 없다. 그냥 늘 그래 왔듯, 지금의 나의 선택과 결정을 존중하고 지지해주길 바랄 뿐.


통과의례 같은 대화가 끝낸 뒤에야 나는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그의 표정 뒤에서 그저 적당한 자포자기와 눈곱만큼의 동의라도 엿본 것 같았기 때문이다. 허락 따위는 처음부터 필요 없었다.


나는 결심했고 이제는 돌아가지 않을 다리를 건넜으니 곧장 어디 앞으로만 나아가 보자, 열렬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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