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하루가 넉넉했던 날
처음 가는 모텔이었다. 방값이 5만원이나 한다는 것에 놀랐다. 데스크 직원에게 키를 받고 엘리베이터에 탔을 때 묘하게 긴장됐다. 두 사람이면 꽉 찰 정도로 엘리베이터는 좁았다. 복도 불빛은 은근했고 바닥엔 짙은 카펫이 깔려 있었다. 방문을 열었을 때 침대와 컴퓨터, TV가 보였다. 낯선 사람들 속에서 아는 사람을 만났을 때처럼 마음이 놓였다.
짐을 푼 후 침대에 철퍼덕 누워 가장 먼저 한 건 피자를 주문하는 일이었다.
그때 나는 혼자였다. 3m×5m의 공간은 온전히 내 것이었다. 근 3달 만에 맛보는 자유였다. 드디어 빠져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시도 혼자 있을 수 없던 그곳에서 말이다. 카랑카랑한 기상나팔 소리도, 꽉 짜인 일과도, 주변 사람의 시선이나 압박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외박 나온 이틀간 나는 군인이 아니라 자유인이었다.
기다리던 피자가 왔다. 세팅은 모두 마친 상태였다. <응답하라 1997>를 다운받고 컴퓨터와 TV를 연결시켰다. 피자상자를 열고서, 익숙하고 다정한 그 냄새가 짙게 올라올 때 나는 재생 버튼을 눌렀다. 침대 위에 아빠다리를 하고 앉아 <응칠>을 보며 허겁지겁 피자를 먹었다. 선임이 들어와서 채널을 바꿀 일도 없었고, 저녁 청소시간이 돼 중간에 TV를 꺼야 하는 일도 없었다. 피자를 해치우자 포만감과 함께 나른한 행복감이 쏟아졌다.
그제야 중대장에게 도착 문자를 보냈다. 엄마와 함께 숙소에 도착했다고. 무탈하게 쉬다가 잘 들어가겠다고. 엄마와도 말을 맞췄다. 혹시 중대장이 전화해 나를 찾으면 화장실에 있어서 못 받는다 말하라고. 일병이었던 난 아무렇지 않게 불법을 자행하고 있었다. 혼자 외박을 나가선 안 된다는 규정 따위가 뭔 대수인가. 지금 이렇게 행복하고 편안한데. 걸리면 걸리라지, 하는 심정이었다. <응칠>을 몇 시간째 정주행한 뒤에야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도 기분은 여전히 좋았다. 모텔 앞 편의점에서 초코우유를 사먹는 것조차 행복했다. 단맛이 혀 돌기돌기마다 스며들 때의 황홀감은 아직도 기억난다. 고소한 무언가가 텅 빈 뱃속을 채울 때의 쾌감도 기억난다. 날씨는 더없이 맑았고 거리는 한적했다. 잠도 푹 자 발걸음이 가벼웠다.
실로 이런 아침을 바랐다. 외박 나가기 몇 주 전엔 꿈까지 꿨을 정도다. 꿈에서 나는 집에서 일어나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후, 빵과 주스를 꺼내먹었다. 아무런 감흥도 없이 먹을 걸 입에 쑤셔 넣으며 컴퓨터를 하고 있었다. 일말의 드라마도 없는 그 평범한 꿈에서 깨었을 때 왠지 아련했다. 불침번을 서면서 방금 꾼 그 꿈을 잊지 않으려 기록까지 했다. 그렇다. 내겐 그 어떤 것보다 일상이 그리웠다.
외박 두 번째 날도 그 전날처럼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분대원과 보조를 맞출 필요도 없었기에 흐느적흐느적 되는 대로 걸었다. 인적 드문 해변에서 동해바다를 한참이나 보다가 친구에게 편지를 썼고, 던킨 도너츠에서 조각케이크를 먹었다. 그렇게 시내를 한참이나 빙빙 돌아다니다, 복귀하기 전 마지막으로 롯데리아에서 햄버거 세트를 먹었다.
돌아갈 시간이 다가왔지만 그 순간마저 기분이 좋았다. 지금의 이 만족감을 자양분으로 몇 달은 버틸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생겼다. 던킨도너츠에 다시 들러 분대원에게 줄 도넛을 샀다. 잘못을 저질렀다는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다. 선임에게 이쁨을 받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잠시나마 맛보게 해주고 싶어서였다. 내가 느꼈던,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