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어가며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떠나갈 줄 몰랐다.
보리가 떠난 뒤,
첫째 아이(우주)에게 보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우주가 태어나서 조리원을 거쳐 집에 처음 들어온 그 순간부터 보리는 우주 옆에 있었다.
우주는 정말 많이 울었다.
보리가 무지개다리를 건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뿐만 아니라,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자주 울음을 보였다. 자기 전에 보리가 보고 싶다며 우는 날이 많았고, 어린이집을 오고 가는 차 안에서 창밖을 보다가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집에서는 보리가 앉아있던 작은 공간을 보며 보리를 그리워했다.
14년을 함께 한 고양이를 떠나보낸 것도 슬펐지만, 사랑하는 아들이 그 사실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슬픈 일이었다.
그래서 아들을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보리를 부활시키기로 했다.
물론 의학적인(?) 부활이 아니라 콘텐츠적인 부활이었다.
그동안 촬영해 둔 보리의 [집사's pick] 사진과 영상을 찾아보니 400여 개 정도 됐다.
콘텐츠 소스는 충분했다. 다만, 어떻게 스토리를 풀어야 할지가 고민됐다.
노트북에 백업된 보리와 구름이 관련 사진과 영상 폴더
문득 마음이 바뀌었다.
보리가 살아있던 시절 모습이 담긴 영상과 사진은 그대로 두고,
생성 AI를 활용해 보리가 무지개다리를 건너는 순간부터의 모습을 담아보기로 했다.
우주는 보리를 생각하며 울 때마다, "보리가 하늘나라에서 아프지 않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하곤 했다. 아들이 원하는, 바라는 모습. 보리를 콘텐츠로 부활시키기로 결심했으니, 이왕이면 아들이 원하는 모습을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동화책 만들기
[스토리]
먼저 스토리라인을 적었다.
1. 즐겁고 건강한 모습으로 무지개다리를 건넌다.
2. 보리의 마지막 길에 우주가 사랑을 담아 선물한 민들레씨앗 꽃다발.
3. 무지개다리를 건너고 고양이 친구들을 만나는 보리.
4. 포근한 구름 위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는 보리.
5. 그동안 아파서 먹지 못했던 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는 보리.
6. 고양이 친구들과 신나게 뛰어노는 보리.
7. 하늘 위에서 우주와 하늬(우주 동생) 모습을 지켜보는 보리.
8. 하늘나라 생활에 대한 편지를 적어 우주에게 보내는 보리.
챕터를 구성하고 chatGPT와 Claude를 사용해 이야기에 살을 붙여봤다. 장황하고 구체적인 내용의 동화가 만들어졌다. 프롬프트를 바꿔가며 가다듬어도 우주를 위한, 우주에게 적합한, 우주가 진심으로 공감할 내용으로 보이지 않았다. 엔터를 누를 때마다 그럴싸한 동화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어디 내놔도 손색없을 내용이었지만 내 마음에 들진 않았다.
그래서 이번 이야기는 내가 직접 적기로 했다. 우주가 글씨를 좀 더 잘 읽고 많이 알게 되면 그때는 LLM과 함께 더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보리라.
(7살 정도면 되지 않을까?)
[그림]
Midjourney와 Dall-e 등 몇 가지 모델로 샴고양이 보리를 그려냈다. 우려했던 대로 그림체의 일관성이 걸림돌이었다. 최소한 보리만이라도 동일한 객체로 그려지길 바랐지만 많은 부분에서 디테일이 아쉬움이 느껴졌다. –cref 파라미터를 사용해서 보리의 모습을 유지하면, 의외의 부분이 어긋나거나, 배경 스타일을 유지시키면 보리의 모습이 바뀌곤 했다. 물론 좀 더 많은 리서치와 시도를 했다면 개선이 가능했지만, 당시에는 하루 만에, 정확히 말하면 나에게 주어진 약 3시간 안에, 우주에게 책을 보여주고 싶다는 압박에 사로잡혀 충분한 시도를 하지 못했다.
Midjourney에서 그려봤던 보리의 모습 중 일부.
보리의 스타일은 제각각이지만 어쨌든 각 챕터에 어울리는 그림을 그려냈다. 이야기와 그림이 완성됐으니 이제 합치는 과정이 필요했다. ppt, google slide, word 등 다양한 툴을 고민하다가 Figma를 선택했다. 생성된 그림을 배치하고, 적당한 위치에 텍스트를 올려두는 방식이었다.
Figma에 올려둔 작업본 샘플 (의도적인 다운사이징)
아파서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던 보리가 맛있는 만찬을 즐기는 모습
[고민의 연속]
콘텐츠를 완성하자 또 다른 고민이 생겼다.
이걸 우주에게 어떻게 보여줄까?
실물 책으로 인쇄하는 것, 또는 e-book 두 가지 옵션이 있었다.
아이들을 재우고 새벽 2시까지 완성을 목표로 약 3시간가량의 시간.. 사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번에는 pdf 형태로 만들어서 우주의 마음을 빠르게 달래주고 싶었다. 그렇게 보리의 하늘나라 이야기 첫 번째 책이 완성됐다. 다음날 아침 소파에 앉아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줬고,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우주의 눈빛과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우주에게 이야기 속의 보리는 정말 의심 없는 보리였고, 책을 읽고 반응하는 아이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흥미로웠다. 나에겐 지난밤 창작으로 보낸 시간이 세상에서 가장 뿌듯한 3시간이었다.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보리 이야기로 5권의 동화책을 만들겠다고. 그리고 비용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고, 우주와 하늬만을 위한 실물책으로 만들어주겠다고. 그렇게 보리의 존재가 아이들에게 잊히지 않게 하겠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나에게 정말 소중했던 보리.. 아빠가 되면서 더 이상 좋은 집사가 되지 못했던 내가, 보리와의 추억이 점점 옅어져 가는 걸 느끼는 나 스스로를 위해. 보리를 잊지 않기 위해, 보리를 내 마음에서 보내지 않겠다는 다짐.
보고 싶은 보리.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나만 알고 있는 그 미안함이 너무 크다..
보고 싶어..
[2019년에 적었던 보리의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