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와 와인에 취하는 삶, 그 이중성에 대해 이야기하다.
카페 '이노스' 타샤에게 듣는 커피 이야기가 비알레띠 모카포트 익스프레스 커피 메이커까지 흘렀다. 그녀는 원두를 넣고 물을 넣고 불에 가열하면 포트 위에서 보글거리며 커피가 추출되는 원리를 가진, 작은 커피포트를 꺼내왔다. 은색의 작은 포트에 남아있는 커피 잔해에서 엄마의 기억이 피어났다. 커피를 만드는 사람은 테이스팅 단계를 관능이라고 표현한다. 관능 평가 단계를 후각(Olfaction), 미각(Gustation), 촉각(Mouthfeel)이라고 했다. 그녀가 타주는 커피의 향을 맡고 입으로 들어가는 진한 액체를 혀로 느꼈다. 몸의 감각이 열리자 카페로 들어오는 긴 햇살의 꼬리 따라 커피를 사랑하는 나의 노모가 눈 자락에 밟혔다.
미군부대 웨이트리스였던 엄마는 겨드랑이가 아파서 목발을 쓰지 않고 네발로 기어 다니겠다는 철부지 딸을 위해 웨이트리스 일을 접었다. 여덟 살, 학교를 들어가야 할 나이. 매일 10m, 20m 그리고 100m씩 목발을 겨드랑이에 끼고 더 넓은 세상으로 걸어갈 수 있도록 용기를 주고, 넘어지면 "다시!"소리를 지르는 교관처럼 반복적으로 목발 훈련을 시켰다. 땀범벅 눈물 범벅이 되어 집에 들어오면 엄마는 습관처럼 커피를 마셨다. 미군부대에서 가져온 큰 비닐봉지에서 커피 알갱이를 주전자에 잔뜩 집어넣고 그 불앞에서 엄마의 한숨이 보태지면 커피 향이 온 집안에 퍼졌다.
'나는 크면 커피를 마시지 않을 거야...'
마치 커피를 마시면 엄마의 한숨을 마시는 것 같아, 마치 어른이 되면 처음 목발을 사용했을 때의 그 쓰라린 경험이 되살아날까 봐 나는 커피를 거부했다.
처음 자판기가 등장한 그 시절, 자판기 커피를 사랑한 남자를 사랑했던 나는 엄마의 한숨이 기억나지 않고 엄마의 커피가 기억나지 않는 '해리'성 장애인처럼 엄마의 기억을 사랑 앞에 굴복시켰다. 뜨겁게 사랑하고 습관처럼 눈을 뜨면 커피를 마셨다. 사랑에 목숨 걸었던 그때 그 시절, 내가 마시는 커피에는 한숨은 없었다. 그 남자와 함께 했던 이십 년 나는 '커피 중독자'가 되었다. 아침이면 엄마가 물려준 노란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가루 커피를 탔고, 그 남자와 헤어진 이후 나는 굳이 예쁜 카페만을 찾았다. 웃음이 머무는 공간을 찾아다녔다. 그렇게 한숨이 사라진 커피를 찾아 방황했다.
분쇄 입자가 너무 크면, 커피 투입량이 너무 적으면, 물의 온도가 너무 낮으면, 추출 시간이 너무 짧으면, 바스켓 필터 구멍이 너무 크면 과소 추출이라고 했다. 감정을 누르고 억지로 웃었다. 잘 살고 있는 척 웃고 있는 나의 얼굴이 혼자 있는 나의 시간에 떫은맛으로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때 찾은 것이 와인이었다. 붉은 핏빛 와인이 투명한 글라스 위에 넘실대기 시작했다. 나의 밤은 적게 추출해서 답답했던 한숨을 뽑아내고 참았던 눈물을 터지도록 유도하는 핏빛 와인의 향연이었다. 한 모금씩 빨아들이는 피를 닮은 물이 혈관을 타고 들어가면 딱 그만큼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하루에 한 모금의 기억이 눈 자락에 밟힌 나의 10대와 20대 그리고 전투적으로 살았던 나의 중년을 떠오르게 했다. 맥박이 빨라지면 어김없이 끄억 끄억 울어버리고 호흡이 가팔라지면 노트북을 펼치고 한 맺히듯 글을 썼다.
얼마나 울었는지, 얼마나 헤맸는지, 얼마나 괴로웠는지... 강박처럼 정리하고 결벽처럼 닦았던 단정한 공간이 아침이면 흥건했다. 책이, 그릇이, 옷이 각각의 위치를 벗어나 있었다. 아침까지도 한숨의 공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다행인 것은 눈을 뜨면 마주하는 메시지에는 이미 위로와 감사와 사랑이 있고, 마음을 잡고 의식처럼 트는 멜로디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었다. 기도가 필요한 공간에 묵은지처럼 오래된 성경의 표지를 열면 묵은지처럼 깊은 맛이 있는 성경의 활자가 핏빛 와인의 여인을 혼내고 있었다.
'무엇이 부족하냐.'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이 부족하더냐...'
책이, 그릇이, 옷이 단정하게 각자의 위치를 찾아가고 다이어리에 빼곡하게 들어있는 스케줄의 사람들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 나의 공간에 빛이 났다. 영락없이 그들도 나도 이렇게 말했으니.
"보고 싶었어요..."
사랑하는 대상과 사랑을 주고받는 대상이 다시 커피를 마주하고 앉으면 관능의 단계를 넘어 저 밑 무의식에 감추어두었던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 소아과 의사들은 폐가 팽창하고 창자가 꼬이는 것을 더블 버블이라고 했다. 일명 'double bubble sign' '더블 버블 징후'라고 한다.
와인을 마셔야 억압했던 나의 이야기를 꺼내는 나는 제대로 소통하지 않으면 가슴이 답답했다. 페가 아프다고 신호를 보냈다.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는 내담자는 창자가 꼬이는 것처럼 배가 아프다고 했다. 가면을 쓰고 제대로 소통하지 않으면 이렇게 몸에서 신호가 온다. 이렇게 우리는 [이중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담자에게 자주 권하는 말씀이 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을 앎이라 (롬 5:3-4)" 결국 소망을 이뤄내는 순간을 알고 있고, 그 경험치가 쌓여 상담사로 살아가는 나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을 내담자에게 전달하면 어느새 그들은 '연단이 정금이 되는' 그 기적의 순간을 간증했다. 감사와 기쁨이 내 온몸의 감각을 열었다. 내가 상담을 해야 하는 이유다.
'무엇이 부족하더냐...'
고로 나의 [이중생활]이 끝나야 한다. 모순이 사라지고 위로자의 말씀에 온전히 집중해야 할 시간이다. 커피와 와인으로 정리하는 나의 이중생활에 사람이 들어가고 그들의 이야기가 넘쳐나고 있다. 사람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머리 정수리 끝부터 저 발 밑바닥까지 나의 온 감각이 열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의 '더블 버블'이 가라앉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