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큐레이터 입니다만3
나의 편지쓰기는 회사에 취직해서도 이어졌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취직을 했는데, 함께 근무하는 직원들은 물론, 다른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에게도 편지를 써서 보내곤 했다. 행낭에 서류를 넣어 보낼 때 포스트잇에 받는 사람의 안부를 묻는 짧은 쪽지를 보내고, 생일인 직원에게는 축하 카드를 적어 주었다. 덕분에 회사 생활을 조금 편하게 할 수 있었다. 내가 그들에게 적어 보낸 짧은 문장들이 ‘업무 협조’를 원활하게 해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 무렵 나는 모뎀선을 타고 넘나들며 만난 PC통신 동호회 사람들에게도 편지를 썼다. 게시판을 읽거나 채팅을 하면서 알게 된 정보를 활용해 전국에 있는 동호회 사람들에게 편지를 쓴 것이다. 나는 그 때를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시절로 꼽는데, 그 시절의 나는 온갖 고민으로 들끓던 청춘들의 마음을 잠재우기 위해 편지를 썼고, 내가 쓴 편지는 ‘빠른우편’이 찍힌 파란색 스티커를 달고 전국으로 흩어졌다. (‘빠른우편’제도는 1994년부터 2006년까지 시행되었는데, 일반 우편물에 파란색 스티커를 붙이면 접수된 다음날 수신인에게 도착되었다. 물론 3-4일 정도 걸리는 일반우편보다 조금 비쌌다.)
연애를 하던 시절에는 문자와 편지로 사랑의 세레나데를 남겼고, 결혼식 날에는 서로에게 보내는 편지를 주례사제가 낭독해 주었다. 그 후 아이를 임신 했을 때는 태교일기 대신 태교편지를 썼고, 크리스마스에는 해매다 선물과 함께 산타클로스 이름으로 쓴 편지를 아이의 머리맡에 두었다. 아이에게 쓰는 산타클로스의 편지는 아이가 산타클로스를 믿었던(혹은 믿는 척했던) 5학년 때까지 이어졌다.
아이가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때부터 열두 살이 되던 해까지 나는 산타클로스의 이름으로 아이에게 편지를 썼는데, 아이가 일곱 살 때는 사과편지를 쓰는 일도 있었다. 그해 어쩌다 편지를 빼먹고 선물만 머리맡에 두었는데, 선물을 펼쳐본 아이가 산타할아버지의 편지가 없다고 목 놓아 울었기때문이다. 나는 우는 아이를 달래며 어쩌면 편지는 오늘 밤에 도착할지도 모른다고 말했고, 아이가 잠든 밤 몰래 ‘편지를 놓고 가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사과편지를 써야했다. 물론 편지봉투에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라는 발신인의 이름을 써야했다.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