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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다니 Jan 31. 2019

겨울이 좋은 이유

나의 가장 따뜻한 계절에 대하여



누군가 내게 어느 계절을 가장 좋아하냐고 물으면 나는 망설임 없이 겨울이라 답한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여러 계절 중에도 유난히 겨울을 편애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 그동안 곰곰이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근 서른 해를 살아오다 보니 내가 대체 겨울의 '무엇'을 사랑하는 건지 조금 깨닫게 되었다.



나는 겨울에 태어났다. 아마도 모두가 일년 중 가장 특별한 마음을 먹고, 특별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게 되는 하루, 한해의 마지막날에 태어났다. 내가 태어났던 그 해 그 날에는 유난히 산부인과가 붐비었다고 한다. 하루만 늦게 태어나면 백말띠로 태어나 팔자가 드센 아이가 되었을 거라나. 다행히(?) 나는 억울하게도 태어나자마자 바로 다음 날 나이를 한 살 더 먹고, 80년대생 대열에 가까스로 합류할 수 있었다. 그렇게 80년대의 마지막 날, 난생 처음 세상과 마주했다. 찬 겨울이 내가 태어나 가장 처음으로 만난 계절이었다.


생애 처음으로 코끝에 닿은 찬 공기를 기억해서일까. 나는 겨울 특유의 청량한 찬 공기를 좋아한다. 막혔던 것들이 뻥 뚫리고 내 안의 더러운 것들을 모두 닦아내고 투명해지는 기분이 든다. 가을에 겨울로 넘어가는 그 아스라한 온도의 차이를 알아차릴 때면 다가올 추위에 대한 걱정과 동시에 묘한 반가움을 몰래 느낀다. 콧속으로 파고드는 겨울의 찬공기를 마시면 더욱 따뜻해질 준비를 하며 마음을 서서히 데운다.


사실 난 겨울에 태어났다고 해서 추위에 유난히 강한 사람도 아니다. 게다가 집순이보다는 하루라도 바깥을 싸돌아다니지 않으면 몸이 근질거리는 떠돌이에 가까운데, 바깥을 쏘다니기 불편한 겨울은 사실 내게 썩 완벽한 계절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겨울이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따뜻함을 찾는 풍경 때문에 겨울이 참 좋다. 따뜻한 방바닥에 앉아 귤을 까먹거나 거리에서 풍기는 따뜻한 군고구마나 붕어빵 냄새에 발길을 멈추는 풍경, 목도리에 얼굴을 푹 파묻고 꽁꽁 언 손을 꼭 잡고 함께 걷는 풍경, 마음을 들뜨게 하는 캐롤송과 함께 구세군의 종소리가 울려퍼지는 풍경, 노랗게 물든 난로불 앞에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며 책장을 넘기는 풍경-



푸른 잎들이 말라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는 겨울이지만 그 쓸쓸한 풍경을 하얀 눈이 내려 덮을 때면 또 얼마나 마음이 포근해지는지 모른다. 세상의 모든 외로움을 다 토닥이는 듯 깊게 쌓인 눈이 한아름 세상을 끌어안은 풍경을 보면 차가운 눈의 온도는 새하얗게 잊는다. 동네 어귀에 묵묵히 서 있는 눈사람이라도 발견하면 마음은 어느 새 저 멀리 잊고 지낸 과거에 닿아있다.


또한 겨울은 저만의 색을 유난히 뽐내지 않아서, 어떤 색을 데려다 놓아도 모두 수용한다. 채도가 높은 크리스마스의 빨강, 초록부터 깊고 깊은 고목의 색과 빛바랜 느낌의 색도 모두 겨울과 잘 어울린다. 어느 누구와도 깊은 대화를 풀어낼 수 있는 사람처럼 겨울은 그 어떤 계절보다도 드넓다. 겨울 하면 눈 덮인 세상처럼 하얀 도화지가 떠오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내가 겨울을 닮고싶은 이유 또한 이 때문이고.


정신없이 삶을 내달리다 12월이 되고 겨울로 접어들면 잊고 지냈던 이들의 안부도 문득 궁금해진다. 내일로, 다음으로 미루기만 하다가 결국 한 해의 마지막 달만 남겨두었는데 여전히 얼굴 한 번 마주하지 못했을 때 느끼는 죄책감도 겨울의 몫이다. 하지만 다시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하며 또 한번 지키지 못할 반가운 약속을 쌓아두는 계절 역시 겨울이다. 모든 걸 용서하고 받아들일 것처럼 따뜻한 인사를 서로에게 건네며 우리는 저마다 가장 따뜻한 모양이 된다.



끝과 처음이 만나는 계절, 가장 따뜻한 것들로 채워지는 계절, 봄을 기다리는 설렘이 있는 계절- 이토록 따뜻한 겨울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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