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도착하다

나 홀로 걷기는 처음이라서

by 정안

제주 올레길 27코스 437km를 완주하는 것이 꿈이었다.

다행히 다리가 튼튼할 때 퇴직을 했다. 짝꿍과 같이 가려고 했으나 시간을 낼 수 없다고 했다. 그럼 혼자라도 가고 싶었다. 일단 비행기표를 예약했다.


동행이 있었다면 별 고민 없이 출발했을 것이다. 나 홀로 걷는 올레길이다 보니 외진 곳이나 숲 속은 좀 걱정스러웠다. 그렇다고 짝꿍이 아닌 누군가와 한 달 동안 같이 있을 자신은 없었다. 차라리 혼자가 나았다. 올레패스앱을 설치하고 이런저런 궁리를 해봤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나.


서귀포에 있는 올레여행자센터에서 운영하는 숙소인 '올레스테이'에서 아침에 6개 코스(4,5,6,8,9,10) 시작점에 데려다주는 샌딩서비스가 있었다. 숙박객에게만 제공되는 서비스이다. 나는 숙소를 6박 예약하고 샌딩서비스를 신청했다. 함께 출발할 동행이 최소 1명 이상은 있는 것이니 괜찮을 것 같았다.


틈틈이 올레패스앱을 보다 보니 '올레에서 일주일 살기' 참가자를 모집하고 있었다. 제주 지역주민과 하루에 하나씩 올레길을 걷고 대화모임도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게다가 내가 머무는 숙소인 올레스테이에서 진행해서 고민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내가 숙박을 마치는 다음날부터 시작했다. 나는 올레 일주일살기 프로그램 담당자에게 메일을 보내 혹시 포기자가 있으면 참여하고 싶다고 했다.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담당자에게 연락이 왔다. 그래서 올레스테이 숙박을 하루 연장해서 바로 프로그램 참가와 연결되게 했다.


올레패스앱에서 보면 '아카자봉 함께 걷기'라는 것이 있었다. 제주올레 아카데미를 수료한 사람들이 자원봉사자로 올레길을 함께 걸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매월 15일부터 앱에서 신청할 수 있다. 날짜별로 검색해서 내가 걷는 코스와 맞으면 신청했다. 이렇게 했더니 내가 걷는 28일 중에 14일 정도는 누군가와 함께 걸을 수 있었다. 이 정도하고 나니 안심도 되고 혼자 가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았다.


숙소는 14박만 예약하고 나머지는 매번 코스의 끝에 있는 숙소를 제주에서 예약할 계획이다. 그래서 짐도 배낭 하나만 메고 왔다. 올레길을 걸을 때 가장 불편했던 것이 차를 렌트하면 차를 코스 종점에 가져다 두고 다시 시작점에 와서 걸어야 하는 거였다. 아니면 짐을 숙소에 두고 걷고 나서 다시 숙소로 와서 짐을 가지고 가야 했다. 이런 번거로움은 피하고 싶었다.


배낭하나에 짐을 챙기다 보니 최소한으로만 챙겨야 했다. 세탁을 할 생각으로 짐을 챙겼고, 화장을 할 일도 멋을 낼 일도 없으니 짐 챙기기가 수월했다. 마지막으로 노트북을 넣었더니 메고 걷기에는 무거웠다. 하지만 노트북이 꼭 필요했다. 가지고 왔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다.


새벽에 일어나 집을 나섰다. 제주 공항에 도착해서 '제주여행 지킴이'(스마트워치)라는 것이 있어서 신청하려고 제주 올레 여행자센터에 갔더니 없어졌다고 했다. 아쉬웠다. 서귀포에 있는 숙소에 가려면 600번을 타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181번 버스가 가격도 싸고 성판악을 지나가서 풍경도 좋고 빨리 간다고 알려주었다. 181번을 타고 1시간 20분 걸려서 숙소에 도착했다.


제주올레여행자센터에서는 차와 식사가 가능했다. 어멍밥상으로 점심을 먹었다. 새로 한 밥과 정갈한 반찬, 김치찌개가 너무 맛있어서 고봉밥을 한 그릇 깨끗이 비웠다.


체크인이 4시라서 근처를 둘러볼 시간이 충분했다. 안내하시는 분이 하영올레를 추천해 줘서 지도를 보다가 '변시지 그림정원'이라는 곳이 눈에 들어왔다. 걸어서 5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걸어가다 지도앱을 켜보니 한참 걸었는데도 이상하게 시간이 늘어나고 있었다. 내가 도보가 아닌 자전거로 선택을 해서 지도앱이 큰길 위주로 알려줬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그래서 직선이면 갈 거리를 2시간 걸려서 돌아 돌아갔다. 하지만 급할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갔다.


도착해서 보니 웃음이 났다. 조그만 마을 공원에 동 주민센터에서 설치한 LED 화면과 변시지 화백의 모습을 조각한 작품 몇 점이 있는 게 전부였다. 실내 전시장이 있다고 해서 찾아보니 어디에도 없었다. 전화를 해보니 기당미술관에서 전시를 하고 있다고 했다. 얼마나 걸리냐고 했더니 5분이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앱을 켰더니 40분이 넘게 걸렸다. 차로 5분이라는 얘기였다.


2시간 걸어서 온 게 아까워서 LED 화면을 보고 있는데 그림이 너무 좋았다. "폭풍의 화가" 변시지 화백이라는 말이 그림으로 이해가 되었다. 오로지 제주의 풍광만을 그린 그림 속에는 바닷가 옆 집과 아이 같은 사람과 말이 등장했다. 거센 폭풍우가 치는 모습이 제주인의 삶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실물 그림을 보고 싶어 기당미술관으로 향했다. 하지만 가지 못했다. 핸드폰 배터리가 바닥을 보였기 때문이다.


포기하고 숙소를 향해서 가고 있는데 '변시지 예술공간"이라는 건물이 보였다. 문이 모두 잠겨 있어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제주에서의 첫날은 변시지 화백의 그림을 찾기 위한 분투였다. 제주를 떠나기 전 가서 보리라!


여행자센터에 혼자 앉아 어둑해지는 거리를 보며 샌드위치를 안주삼아 무알콜 맥주를 마셨다. 이게 뭐라고 나를 묶었던 어떤 것들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워진 느낌이 들었다. 몸이 가벼워져서 떠오르기라도 할 기세였다.


거기다가 '제주 누보'라는 무알콜 맥주가 너무 맛있었다. 앞으로 하루 한 캔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제주에서의 첫날은 이렇게 지나갔다. 내일은 올레 4코스를 걸을 예정이다.



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