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장 따뜻한 계절에 대하여
누군가 내게 어느 계절을 가장 좋아하냐고 물으면 나는 망설임 없이 겨울이라 답한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여러 계절 중에도 유난히 겨울을 편애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 그동안 곰곰이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근 서른 해를 살아오다 보니 내가 대체 겨울의 '무엇'을 사랑하는 건지 조금 깨닫게 되었다.
나는 겨울에 태어났다. 아마도 모두가 일년 중 가장 특별한 마음을 먹고, 특별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게 되는 하루, 한해의 마지막날에 태어났다. 내가 태어났던 그 해 그 날에는 유난히 산부인과가 붐비었다고 한다. 하루만 늦게 태어나면 백말띠로 태어나 팔자가 드센 아이가 되었을 거라나. 다행히(?) 나는 억울하게도 태어나자마자 바로 다음 날 나이를 한 살 더 먹고, 80년대생 대열에 가까스로 합류할 수 있었다. 그렇게 80년대의 마지막 날, 난생 처음 세상과 마주했다. 찬 겨울이 내가 태어나 가장 처음으로 만난 계절이었다.
생애 처음으로 코끝에 닿은 찬 공기를 기억해서일까. 나는 겨울 특유의 청량한 찬 공기를 좋아한다. 막혔던 것들이 뻥 뚫리고 내 안의 더러운 것들을 모두 닦아내고 투명해지는 기분이 든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그 아스라한 온도의 차이를 알아차릴 때면 다가올 추위에 대한 걱정과 동시에 묘한 반가움을 몰래 느낀다. 콧속으로 파고드는 겨울의 찬공기를 마시면 더욱 따뜻해질 준비를 하며 마음을 서서히 데운다.
사실 난 겨울에 태어났다고 해서 추위에 유난히 강한 사람도 아니다. 게다가 집순이보다는 하루라도 바깥을 싸돌아다니지 않으면 몸이 근질거리는 떠돌이에 가까운데, 바깥을 쏘다니기 불편한 겨울은 사실 내게 썩 완벽한 계절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겨울이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따뜻함을 찾는 풍경 때문에 겨울이 참 좋다. 따뜻한 방바닥에 앉아 귤을 까먹거나 거리에서 풍기는 따뜻한 군고구마나 붕어빵 냄새에 발길을 멈추는 풍경, 목도리에 얼굴을 푹 파묻고 꽁꽁 언 손을 꼭 잡고 함께 걷는 풍경, 마음을 들뜨게 하는 캐롤송과 함께 구세군의 종소리가 울려퍼지는 풍경, 노랗게 물든 난로불 앞에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며 책장을 넘기는 풍경-
푸른 잎들이 말라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는 겨울이지만 그 쓸쓸한 풍경을 하얀 눈이 내려 덮을 때면 또 얼마나 마음이 포근해지는지 모른다. 세상의 모든 외로움을 다 토닥이는 듯 깊게 쌓인 눈이 한아름 세상을 끌어안은 풍경을 보면 차가운 눈의 온도는 새하얗게 잊는다. 동네 어귀에 묵묵히 서 있는 눈사람이라도 발견하면 마음은 어느 새 저 멀리 잊고 지낸 과거에 닿아있다.
또한 겨울은 저만의 색을 유난히 뽐내지 않아서, 어떤 색을 데려다 놓아도 모두 수용한다. 채도가 높은 크리스마스의 빨강, 초록부터 깊고 깊은 고목의 색과 빛바랜 느낌의 색도 모두 겨울과 잘 어울린다. 어느 누구와도 깊은 대화를 풀어낼 수 있는 사람처럼 겨울은 그 어떤 계절보다도 드넓다. 겨울 하면 눈 덮인 세상처럼 하얀 도화지가 떠오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내가 겨울을 닮고싶은 이유 또한 이 때문이고.
정신없이 삶을 내달리다 12월이 되고 겨울로 접어들면 잊고 지냈던 이들의 안부도 문득 궁금해진다. 내일로, 다음으로 미루기만 하다가 결국 한 해의 마지막 달만 남겨두었는데 여전히 얼굴 한 번 마주하지 못했을 때 느끼는 죄책감도 겨울의 몫이다. 하지만 다시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하며 또 한번 지키지 못할 반가운 약속을 쌓아두는 계절 역시 겨울이다. 모든 걸 용서하고 받아들일 것처럼 따뜻한 인사를 서로에게 건네며 우리는 저마다 가장 따뜻한 모양이 된다.
끝과 처음이 만나는 계절, 가장 따뜻한 것들로 채워지는 계절, 봄을 기다리는 설렘이 있는 계절- 이토록 따뜻한 겨울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