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가치는 결코 지금은 알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을 살자", "Seize the day" 이런 말들은 꽤 오랜 시간 동안 내 인생의 좌우명 같은 것이었다. 오늘은 내 인생 남은 날들 중 첫 번째 날이자 다시 오지 않을 소중한 시간이기에 오늘, 바로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는 말은 복잡한 세상을 단순하게 살아가기 위한 명쾌한 진리처럼 다가왔다. 그런데 그 오랜 시간 동안 난 늘, '대체 어떻게 하면 지금을 살 수 있는 것일까?'라는 물음표에 시원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오늘의 행복을 내일로 미루지 않고, 한 번 사는 인생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걸 즐기며 살자는 ‘YOLO’는 내가 찾는 답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실 YOLO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YOLO를 팔아 현재의 쾌락만을 유행처럼 좇는 허세와 아무 데나 YOLO의 이름을 그럴듯하게 갖다 붙이는 남용이 내게 알러지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현재를 산다는 것,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오롯이 산다는 건 대체 무엇인가. 지금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아차리는 것, 내가 하는 고민을 지긋이 바라보는 것, 밥 먹을 때 입 안에 무엇이 들어가 엉기며 맛을 내는지 음미하는 것, 아름다운 풍경을 볼 때 눈앞에 펼쳐진 나무와 꽃과 바람을 지켜보는 것, 음악을 들을 때 멜로디와 가사가 만들어내는 조화에 귀 기울이는 것. 이렇게 나의 모든 감각으로 세상과 접촉하는 그 순간에 다른 잡념이나 고민 없이 정성을 다해 집중하는 것이 순간을 충실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지 않을까 하는 어렴풋한 이해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아직 수양이 부족해서인지 이 또한 내게는 시원한 해답이자 접근법은 아니었다. 생각을 거듭한 끝에 얻은 나만의 결론이자 해답은 허무하게도 이것이었다.
“우리는 결코 진정으로 현재를 살 수 없다.”
기억이 내 삶을 채우고 지배한다.
현재 나의 상황 속에서 내가 느끼는 감각과 감정, 생각과 느낌은 물론 뚜렷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그 순간의 감정과 느낌들이 이후에도 똑같은 정도나 생각으로 유지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현재의 경험은 그 느낌 그대로 냉동실에 넣어 얼려놓고 언제든 똑같은 맛으로 꺼내 맛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현재'는 언제나 그렇듯 '과거'가 되고 그 과거는 나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한다.
인간이 살아가며 하는 모든 경험은 시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재편집되고 정리되어 머릿속에 기억으로 저장된다. 내 삶의 모든 순간들은 그것을 겪으며 받았던 인상, 당시 느꼈던 감정, 그에 대한 나의 태도 등에 의해 크고 작음, 강함과 약함, 긍정과 부정 등의 기억으로 분류되어 내 두뇌의 변연계에 자리 잡는다. 기억은 내 머릿속에 편집되고 각색되어 각인된 과거의 경험이다. 따라서 어쩌면 어떤 순간에 대한 가치를 평가하는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잣대이자 수단은 바로 '기억'이다.
이 때문에 아무리 “현재를 살자” 외쳐도 우리는 그 순간이 지나 봐야 그 순간을 비로소 제대로 느끼고 마주할 수 있다. 정말 행복한 순간도, 죽을 것만 같은 고통의 순간도, 그 순간들을 겪으며 경험하는 감정들의 실체는 지난 후에야 제대로 알 수 있다. 우리 모두 이를 경험으로 안다. 기쁨의 순간을 맘껏 즐기자 아무리 작정해도 결국은 이 순간이 나의 기억이 되어 내 마음속 어딘가에 확실한 모양을 잡고 나서야 '그때'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진정으로 알 수 있다. 여행은 늘 다녀온 뒤 추억을 곱씹으며 비로소 내 안 어딘가 자리를 잡게 되고, 어려운 시험을 잘 치르고 좋은 결과를 확인한 순간은 시간이 지난 후 다른 행복한 기억들과의 경쟁을 거쳐 ‘나의 가장 행복한 순간 TOP 3’ 안에 위치하게 된다. 반대로 고통의 순간은 지나고 나서야 그렇게 고통스럽지만은 않았다 위로할 수 있다. 그 순간은 죽을 것 같아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불변의 진리를 삼켜가며 견디고 난 후에야 그 고통의 크기는 비로소 정의될 수 있다. 고통의 측면에서 지금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건 좀 억울한 일이기도 하다.
우리가 삶의 순간순간에 대해 진정으로 알게 되고 그 의미와 가치를 평가하게 되는 때는 결국 지금 이 순간이 아니라 그 순간이 나의 기억으로 자리 잡았을 때이다. 이렇듯 어떤 사건이나 사물, 사람이 먼저 있어야만 후행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기억의 메커니즘이 우리가 결코 현재를 제대로 살 수 없는 이유이자, 과거의 언젠가를 늘 애틋하게 그리워하는 이유는 아닐까?
현재를 살 수 없는 인간의 필연적 정서, 그리움
최근 ‘뉴트로’가 열풍이었다. ‘new’와 ‘retro’의 합성어인 ‘newtro’는 직역하자면 ‘새로운 복고’이다. 기술은 나날이 발전하고 세상도 빠르게 변하고 있지만, 사실 복고풍의 유행은 매번 주기적으로 반복된다. 말만 조금씩 달리 불릴 뿐 이런 유행의 본질은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과거’를 자신의 삶 어딘가에 소환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이 유행에는 복합적인 요인이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은 늘 과거에 대한 향수, 즉 그리움을 안고 살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보고 싶어 애타는 마음’을 의미하는 그리움은 비단 사랑했던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감정에만 해당하진 않는다. 지나고 보니 정말 행복했거나 소중했다고 여겨지는 순간들 모두가 그리움의 대상이다. 그리고 이 중 상당수는 그때는 좋은 줄 몰랐었거나 더 크게 감사와 행복을 누리지 못했던 것들이다.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강도로 느끼지 못했던 감정, 그래서 다시 회귀하고픈 욕구, 그러나 시간을 돌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그때의 나’로서는 결코 느끼지 못할 감정들이 바로 그리움의 실체는 아닐까. 어쩌면 그리움의 대상은 그 누군가나 어떤 순간 자체가 아니라, 그때의 내가 충만하게 느꼈어야 할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옛날 감성을 처음 경험하는 세대에게는 뉴트로가 새롭고 재밌는 콘텐츠이지만, 기억을 통해 그때를 소환하게 된 세대에게는 그때의 나와 우리,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 그 자체가 된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순간의 가치를 깨닫게 되는 우리는 그래서 늘 그리움을 안고 살 수밖에 없다.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과 생각들은 분명 있지만, 그것들이 내게 어떤 의미와 가치로 각인될지 그 순간에는 잘 알 수 없다. 그저 과거의 누적된 경험들을 토대로, 철저히 귀납적인 방법으로 지금 이 순간이 나중에 어떻게 기억되리라 예측할 수 있을 뿐이다. 하루 종일 스트레스 받으며 일한 후 어깨에 곰 두 마리를 얹은 채 침대에 쓰러져 누워도, 훗날 이 날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라는 꽤 가능성 높은 예측으로 위안 삼는 날들이 있는 것처럼.
그렇다고 순간의 감정과 생각들을 무시하자는 말이 아니다. 현재의 가치를 제대로 알 수 없다고 대충 살자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현재의 가치가 기억을 통해 제대로 정의된다는 말은, 오히려 수많은 기억들 간 더 엄정하고 치열한 심사를 통해 현재가 재평가받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내 삶의 모든 순간순간들이 어떤 기억으로 내 안에 저장되느냐에 따라 어떤 순간이 내 삶의 best 또는 worst moment가 될지 결정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더 희망적인 것은, '기억'은 다분히 작위적일 수 있다는 점이다. 특정 순간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는 어느 정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노력을 통해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전환할 수 있듯이, 어떤 순간에 대한 생각이나 느낌, 판단은 나의 해석과 사진/글 등을 통한 기록, 주변 사람들과의 대화 등을 통해 원하는 방향으로 강화할 수 있다. 또 기억은 각자의 두뇌작용을 통해 편집과 각색을 거치기 마련이다. 기억의 퍼즐들이 더 예쁘고 좋은 그림들을 중심으로 조합될 수 있도록 하려면 기억의 조각들을 만드는 현재에 충실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
현재의 가치를 나중에 어떻게 기억하고 평가하게 될지는 전적으로 내가 얼마나 현재를 제대로 살고 있느냐에 달려있다. 그저 흘려보낸 시간들은 분명 내가 살았음에도 기억조차 못하는 시간으로 사라질 확률이 높다. 지금이 과연 ‘어떤’ 현재인지, 내 삶에 어떤 의미를 가져다주는 순간일지 지금은 제대로 모를지라도, 그 순간만큼은 최선을 다했노라는 나 자신의 긍정이 있어야만 추후 지금 이 순간이 참 괜찮았던 과거이자 그리운 추억으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오늘의 행복을 행복한 만큼 충만하게 느끼지 못할지라도 오늘의 행복에 최대한 감사하려 노력한다면, 훗날 내 기억에는 오늘이 더 큰 행복과 감사의 시간으로 기록될 것이고, 그만큼 오늘에 대한 그리움은 후회보다는 애틋한 감동으로 치환되리라 믿는다. 이것이 현재를 진정으로 살 수 없는 인간들이 현재를 가치 있게 살아내는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
그리움은 나이와 함께 자란다.
나이 들수록 기억은 점점 더 많이 쌓이고 추억할 거리도 많아진다. 살아온 시간보다 살아갈 시간이 많은 어린 나이에는 늘 미래를 생각하지만, 살아온 시간이 살아갈 날보다 많아진 나이에 이르면 미래를 꿈꾸기보다 과거를 회상하는 시간이 늘어난다. 돌아볼 과거가 많다는 건 기억이 많다는 것이고, 이는 곧 그리움이 많아진다는 말이다. 과거의 어떤 순간에 온전히 느끼지 못한 그때의 가치를 이제와 되새기고 곱씹어보는 시간이 늘어난다는 의미이다.
휴대폰 사진첩에 꽃 사진들이 많아지면 나이가 든 거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나이 들수록 세상 풍파에 닳고 닳아 어렸을 때처럼 일희일비하는 일은 적어져도, TV를 보다가 전혀 예상치 못한 장면에서 툭 하고 눈물 흘리는 알 수 없는 감정은 더 많이 느끼기도 한다. 어렸을 때는 눈길 한번 안 주고 지나쳤던 풍경이, 공감하기 어렵던 누군가의 인생이 나이와 비례해 내 삶에서 자주 포착된다는 건 어쩌면 우리가 경험적으로 ‘순간에 대한 그리움’을 체득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과거에 그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여 생긴 그리움은 지금 놓치면 안 되는 것들을 일깨워주기도 하니까.
그래서 내게 그리움은 가장 애틋하면서도,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도록 만드는 가장 본질적이면서 보편적인 감정이다. 과거를 반추하여 사소한 것들에는 감사를 느끼게 하고, 어렵고 힘든 일은 덜 고통스럽게 받아들이게 하며 내게 주어진 삶을 조금은 성숙하게, 하지만 맘 속 깊숙이 애잔하게 받아들이게 만드는 정서이다. 나이와 함께 농익어가는 내 삶에 대한 그리움이 아이러니하게도 결국 지금 내가 마주하는 현재의 삶을 더 충실히 살게 만드는 힘이 되어준다고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