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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욱 Sep 10. 2017

요도호(よど号) 납치사건을 아시나요?

우리와 무관한 듯 아닌 듯…


    제주 국제공항(CJU)에서 외국 항공사 여객기를 보는 것은 이제 특별한 일도 아니지만,  그럴 때마다 필자는 낯선 비행기들을 유심히 살펴본다.  생소한 항공사의 로고를 보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추리도 해보고, 우리와는 형식이 다른 항공기 등록번호도 살펴본다. 그리고 기체에 특별한 글자가 있다면 그 뜻을 가늠해보기도 한다.  

    언젠가, 제주공항 주기장에서 에어 마카우 Air Macau(NX) 소속의 여객기를 보았다. 조종석 아래에 ‘RIO DA PÉROLAS/珠江號’라고 씌어있다. 옳거니, 해독할 수 없는 저 글자는 마카우에서 공용어로 쓰는 포르투갈어이고, 그 아래 한자는 중국어구나. 혹시나 해서 찾아보았더니 '주강'은 마카우에 흐르는 강이름이다. 강 이름으로 비행기의 애칭(닉네임)을 쓰는 에어 마카우.


애칭이 붙은 에어 마카우 소속 여객기. 제주국제공항. 박지욱 사진.

    네덜란드항공(KLM)도 전 세계의 도시 이름을 자사 여객기의 애칭으로 쓴다. 이런 애칭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일본항공(JAL)의 ‘요도호((よど; Yodo)’가 아닐까? ‘요도호 사건’으로 유명한 그 요도호. 지금도 북한-일본 간의 외교적 갈등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요도호 사건의 주인공.

    요도호 사건이란 일본 적군파 조직원들이 일본항공 소속의 여객기 요도호를 납치해 북한으로 끌고 간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이 사건이 내막은 잘 모르지만 이상하게도 그 이름은 눈과 귀에 익었다. 궁금해서 찾아보니 이 사건의 ‘무대’가 바로 우리나라였다. 그것도 수도 서울의 김포 국제공항(GMP)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무대'는 비유가 아니다. 진짜 연극이 벌어진 진짜 무대, 야외 특설 무대였다는 말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한번 알아보자.    

    

    지금으로부터 47년 전인 1970년 3월 31일 오전 7시 20분, 후쿠오카 이타즈케 공항(FUK)으로 향하는 일본항공 351편이 하네다 국제공항(HND)을 이륙했다. 3발 엔진 제트 여객기인 보잉 727기에는 승무원 7명과 승객 122명이 타고 있었다. 이륙 후 10분이 지날 무렵 비행기는 후지산 근처를 통과하고 있었는데, 객실에서 소란이 벌어졌다.

    승객으로 가장해 탑승해있던 일본 적군파 행동대원 9명이 권총, 칼, 폭탄으로 승무원들을 위협하며 승객들을 인질로 잡았다. 그리고 곧이어 그들은 조종석으로 난입하여 항공기관사를 인질로 잡았고, 기장에게 기수를 북으로 돌려 ‘북한으로 갈 것!’을 요구했다. 일본항공 역사상 처음 있는 항공기 납치 사건이었다.

      

요도호와 같은 기종인 B727. 인하대교정 . 박지욱 사진.


 

    하지만 기장은 침착하게 이 여객기는 '국내선 비행 거리에 해당하는 연료만 실었기 때문에 국제선 거리인 북한으로는 갈 수 없다'며, 일단 목적지인 이타즈케 공항에 착륙해 재급유를 받자고 설득했다. 연료는 사실 충분했지만 기장은 기지를 발휘한 것이다. 후쿠오카에는 오전 9시경에 착륙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현장에는 이미 자위대가 출동해서 납치된 여객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안 인질범들은 격분하여 서둘러 급유한 후 이륙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기장은 침착하게 납치범들을 설득해 어린이, 환자, 고령자 등  23명의 인질을 석방하게 했다. 재급유를 마친 요도호는 오후 2시경 북한을 향해 이륙했다.      

    후쿠오카를 이륙한 비행기는 납치범들의 요구대로 북한으로 가기 위해 한반도의 동쪽 상공을 따라 북상했다. 기장은 후쿠오카에서 비행에 쓸 허술한 지도를 하나 받았다. 당시 북한과 국교도 없는 일본이었고 상호 항공 왕래가 없었기에 북한 공항에 대한 정보도 없이 무작정 이륙한 것이다. 북한 상공에 다다르면 북한 공항의 관제를 받아 착륙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비행기는 강릉을 지나 곧 북위 38도선을 넘었다. 목적지인 평양으로 가기 위해 기수를 서쪽으로 돌리자 갑자기 국적 표시가 없는 전투기 하나가 나타나 여객기에 따라붙었다. 전투기 조종사는 요도호의 기장에게 ‘하강하라’는 수신호를 보냈고, 기장은 전투기의 지시에 따라 고도를 낮추었다. 곧이어 '여기는 평양, 진입 관제를 실시한다'는 관제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관제탑의 유도를 받은 요도호는 활주로에 북쪽으로 접근하여 착륙한 다음, 남쪽 끝까지 가서 정지했다. 후쿠오카를 출발한 지 1시간을 넘긴 오후 3시 30분경이었다.

    납치범들이 창문을 통해 공항 청사를 바라보니 '열렬히 환영한다'는 현수막이 보였다. 인민군들이 오가는 것도 보였고,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성들도 보였다. 드디어 평양에 왔구나. 납치범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 기내 방송으로 평양 도착 소식을 승객들에게 알렸다. 승객들도 조종사도 심지어는 납치범들도 처음 와보는 평양 공항이었다.

    하지만 납치범들 중 한 명은 공항 풍경에서 아주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노스웨스트항공(NW) 소속 여객기의 꼬리 부분을 본 것이다. 가만있자, 노스웨스트항공은 미국 항공사인데 왜 평양에 있는 걸까?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저쪽으로 흑인 병사까지 보였다. 그렇다면 이곳은 평양이 아니다!

    문은 열지 않았다. 대신 납치범 중 하나가 조종석 창문을 열어 공항 직원에게 이곳이 평양이 맞느냐 물었다. 직원은 일본어로 그렇다고 답했다. 그러자 납치범은 '천리마 운동'에 대해서 물었다. 하지만 직원은 답하지 못했다.  그제야 자신들이 속았고 이곳은  평양이 아닌 서울 김포 국제공항이란 사실을 알았다.

    납치범들이 우리나라 역사, 지리 공부를 조금만 했어도 625 전쟁 후 38선이 아닌 휴전선 이남 북 분단선이란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동쪽으로는 38선 이북이 대한민국의 수복 영토란 것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비행기가 38선을 넘어가자 북한 땅으로 들어선 것으로 착각했다.  

    아울러 관제사의 말씨를 들어보면 평양 말씨가 아닌 서울 말씨였는데, 이것을 구분하지 못했다. 하나 더 추가한다면, 그들이 항공에 대한 조금의 열정만 있었다면 요도호에 근접 비행한 국적불명의 전투기의 기종으로 국적을 짐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저런 부대 지식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여간 그들이 납치한 여객기가 서울에 내려앉자, 이제부터 우리나라가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국내 언론에도 연일 대서특필이 되고, 공항 주변에는 구경꾼들이 모여들었다.  

    김포에서의 첫날밤이 지나고, 다음날인 4월 1일에 일본 정부의 협상단이 서울로 왔다. 납치범과 일본 정부의 협상이 진행되는 도중에 요도호의 부기장은 납치범들의 인원과 무장 상태를 무전으로 알렸다. 우리 정부는 지난해(1969년)에북한 공작원들이 51명이 탑승한 대한항공 소속의 NAMC YS-11 기를 공중 납치당해 12명과 기체를 북한에 억류당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납치법의 요구를 들어주지 말 것을 제안했다. 대신 특수부대원들을 투입해 무력 진압하자는 계획을 일본 정부 대표단에 내놓았다. 하지만 민간인들의 피해를 우려한 일본 정부의 만류로 강경진압 계획은 무산되었다.  


1969년에  공중 납치된 대한항공 NAMC YS-11기. 정성항공관. 박지욱 사진.


    협상은 잘 마무리되어 인질들을 다 풀어주기로 했고, 약속 이행의 보증을 위해 승객들과 일본 운수정무차관이 맞교환되었다. 승객 99명과 객실 승무원 4명도 모두 풀려났지만, 조종을 담당할 조종 승무원 3명은 비행에 필요한 이유로 비행기에 남았다. 요도호는 승무원 3명, 차관 1명, 그리고 납치범 9명을 태우고,  4월 3일 오후 6시경에 김포 국제공항을 이륙했다. 서울에서는 71시간 체류했다.  

    요도호는 이번에는 진짜로(!) 휴전선을 넘어갔다. 하지만 북한 공군기는 발진하지 않았다. 계속 북행하여 평양 상공까지 날아갔지만 ‘여기는 평양’이라는 무선 관제도 없었다. 날은 점점 어두워져 갔고, 착륙할 자리도 못 찾은  요도호는 하늘에서 길 잃은 미아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기장이 빈 활주로 하나를 발견했다. 태평양전쟁 중 전투기 조종사였던 기장은 조종 솜씨를 발휘해 무사히 착륙했다. 오후 7시 20분이었다. 그곳은 625 전쟁 중에 사용했던 미림비행장으로 평양 동쪽에 있다.

    납치범들은 무기를 버리고 북한에 투항했다. 하지만 무기라 할 것도 없었다. 모두 모조품과 장난감이었으니까. 인질범들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고, 이제 이 무대에서 내려갔다. 남은 기체와 승무원, 그리고 차관의 송환을 두고 일본 정부와 북한 정부 사이에 밀고 당기는 협상이 벌어졌다. 4월 4일에 합의가 이루어졌고, 다음날인 4월 5일에 인질범을 제외한 5명이 요도호를 타고 일본에 무사 귀환했다.


    9명의 납치범들 중 2명은 몇 년 후 일본과 태국에서 체포되었다. 3명은 세상을 떠났고, 지금은 4명이 북한에 살고 있다. 당시에는 10~20대였던 그들은 이제 70대 고령이 되었다. 그들은 처벌을 받더라도 일본으로 송환되길 원하는데, 아직은 북한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일본 정부도 납치범과 그 배우자 6명을 일본으로 송환해달라고 요구했지만 아직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서로 가고 싶은 곳으로 갔고, 다행히 인명 피해도 없었고, 납치 122시간 만에 해결이 다 되어 해프닝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몇 가지 미심쩍은 내용이 있다.

    왜 일본 테러집단의 자국 민항기 공중 납치를 우리나라가 개입했을까? 왜 북한으로 넘어가는 비행기를 김포로 불러들였으며, 왜 북한인 것처럼 위장했을까? 우리 정부는 무엇을 얻으려 한 것일까?    

    국적불명의 전투기는 무엇이었을까? 혹시 북한 공군기였을까? 그리고 김포공항에 동원된 가짜 인민군들과 북한 주민 행세를 했던 사람들,... 하지만 이왕 할 것 같으면 왜 그렇게 어설프게 일을 벌여 들통이 나고 말았을까? 정말 납치범들을 감쪽같이 속이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은 걸까? 그리고 이런 아이디어를 내고 실행하도록 명령을 내린 주체는 누구일까? 정말 궁금하다. 누가 한번 깔끔하게 정리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참, ‘요도’는일본 오사카 근처에 있는 강 이름이다. 당시 일본항공은 보잉 727 기종에 애칭을 붙였다. 요도, 히다, 타마, 후지, … 하지만 이 사건 이후로 애칭을 붙이는 관습을 버렸다. 요도호를 계속 요도호라고 부르기도 가슴 아파서엿을까/ 괜한 불안감을 승객에게 안겨주기 싫었을까? 하여간, 지금도 요도호 사건은 북-일간의 외교 현안으로 여전히 유효하다.   


l 관련 자료 볼 수 있는 사이트

1.    https://www.youtube.com/watch?v=RsB90xXdlOU

2.    https://www.youtube.com/watch?v=yv8Fbru8cbw

3.    http://www.gettyimages.com/license/91961097

4.    http://www.gettyimages.com/photos/japanese-red-army?excludenudity=true&sort=mostpopular&mediatype=photography&phrase=japanese%20red%20army&family=editor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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