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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종현 Sep 12. 2024

FEZH, 컨셉이 형태와 행위를 구상

행위가 일어나는 공간 Affordance in SPACE 9

대부분의 건축물은 건축주의 생각과 의도를 반영하면서 시작된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기대대로 이루어질 것 같지만, 건축 설계 회사를 선택하고 건축가와의 미팅을 거치면서 처음의 생각은 점차 수정되고, 타협을 찾아가게 된다. 주로 건축주의 이상적인 생각은 건축법의 현실적 제한과 예산 문제에 부딪혀 다듬고 다듬어져, 결국 초기에 가졌던 생각과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쉽다. 그 결과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디자인의 실용적인 건물이 될 가능성이 크다.


FEZH도 처음에는 이런 시행착오를 겪으며 형태를 확정하는 마지막 단계에서 멈추었다. FEZH는 일반적인 컨셉이 아니었기에, 건축 설계는 우선 컨셉을 충분히 반영한 후 나머지를 해결해야 한다는 점을 절실히 깨달았다. 이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이 컨셉을 충실히 이해하고 반영할 수 있는 건축가를 찾기로 했다. 여러 건축 포트폴리오를 검토한 끝에 ITM의 유이화 건축가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건축가와는 2008년도 월간<디자인> 주관으로 도쿄 건축여행을 함께 간 인연이 있다.


유이화 건축가에게 설계를 맡긴 결정적 이유는 다큐멘터리 영화 '이타미 준의 바다'를 본 후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타미 준(유동룡) 건축가가 설계한 제주도의 수풍석 미술관, 포도호텔, 방주교회 등의 건축물을 좋아했던 것도 있었지만, 그런 작품들이 나오기까지의 과정과 구상, 재료 자체의 물성에 대한 시각, 건축주와의 관계 등이 인상 깊었다. 특히 그의 딸인 유이화 건축가가 부친의 제주도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배워가는 모습이 감동적이었고, FEZH의 컨셉을 가장 잘 구현해줄 수 있는 건축가라는 확신이 들었다. FEZH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동안에 유이화 건축가는 그의 부친을 기리는 유동룡미술관을 제주도에 만들고 개관을 하였다.


유이화 건축가와의 첫 미팅에서도 FEZH의 컨셉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으며, 벤치마킹한 제주도, 방콕, 도쿄, 발리, 마라케시, 페즈를 이미 모두 다녀온 상태라 공감대를 쉽게 형성할 수 있었다. 참고로 건축과 인테리어 시안은 모두 첫 번째 시안에서 결정되었다.


FEZH의 건축적 컨셉은 세 가지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첫째. 한남동 커뮤니티 몰  


한남동, 작게는 대사관로 주변을 중심으로, 이곳의 커뮤니티를 위해 동네 이웃들이 반려견과 함께 길을 가다가 편하게 들를 수 있고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이 공간은 한남동 특유의 지역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지역 주민들과 함께 지속 가능한 공간으로 자리 잡는 것이 중요했다. 물론 한남동과 이태원의 특성상 해외 관광객이나 다른 지역에서 방문하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지속 가능성을 위해서는 지역 주민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확신에서 출발했다.


이 부분을 공간으로 구현하는 것이 건축 설계의 핵심이었기에, 건축 설계팀과 함께 방콕으로 답사를 다녀와 컨센서스를 맞추는 과정이 필요했다. 중요한 것은 지나가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공간에 초대되고, 그 안에서 머무르며 자연스럽게 행위를 유도할 수 있는 형태로 설계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이 공간은 동네의 공원이나 광장처럼 주말에는 마켓이 열리고 다양한 행사가 가능하도록 설계되었다. 물론 이웃 간의 소음 문제를 최소화 할 수 있는 요소들도 반영되었다. 이런 공간은 주차장에 대한 건축주의 욕심을 온전히 버리고 서야 컨셉에 충실하게 나올 수 있었다.  

FEZH 전면부의 첫 건축 설계 시안을 보았을 때,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가 떠올랐다. 육면체 매스(mass)에 비스듬히 라운드로 도려낸 듯한 디자인은 마치 거대한 파도가 포인트 브레이크에서 깨지기 직전의 모습과 같았고, 삐죽 나온 유리창은 서핑보드 위에서 막 파도를 타는 노즐 라이딩 모습을 연상시켰다. 이런 디자인은 건축 설계에 직접 요구한 것은 아니었지만, 개인적으로 항상 염두에 두고 있던 힐링의 이미지와 충분히 연결되었다. 이 파도가 만들어낸 공간의 이름은 D Square이다. 이는 디지털다임 회사의 약어인 D2 광장(square)을 의미하는 동시에, 제곱근 함수의 그래프 형상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 광장에서 열리는 마켓의 이름은 배럴(Barrel) 마켓으로, 배럴은 서핑 용어로 서퍼의 머리를 덮는 동굴형태의 파도 부분을 말한다. 광장 아래에는 작은 카페가 있는데, 이름은 Mina & Paul이다. 이는 철거된 디투인터랙티브 사옥에서 키우던 진돗개와 골든 리트리버의 이름을 따고 그들과의 추억을 기린 이름이다. 이 카페는 반려견을 산책시키는 주민들이 잠시 쉴 수 있는 공간으로, 그들을 위한 쉼터와 산책 공간의 의미도 담고 있다.


둘째. 건축물에 채울 컨텐츠의 중심 키워드는 힐링 


이 공간은 오롯이 나만을 위한 공간이 될 수 있지만, 동시에 'Alone, Together'의 개념을 실현하여 혼자 또는 함께 와도 좋은 공간이 되고자 한다. 광장의 계단에 앉아 있으면 시냇물 소리와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공원 같은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이를 위해 건축가 출신의 한원석 작가에게 'Sound Forest' 작품을 의뢰했으며, 작품명은 'Norwegian Wood (This Bird Has Flown)'이다. 각 장소의 이름과 브랜딩에 대한 이야기는 추후에 더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건물 입구를 지나면 블루 체셔 고양이(Cheshire Cat)가 기다리고 있는 뮤직바 BlueCat이 등장한다. BlueCat의 컨셉은 'Harukist Muzic Library'로, 무라카미 하루키가 운영했던 재즈킷사 'Peter Cat'에서 영감을 얻었다. 재즈와 블루스에서 자주 사용되는 블루 노트(Blue Note) 코드와 재즈에 자주 쓰이는 블루색에서 착안하여 'BlueCat'이라 이름 붙였다. 이곳의 인테리어는 하루키와 깊은 연관이 있다. 소설 책장을 넘기는 듯한 바 수납장, 전 세계에서 수집한 하루키의 소설과 에세이, JBL 스피커, 위스키와 칵테일, 특히 그가 좋아했던 올드팝과 재즈 명반들이 그 분위기를 더한다.  

하루키가 주변에 산다면 가끔 들려서 재즈를 들으며 소설을 쓸법한 공간, 누구나 나이와 취향에 관계없이 음악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혼자 와도 편안하게 즐길 수 있도록 바 테이블 좌석을 최대한 확보했다. 스피커와 바 테이블의 간격, 동선 등을 섬세하게 조율해 대화를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도쿄의 뮤직바와 재즈킷사를 벤치마킹하였고, 특히 스피커와 앰프는 50~60년대의 전설적인 명기인 JBL Hartsfield, Marantz Model7, McIntosh MC275 조합으로 음향 엔지니어와 함께 그 시대의 사운드를 낼 수 있도록 섬세하게 조율 중이다.  


반려견과 함께 좁은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면, 작은 하늘을 마주할 수 있는 포켓 가든 Heaven이 나타난다. 이곳에서는 하늘을 보며 잠시 여유를 찾을 수 있고, 티하우스와 다목적 사용 공간이 위치해 있다. 광장, 포켓 가든, 수공간 등 전체 조경은 생태주의 정원의 대가인 김봉찬 대표의 '더 가든'에서 맡았다. 김봉찬 대표와 함께 한 이유는 한정된 도심 공간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생태 공원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서귀포의 '베케 정원' 역시 그의 작품이며, 그는 핀크스 비오토피아 생태 공원에서도 이타미 준과 인연을 맺은 바 있다. 사계절 자연을 느낄 수 있는 정원을 기대하고 있다.

가장 위층으로 올라가면 리트릿 스페이스 Casa del Agua(물의 집)이 나온다. 이곳은 명상이나 요가, 힐링 프로그램을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설계되었다. 도심 속에서도 제주도나 발리 우붓 같은 자연 속에서의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많은 고민이 담겼다. 수초가 있는 작은 호수 위에 떠 있는 듯한 이 공간은 내부에서 앉으면 물 수면으로 시선이 향하고, 일어서면 내부로 집중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중앙에는 몽골 텐트의 지붕을 연상시키는 원형의 높은 층고가 있고, 주변에는 타원형의 낮은 층고가 대비를 이룬다. 입구에 있는 벽천에서 물소리가 들리고, 내부에는 최대 시야각 160도의 영상과 Dolby ATMOS 입체 음향, 그리고 100년 이상 된 편백나무(히노키)로 이루어진 천장에서 숲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이 공간은 건축법상 일조권 사선 제한을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아래의 육면체 매스와는 구분되는 동시에 건물 전체와 예술적으로 어우러져, 힐링 목적에 맞게 독특하게 설계되었다.


셋째. 페즈를 닮은 최소 단위의 도시  


FEZH의 건축적 모티브와 스토리라인은 모로코의 페즈 올드시티(Fes El Bali)에서 영감을 받았다. 페즈는 "열 채의 집이 하나의 단위로 묶여 공동의 빵집과 우물을 공유하는 최소 단위의 도시로, 이는 다원적 민주주의의 표본으로 해석"되기도 한다(승효상 건축가). FEZH도 코로나 팬데믹 이후 커뮤니티의 필수 요소들을 한 곳에 모은 '최소 단위의 도시'가 되고자 했다. 커뮤니티 광장, 리트릿 공간, 갤러리형 매장, 음악과 도서 라이브러리, 카페, 주말 시장 등 다양한 공동시설을 통해 작은 도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모로코 페즈는 12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미로 도시로, 성곽으로 둘러싸인 메디나는 블루 게이트를 통해 들어가면 작은 시장과 9000여 개의 이어진 골목이 펼쳐진다. 겉으로는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에 나오는 집들과 같이 모두 비슷해 보이지만, 내부는 리야드 양식으로 설계된 이 집들은 거주인의 재력에 따라 화려함이 다르다. 이는 외부 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이기도 했다. 리야드 양식의 집들은 높고 긴 직사각형 구조를 띠며, 1층에는 로비와 정원이 있고 천장까지 뻥 뚫린 구조로 되어 있다. 방들은 통로를 둘러싸고 있으며, 꼭대기에는 미로골목 위의 스카이라인을 볼 수 있는 테라스가 있다.

FEZH 건축물에서 가장 많이 노출되는 재료는 흙을 이용해 맞춤 제작한 벽돌이다. 이 벽돌은 외부에서 성을 연상시키는 웅장한 벽을 만들고, 광장 바닥에서부터 가장 높은 층까지 연결된다. 게이트를 통과하면 미로처럼 이어진 골목이 나타나는데, 수직으로 이어지는 이 골목을 따라가다 보면 외부와 내부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벽의 작은 구멍을 통해 햇볕이 조명처럼 비추고, 바람이 옷깃을 스치며, 때로는 비와 눈을 맞으며 지하에서 옥상까지 어느 순간 이동하게 된다. 특히 Vortex Gallery 내부는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구조로, 전체 공간은 소용돌이 동선을 따라 마치 퍼즐 조각처럼 맞춰가야 한다.   


컨셉이 형태와 행위를 구상하다.  


FEZH의 공간은 광장, 시장, 카페, 소음, 음악, 갤러리, 하늘, 가든, 수공간, 리트릿으로 이어지는 동선을 통해 세상의 즐거움에서 정신적 고요함으로 나아가도록 설계되었다. 호기심에 이끌려 광장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마음의 안정을 찾고, 오롯이 자신만의 마음챙김(mindfulness)을 찾아가는 여정이 되고자 했다.

FEZH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Be Gentle with the Earth"이다. 이 건축공간은 지구(Earth)를 '形而上覺(형이상각)' 해석으로 담겨있다. '모양(形)을 이어(而) 올라가(上) 자신(지구)을 깨닫다(覺)'

이 공간을 경험하는 여러분 중에 누구 하나라도 온전히 FEZH에 담긴 뜻을 깨달았다면 건축주로서 더 이상의 기쁨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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