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19 댓글 3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6. 터널을 지나는 법

_가장 열렬한 바람이었던 것처럼

by somehow May 23. 2020
아래로


연이든 아니든,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스스로 그곳에 들어섰을 때처럼 묵묵하고 담담하게 앞으로 걸어가는 수밖에 없다.



막다른 동굴이 아니라면, 언젠가는 빛나는 반대편 출구를 반드시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이 있다면, 저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을 다시 만나리라는 기대만으로도 나는 어두운 터널을 걸어갈 힘을 얻을 것이다.


어느새 나는 스스로 마련한 지도를 움켜쥔 채 점점 깊은 터널 속으로, 더욱 어두운 시간 속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지도에는 그저 작은 점처럼 표시된 이정표, 끝없이 가다 보면 영락없이 나타나리라는 출구가 반드시 있다. 출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지치지 않는 보속(步速)과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어둠 속에서도 낙담하지 않을 반짝이는 등불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가끔은 두려울 것이다.

너무 많이 가기 전에 이쯤에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은 아닌가 뒤돌아보기도 할 것이다. 아니, 조금만 더 가면 눈부신 햇살과 따스한 봄볕 쏟아지는 평온한 정원에 차려진 달콤한 식사가 기다리는 출구가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면서도, 걱정스레 어둠만이 가득한 깊은 터널 속을 살필지도 모른다.


나는 그저 앞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저 터널을 무사히 통과해보는 게 어쩌면 나의 가장 열렬한 바람이었던 것처럼, 나의 마지막 도전인 것처럼.




구제의류 분류작업장의 일과는 고독하고도 고되고, 고단하며 춥고 우울할뿐더러 끔찍한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 하루하루는 나의 뇌리에 앞으로도 오래도록 결코 잊히지 않을 상흔처럼 여전히 남아 있다. 


내가 1월의 추위 속에서 5주 동안 버티어낸 그 사업장의 부감(俯瞰)은 이렇다.

분류작업장으로 쓰이는, 두 개가 하나로 연결된 거대한 컨테이너 공장동 한 개, 분류된 구제의류 더미에서 금덩이를 캐러 온 업자들의 휴게실로 쓰는 소형 컨테이너가 한 개, 남자용 여자용 탈의실용도 소형 컨테이너가 각각 한 개씩, 어디선가 배달되어오는 점심을 먹거나 공용휴게공간으로 쓰는 작은 컨테이너도 한 개, 싱크대와 온수기 등이 설치된 부엌 겸 창고용도의 작은 컨테이너 한 개, 부회장의 사무실용 컨테이너가 한 개, 출근부를 찍고 과장과 경리직원이 상주하는 사무실용 컨테이너도 한 개.

그리고 그 모든 컨테이너 앞쪽으로 여러 대의 주차가 가능한 널찍한 마당이 있다.


천장이 높고 드넓은 분류작업장 내부에는 아예 엄청난 구제의류와 온갖 잡동사니들이 늘 산처럼 쏟아부어져 있고 한쪽으로는 높직이 컨베이어 벨트 작업대가 설치되어 있다.

그 컨베이어 벨트 작업대에서 최초의 분류작업이 이루어진다.

맨 처음 아무렇게나 수거된 상태로 압축된 사각형의 구제의류 더미들은 컨베이어 벨트의 시작 지점인 오른쪽 끝 부분에서 풀어헤쳐진다. 그와 함께 벨트 양쪽으로 작업자들이 드문드문 늘어선다. 감독자의 지시에 따라 가동되기 시작하는 벨트 위로 천천히 무작위로 무조건 집어 올려진 물류들은 한 사람 한 사람 앞을 지날 때마다 정해진 조건에 따라, 누구는 스웨터류만 골라내어 따로 모으고, 또 다른 누구는 바지나 외투류만 재빠르게 골라내고, 다른 그 누구는 셔츠나 상의류만 민첩하게 뽑아 던지는 식으로 작업이 이루어진다.

그렇게 몇 시간씩 작업을 반복하다 보면 각자의 카트가 가득 차오르게 되고 수시로 주변을 오가는 남자 직원들이 알아서 빈 카트로 교체해주는 작업을 되풀이한다. 이처럼 대강의 1차 분류가 끝난 카트들은 같은 유형별로 모여있다가 2차 분류 작업자들에게 옮겨지는 것이다.


나는 2차 분류자로서 스웨터류를 담당했다. 드넓고 큰 컨테이너 내부는 구제의류들을 풀어헤칠 때마다 쏟아져 비산(飛散)되는 엄청난 먼지들로 가득했다. 물론 그것이 평상시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오후 무렵, 지는 해가 컨테이너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지붕을 가로질러 넘어갈 때 아주 짧은 시간, 있으나마나 한 창문 안쪽을 기웃거릴 때에야 잠깐 진실을 비출 뿐이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던 어느 날 언뜻 그렇게, 나는 막연한 근심의 실체를 확인했던 것이다.

당연히 처음부터 걱정스러웠던 진실, 작업자들에게 당연히 지급되던 싸구려 일회용 마스크, 그것이 나를 얼마나 지켜줄 수 있을까 싶었던. 너무나 열악하여 얼른 보면 그냥 재활용 쓰레기 더미에 불과한, 그런 더미들 속에서 작업자들은 영하 10도 이하로 떨어지는 혹한에도 추위를 견디기 위해 두꺼운 외투와 내복까지 단단히 챙겨 입고 일했다. 그도 그럴 것이 먼지 가득한 그곳에는 강제 환기장치도 전혀 없었다. 사람들이 가끔 출입문을 열고 오갈 경우에나 찬 겨울바람이 드나들 뿐이었다. 그뿐 아니라 그곳에는 방장치도 전혀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 추위를 견디도록 지원되는 것이라고는 개개인에게 지급되는 조그만 전기난로 하나씩이 전부였다. 그것은 겨우 무릎 정도까지만 조금 데워줄 뿐이었다. 목장갑이 지급되긴 하지만 눈과 손의 긴밀한 협업이 필수적인 작업에서는 아무리 추워도 장갑도 낄 수 없었다. 같은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양을 분류해내느냐가 생산량으로 표시되기에, 가능한한 빨리 눈으로는 섬유혼용률이 표시된 라벨을 살피는 동시에 손에 잡히는 대로 만져보고 느낌을 따라 선별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토록 혹한을 견디는 것도 고통이지만 한여름의 혹서는 또 어떻게 견디어야 하나.

경험자에 의하면 당연히 냉방도 되지 않는 그 공간에서 뜨겁게 달구어진 한여름의 열기를 버티는 것도 극한의 고통이라고 했다.


내가 매일 여덟 시간씩 스웨터 분류작업을 하던  위치는 바로 통로 옆이었다. 그 맞은편에는 낡은 지게차 한 대가 상주하고 있었고, 바로 옆에는 우리가 분류해낸 의류들을 압축하여 띠로 묶는 거대한 장치도 설치되어 있었다. 지게차는 압축 분류된 최종 상품 더미들을 일정 구역으로 옮기는 작업을 수행했다.

문제는 그 낡아빠진 지게차가 움직일 때마다 엄청난 양의 매연을 뿜어낸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내 앞으로 난 통로를 따라 하루 종일 수십 번씩 오갔으며, 그때마다 그 연통 같은 배기관에서는 심각한 매연이 쉼 없이 뿜어져 나왔다. 그 냄새는 곧바로 나의 호흡기를 타고 들어왔다.

그것은 엄청난 고통이었다. 하루 종일 도로 한가운데 서서 자동차 매연을 들이마시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다. 뻥 뚫린 도로라면 그나마 다를까, 이곳은 사방이 닫힌 커다란 컨테이너 공간이 아닌가. 하나둘 내가 처한 현장의 열악한 현실을 확인하고 절감할 때마다 느껴지는 당혹스러움과 난감함에 나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5주 내내 갈등하고 괴로워했다.

당장 그만두어야 하나. 아무리 그렇다고 며칠 만에, 매연 때문에 먼지 때문에 못하겠다고 어떻게 말하나....

날마다 하루 종일 수없렇게 갈등하던 나는  문득 그곳에서 1년 가까이 일하고 있다는 선임자들을 보았다.

그들은 나보다 한두 살 위이거나 30대의 젊은 주부이거나 베트남에서 온 결혼이주여성이었다. 그들은 나보다 먼저 한겨울 추위를 겪은 적이 있으며 나는 아직 겪어보지 않은 이곳에서의 혹서도 견디어낸 사람들이다. 그들이라고 추위나 더위 따위가 별것 아니어서 견디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정직원이 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버티고 있었다.

면접자는 나에게도 말했었다. 처음에는 계약직이지만 3-4개월 후에는 정직원이 될 수도 있다고. 그들은 그런 기대 때문에 한 달 한 달, 일 년째 버티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로 그로부터 얼마 후, 그곳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 1년 만에야 정직원이 되었다.

나는 너무나 최악이라며 끔찍스러워하는 이곳에서 1년을 버티다니!

그럼에도 그들이 단지 돈만을 위해 일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들에게는 안정된 직장이 필요했을 테지만.

그들의 성실과 근면, 어떤 것에도 흔들림 없는 묵묵함에 놀라워하면서도 상상을 초월하는 먼지와 매연이 심각한 실내에서 장시간, 장기간에 걸쳐 일하는 것은 단순히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현재를 버티어내는 힘은 존경스럽지만, 언젠가 이 일을 그만둔 이후 어느 날 불현듯 건강에 이상이 나타나면 어떻게 할 것인지, 그때 가서는 산업재해를 주장할 수도 없을 텐데.... 나는 걱정스러웠다.

매연과 먼지의 폐해를 절감하고 하루하루 갈등하면서도 나 또한 가능하면 적어도 하루 이틀 만에 그만두지 않기 위해,  하루라도 더 버티어 내기 위해 나름대로 갖은 방법을 찾았다. 먼저 방진마스크를 구입했다. 유독가스가 나오는 고위험 작업장에서 사용한다는 마스크를 찾아 착용해보았다. 그러나 별 효과는 없었다. 그래서 마스크 안에 다시 면수건을 덧대어보기도 했으나 마찬가지였다. 숨만 쉬기 어려운 데다 매연냄새는 그대로 들어와서 더욱 고통스러웠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나 스스로 간절한 용기를 내어 걸어 들어온 곳이지만 그 상황을 견디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인지, 하루라도 빨리 뛰쳐나가는 것이 옳을 것인지 쉽사리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더구나 짧은 시간이었으나 함께 일하던 동료 여성 작업자들과의 관계는 뜻밖에도 무척 호의적이었다는 점이 갈등을 부추기는 요인이었음을 털어놓아야겠다.

나보다 두어 살 많고 성격 좋은, 다른 직장에서 10년 넘게 일하다 퇴직 후 이 곳으로 이직하여 1년이 되어간다는 한 사람. 그 당시 15살짜리 딸이 있는 30살짜리 젊은 엄마 A와 동년배의 또 다른 젊은 주부 둘, 그리고 그들과 같은 나이이거나 더 어린 나이였다고 기억되는 베트남에서 온 결혼이주여성 한 명. 그들이 선임자들이었고 그 내가 입사하기 일주일 전 들어온 B, 내 뒤를 이어 들어온 C가 나의 동기가 되었다. 그중에서 나보다 일주일 전에 들어온 B는 나보다 한 살 아래였는데 원래 살던 충청도 어디서 자동차 부품 생산공장에서 일을 했다고 했다. 그러다 아들이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가자 그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학교 근처에 방을 얻어 아들과 함께 지내며 이곳에 취업을 한 것이다.

B는  자동차 부품공장 일이야말로 고되고 거칠었다고 기억했다. 그래서 그까짓 구제의류 분류작업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더욱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나, 정직원이 되기 전까지 매 주말 주급으로 지급되는 아르바이트 개념의 급여는  세금 한 푼 떼지 않고 일한 만큼 모두 가져갈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라고 했었다. 보통 주 5일을 일하면 하루치 급여를 주휴수당으로 더해서 받을 수 있으므로 주말이면 따박따박 입금되는 주급을 받는 재미가 어쩌면 그 힘든 상황 속에서 꿋꿋이 견디게 하는 최소한의 동력이 되어주는 것이다.


그들 중 특히 기억하는 한 사람은 그때 이미 15살 된 딸이 있는 30살의 젊은 엄마 A다. 따져보니 A가 그 딸을 낳은 나이가 15세였을 것이다. A와 남자 친구는 세상 따위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에 불장난과도 같이 아이를 잉태했을 것이다. 그리고 꿋꿋하게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었다. 종종 집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 젊은 엄마 A의 표정과 목소리는 어린 자녀를 걱정하고 챙기는 다른 여느 엄마들과 다르지 않았다. 언뜻 그 아직 어리고 젊은 엄마 A의 두 손은 현장에서 수 십 년 된 노회한 작업자만큼이나 이미 굵고 거칠어져 있었다.


그래서 내 눈에 A는 아직도 너무나 어리고 맑았으며 어쩐지 아까웠다.

그녀는 어쩌면 그렇게 성실한 엄마가 되기 위해
자신의 청춘과 가능성을 포기했을 것이다.

삶의 고단함 속에서도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아이들 덕분에
묵묵히 현재를 이겨내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녀의 터널 끝에는 분명 따스한 식탁이 마련되어 있으리라.

몇몇 선임자들과 동기들과 남자 작업자들과 휴게시간이나 점심시간이면 잠깐씩 모이게 되는 컨테이너 안에서 나는 함께 힘든 일을 하는 사람들 간의 지지와 배려와 온정을 느끼고 경험했다. 그렇게 함께 일하는 이들과의 훈훈한 동료의식 때문에 일하는 동안 나는 잠깐씩 고단함을 잊어버리기도 했다.





이전 06화 5. 두번째 취업도전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