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시작될 내일을 위해 필요한 준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뒤, 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부담스러운 숙제를 안고 컴퓨터 앞에 앉은 나는 한동안 고민에 빠졌다.
이 모든 일을 남편에게 어떻게 설명하고 이해시켜야 할지 난감했기 때문에.
결혼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나의 글쓰기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림을 하는 틈틈이 아동도서나 일반단행본 출간으로 이어져나갔다. 그렇게 20여년 동안 세상에 출간된 도서는 십수 권에 이르지만 한편으로는 어느 순간부터, 나는 지쳐가고 있었다. 글쓰기의 고통은 즐겁고 창의적인 일임에 틀림없으나 그것이 곧바로 원하는 만큼의 대가로 치환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의욕을 잃어갈 뿐 아니라 조금씩 지겨워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최선을 다해 원고를 완성하고 번듯한 책이 되어 나오기까지는 나의 노력이나 재능 외에도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집필을 시작하기 전 계약서를 쓰고 쥐꼬리같은 계약금이 들어오고 나면 원고를 완성하고 출판사에 넘겨 완성된 책으로 나올 때까지 긴 시간이 소요되는데 그동안 수입은 당연히 발생하지 않는다. 길고긴 시간을 지나 초판이 나와야 마침내 초판 인세를 조금이나마 받을 수 있다. 또한 계약의 유형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 후 책이 잘 팔리면 정기적으로 인세를 받을 수 있으나, 경험상 적어도 나의 글쓰기는 거의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처음에는 내가 쓴 원고가 책이 되어 나온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고,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 같은 게 생기기도 했다. 물론, 지금도 그러한 작업들이 실패였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소중하고 의미있는 시간들이었음은 사실이다. 그동안 출간했던 도서들 중 몇 권은 수년간 여러 번 재판을 찍어가며 적잖은 수입원이 되어주기도 했으나 대부분의 경우는 초판으로 끝나기 일쑤였다는 점이 나를 힘들게 했다.
그렇게 시간이 갈수록, 문제는 나의 재능 부족과 열정의 한계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자신의 능력과 한계는 그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기에.
나의 갈등과 고민과 상관없이 남편은 언제나, 늘, 나에게 너의 재능을 살려 좋은 글을 쓰라고, 좋을 글을 쓸 수 있다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럴수록 나는 점점 더 도박과도 같은 부정기적인 수입이 아닌 고정 수입을 꿈꾸기 시작했다.
먼 나라로 여행을 다니기 위해서, 고급호텔이나 음식점에서 호사를 누리기 위해서, 멋지고 고급스러운 옷이나 사치품을 마음껏 갖기 위해서 정기적인 수입이, 돈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단지 하루하루 한 달 두 달, 함께 나이 들어가는 강아지를 잘 돌보고 남들처럼 대출금을 조금씩 갚아나가며 가끔 맛난 간식을 취하는 식으로 평범하게 삶을 이어가기 위해 절실한 요소가 고정수입이라는 사실을 남들보다 늦게 알아차렸을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2018년 12월말의 바로 그날, 그로부터 훨씬 이전부터 꿈꾸며 타진해오던 수많은 시도와 고민을 박차고 문을 나선 것이다.
생애 처음 생산직 면접에 도전하여 한 번에 합격하고 첫 출근을 앞둔 그날 밤, 나는 남편 몰래 장문의 편지를 작성했다. 내가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왜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지, 설명하고 진심으로 이해를 구했다. 그에 더해 나를 언제나 믿고 지지해주는 시누님들께도 길고 긴 편지를 썼다. 이제까지의 나의 상황과 지내온 노력과 새로운 도전을 결심하기까지의 고뇌와 갈등과 두려움과 용기와 희망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보잘것없는 용기일지언정, 누군가의 응원과 지지가 필요하다고 자백했다.
작성된 이메일들은 출근한 뒤 모두에게 전송되도록 해두었다.
어른들 몰래 나쁜 짓을 꾸미는 아이처럼 조그맣게 몸을 웅크리고 일찌감치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아침 8시 무렵까지 첫 출근을 하려면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사실 1993년 무렵부터 20년 넘는 시간동안 새벽수영을 이어온 덕분에 아침 일찍 일어나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단지, 새로운 일정이 생겼고 그것에 맞추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나의 정신을 더욱 벼릴 뿐이었다.
기쁨과 기대, 걱정근심이 서로 뒤척이는 밤을 보낸 다음날 아침, 아무것도 모른 채 새벽까지 일하고 뒤늦게 잠자리에 든 남편이 깨지 않도록 그림자처럼 일어났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12월말의 이른 아침, 모든 준비를 마치고 식품공장으로의 생애 첫 출근길에 나섰다.
한겨울 아침 공기는 그 어느 때보다 상쾌했다.
면접을 위해 처음 가 보았던 그 길을 되짚어 'OO식품'에 도착한 뒤, 선임자의 안내에 따라 ‘휴게실’로 들어섰다. 그곳에서는 40대에서 60대 즈음으로 보이는 5-6명의 여성작업자들이 각자의 사물함 앞에서 작업을 위한 위생복으로 갈아입고 작업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 밝지 않은 형광등 불빛 아래 더러운 장판이 깔린 방안으로 들어선 나의 시야에 들어온 공간의 느낌은 무척 낯설고 불편했다. 처음 만나는 동료들과 간단한 첫 인사를 나누고 위생복을 건네받았다. 진한 자주색 상하의 작업복인 그것은 한눈에도 오래되어 낡고 꾀죄죄했으며 사이즈도 맞지 않는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당황스러웠으나 선임자의 안내대로 갈아입었다. 땟국에 찌들고 몸에 맞지 않아 겉도는 작업복과 모자를 걸친 내 모습이 기웃거리는 거울을 보니 우스꽝스럽기도, 한심스럽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자괴감이 밀려오기도 했다.
나는 그저 어금니를 악다물고 작은 숨을 내쉬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일, 시작했으니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해보자!
그리고 아무것도 판단하지도 평가하지도 않으려 애쓰며 사람들을 따라 식품공장 작업장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선 그곳의 풍경은 더욱 생소했다.
식재료인 무언가가 담긴 대형 기구 쪽에서는 뜨거운 스팀이 쏟아져 나오고 다른 쪽에서는 커다란 솥 따위의 기구들이 어딘가로 옮겨지고, 또 한쪽 작업대 위에는 정체불명의 고깃덩어리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바닥은 온통 물에 젖어있었다. 그래서 묵직한 비닐장화를 작업화로 신도록 했던 것이다.
우리가 작업장으로 들어갔을 때, 이미 그곳에는 몇몇 남자 작업자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들은 새벽 이른 시간부터 미리 작업을 시작한다고 했다. 끓이고 찌고 옮기고 하는 분주한 작업들이 이어지는 시끄럽고 넓은 컨테이너 작업장은 실내임에도 한겨울 영하의 외부 기온이 그대로 느껴질 만큼 추웠다. 작업복 안에 여러 겹의 옷을 껴입고 양말도 두어 개쯤 겹쳐 신으라는 조언이 왜 중요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선임자가 이끄는 구역으로 따라갔다. 커다란 스테인리스 작업대 위에는 생전 처음 보는 엄청난 양의 고깃덩어리가 쌓여 있었고 옆에 있는 커다란 솥에서는 동일한 식재료가 삶아지고 있었다.
나이가 70세도 넘은 듯한 할머니 작업자가 이미 그곳에서 일차적으로 삶아진 고깃덩어리들을 건져내어 작업대로 쌓아올리고 있었다.
할머니는 이 공장에서 20년도 넘게 일했다고 했다. 정년퇴직까지 했는데, 집이 가깝다보니 일이 바쁠 때는 아르바이트를 하러 계속 다닌다는 것이다. 작고 늙은 작업자가 뭘 얼마나 할까싶어 슬쩍슬쩍 지켜보는 내내 할머니는 노련할 뿐 아니라 기민하고도 충실하게 맡은 일을 해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경력이 중요하구나....그분의 모습에 깜짝 놀란 나는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_이 칼로 기름을 떼어내고 큰 덩어리는 적당한 크기로 고기를 자르면 됩니다.
식품 생산 공장 첫날, 나에게는 커다란 식칼이 주어졌다. 모양만큼 묵직한 그것으로 작업대 위에 쌓인 고깃덩어리를 다듬는 일이었다. 외국의 어느 나라에서 수입되어왔다는 그 대부분의 뼛조각에는 살코기보다 누런 기름덩이가 더 많이 붙어있었다. 게다가 한번 삶았기 때문인지 몹시 역한 냄새가 풍겼다. 뿐만 아니라, 작업이 이루어지는 공간의 위생 상태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만큼 당혹스러웠다. 과연 정말로 이런 곳에서 음식물을 취급하고 제조해도 되는 것인지 일하는 내내 의문스러웠다.
그동안 간편하고 먹을만하다는 이유로 종종 사다먹었던 그 순간들이 떠오르자 몹시 후회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냄비에 쏟아 넣고 팔팔 끓여 덜어 먹으면 그렇게 맛좋고 영양도 풍부해보이던 그것, 내가 애써 고기를 사다가 핏물을 빼고 몇몇 채소를 다듬어 넣고, 충분한 시간동안 끓이고 우린 뒤 적절한 양념을 넣고 간을 맞추지 않아도 되도록 맛나게 조리되어 간편하게 포장되어 나오던 그것이, 바로 이와 같은 곳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난생 처음 간편식의 민낯을 마주한 나는 적잖은 심리적 충격을 받았다. 그러한 충격은 선임자의 지시에 따라 이런저런 일을 하는 내내 수많은 번뇌와 죄책감으로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그야말로 ‘생생한 체험, 삶의 현장’이로구나!
오래전 티비를 통해 막연히 지켜볼 때는 정확히 알 수 없었던 느낌과 경험이 뼛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식품공장에서의 첫날 일은 말할 것도 없이, 말로 설명할 수도 없을 만큼 고되고 힘들었다.
무거운 칼로 끝없이 쌓이는 원재료에서 누런 기름덩이를 제거하고 나면 뼛조각에는 살코기가 거의 남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이걸 정말로 사람이 먹어도 될까 싶은 정도였으나, 그보다 힘든 것은 손이 시리고 아파오는 것이었다. 원래부터 오른손에 방아쇠증후군이 있었던 데다 무거운 칼을 들고 작업을 하다보니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오른손뿐아니라 왼손까지도 엄청난 통증이 시작됐다. 한겨울 외부의 한기가 그대로 느껴지는 공장내 작업대 옆에는 뜨거운 물이 계속 공급되는 커다란 통이 비치되어 있었는데, 손이 시릴 때마다 그 물에 손을 담가 녹여가며 작업을 이어가야만 했다.
모든 것이 낯설고 새로우며 어렵고 힘겨운 작업, 어쩌면 나의 위장취업 혹은 체험 삶의 현장의 하루는 그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