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당길이 이어지는 올레 4코스

당케포구에서 남원포구까지

by 정안

4코스를 걷는 날이다. 숙소에 신청한 제철죽을 아침으로 든든히 먹었다.

걸으면서 먹을 간식을 사러 편의점에 가는데 숙소 앞에서 할머니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라봉을 팔고 있었다. 3월이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초겨울처럼 추운 날씨였다.


날 낮에 할아버지가 똑같이 앉아 장사를 하셨고 저녁에는 할머니로 교대를 했는데 나는 할머니에게 천혜양을 샀었다. 양이 많아서 숙소 식당 직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머지는 걸을 때 먹으려고 공용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근데 할머니가 그곳에서 밤을 새운 듯 이른 아침부터 앉아 계셔서 좀 놀랐다. 그러면서 참 열심히 사시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부지런함으로 자식들을 키우고 공부시키고 일가를 이루셨을 거라 생각하니 그분들이 존경스러웠다. 지금이 제철이라는 할머니의 말대로 천혜양은 아주 맛있었다.


4코스는 다른 올레길에 비해 길었다. 19킬로미터를 걷는 바닷길이다. 숙소에서 제공하는 샌딩서비스를 이용했다. 봉고차에 탄 사람들 중 절반이상이 6코스에서 내리고 나와 두 명의 여성분이 4코스를 걷기 위해 내렸다. 아무도 없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을 했는데 동행이 2명이나 생겨서 좋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했다.


같이 내린 여성분 중 한 명이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타입이어서 조용히 걷고 싶은 나의 첫 올레길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4코스 시작점에 내리니 함께 걸어주는 '아카자봉' 신청자들이 열명 넘게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도 얼떨결에 그 팀에 합류했다. 올레길이 좋아 걷다가 아예 제주로 내려와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는 봉사자분의 길안내와 함께 걷는 사람들이 있어 걷는 것이 즐거웠다.


참가자는 반이상이 혼자 온 사람들이었다. 혼자 온 사람들은 말없이 걸었고 간간이 보폭이 맞는 사람과 간단한 대화를 했다. 동행이 있는 사람들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뒤에서 걸어왔다.


바람이 불고 햇살은 환하게 퍼지는 제주 바닷길을 말없이 걸었다. 말없음의 자유는 내게 더없는 편안함을 주었다. 하지만 올레길 걸었던 경험을 서로 간단하게 나누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4코스는 평지인 바닷길이라 오래 걸어도 크게 힘들지 않았다.


점심은 봉사자분이 미리 예약을 해둔 식당에서 다 함께 먹고 각자 계산했다. 점심 정식이었는데 가성비가 너무 좋았다. 게다가 어제 먹은 무알콜 맥주 "제주누보"의 신묘한 작용으로 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아침에 배출하고 온 나는 너무 배가 고파 밥 한 그릇을 정신없이 다 먹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밥은 배고플 때 먹는 밥이다. 그다음이 격하게 걷고 나서 먹는 밥이다.


4코스를 걷다가 들어간 해양수산연구원의 배려는 감동이었다. 올레꾼을 위한 깨끗한 화장실과 쾌적한 휴게실이 외부에 마련되어 있었다. 4코스는 앞쪽에서 비스듬하게 햇살이 비쳐오는 길이다. 선글라스와 모자가 꼭 필요했다. 그리고 오후가 되면 빛이 얼굴 정면을 비춰서 얼굴 전체를 가릴 만한 무언가가 있으면 도움이 됐다.


걷다가 올레길 자원봉사자분들을 만났다. 걷는데 방해가 되는 나무나 풀들을 치우고 있었는데 우리가 인사를 하자 반갑게 맞아 주셨다. 해안길을 걸어가다가 돌이 양쪽으로 담처럼 쌓여있는 걷기 좋은 길을 만났다. 봉사자분이 설명해 주기를 제주에 폭풍이 오면 이런 돌이 다 쓰러져 길이 없어지는 일이 일 년에 4~5번 있다고 했다. 그때마다 자원봉사자분들이 달려와 걷기 좋게 돌을 치운다고 했다. 그분들이 있어 우리가 편하게 올레길을 걸을 수 있는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 아무 대가 없이 이런 일을 하는 바보 같은 사람들이라고 봉사자분은 농담을 했지만 나는 문득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주인공 소년 홀든의 말이 생각났다.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바보 같은 얘기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정말 내가 되고 싶은 건 그거야. 바보 같겠지만 말이야."


나도 이제는 소년 홀든처럼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어졌다. 바보 같을지라도 그런 바보가 되고 싶었다.


6시간 동안 함께 걷고 남원포구에서 다 같이 사진 한 장을 찍고 헤어졌다. 서로의 건투를 빌며 쿨하게.


숙소가 같은 사람들끼리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해가 지니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다. 숙소 앞에 오니 한라봉 할머니가 아침과 같은 자세로 앉아 계셨다. 나는 같이 오던 사람에게 저 할머니 천혜양 정말 맛있다고 했다. 할머니는 천혜양 한 봉지를 팔았다. 천혜양을 봉지에 담는 할머니의 볼이 빨갰다. 할아버지는 왜 교대를 안해주시나 하고 혼자 생각했다. 나도 잠깐 할머니의 파수꾼이 된 건가.


내일은 8코스를 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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