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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요일 Feb 15. 2021

 『동명 검색』

   '나'를 주제로 한 '나'만의 짧은 소설

  남편은 알람 소리에 바로 눈을 뜨고, 화장실로 향한다. 나는 부엌으로 가서, 홍삼을 컵에 가득 담고, 4분의 1쪽 사과를 껍질째 잘라서 2쪽 그릇에 올린다. 회사로 매일 가져가는 약과 위 음료를 비닐주머니에 담아 남편 코트 안주머니에 잊지 않고 넣어둔다. 퇴사 후 약 3개월, 매일매일 시스템처럼 돌아가는 25분의 출근 준비 타이머가 모두 돌아가면, 언제나처럼 집에는 덩그러니 나만 남는다.  


  어제저녁부터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이 내리더니, 아침 겨울 햇살이 베란다 깊숙하게 파고든다. 출근 준비를 해주던 노곤한 몸을 소파 깊숙이 파묻고, 자동적으로 TV를 켠다.  어느 때 같으면, 두어 시간 아침잠을 더 자거나, 화분 갈이를 위한 일을 했을 텐데, 오늘은 소파에 붙어있는 몸을 꼼짝도 하지 않고, TV 속 과학수사 내용 미드(미국 드라마)를 본다. 드라마는 주인공이 본인과 동일한 이름을 검색하는 장면에서 끝이 난다. 


 문득 궁금해졌다.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나와 이름이 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노트북을 열고, 내 이름을 입력하고, 기사들의 카피를 본다.        


[첫 번째 기사 카피피아니스트 이해미 귀국피아노 독주회 ‘SkyBlue’ 개최  


 아주 어릴 적 학원 - 무엇을 가르치는 학원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 에서 한 장의 종이를 나누어주고 미래에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적어보라고 한다. 초2, 여자아이의 꿈은 피아니스트다. 나는 고민도 없이 <피아니스트>라고 적는다. 이유도 함께 적어보라고 한다. 여기서 잠시 머뭇거린다. 초등학교 2학년도 안다. 미래에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는 것은, 지금 피아노를 아주 열심히 치고 있으며, 적어도 같은 나이 때와 비교해볼 때 앞선 과정의 책을 치고 있어야 한다. 적어도 [바이엘]을 넘어서 [체르니 40] 정도는 치는 수준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유란에 그렇게 쓸 수가 없다. 이제야 [바이엘 하]를 치고 있고, 무엇보다도 피아노 학원 가기 전 피아노 연습하는 것을 무엇보다도 싫어하기 때문이다. 


  엄마가 연습하라고 하면, 바로 배가 아프다. 오른손으로 건반을 두들기면서 연습하는 척을 하고, 왼손은 피아노 옆 창문 밖으로 내놓는다. 차가워진 왼손을 엄마에게 바로 가져가서. 손이 얼어버려서 학원에 가지 못할 것 같다고 엄살을 부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은 이유는 따로 분명히 있었다. 이유란에 조심스럽게 적는다. <피아니스트>라는 단어 발음이 너무 멋있어서.   

 

  학원에서는 많은 학생들의 꿈과 이유를 하나하나 확인하지 않았다. 수업 시간이 끝날 즈음에 나누어주었던 장래 희망 꿈을 적어보라던 종이는 접어서 각자 잘 간직하라고 했던 기억으로 마무리된다. 그때 내가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은 이유가 달랐다면, 저 기사 속의 피아니스트 이해미가 내가 되지 말란 법은 없다. 동명이인 이해미 님의 독주회 ‘SkyBlue’ 제목, 너무 맘에 든다. 


  드보르작의 <유모레스크>를 시작으로,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를 친다. 그리고 이어서 계속 베토벤 <소나타 No.8 '비창' 2악>을 치고, 3악장의 웅장하고 경렬함으로 마무리를 한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들려온다. 현실에 눈을 뜨고, 거실 안 전자피아노 앞에 앉는다. 굳어버린 손가락으로 띄엄띄엄 <유모레스크>를 쳐본다. 오른손은 되는데 왼손이 안 움직인다. 


  그 옛날 왼손이 얼어서 학원에 가지 못하게 했던 추억이 떠오른다. 양쪽 귀로는 비창 2악장을 듣는다.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왼손이 비통하지만, 여전히 거실 안까지 비춰주는 겨울 햇살은 따뜻하다. 베토벤 소나타 No.8 '비창' 2악장 같다. 


[다음 기사 카피문학계 소식 이해미 작가소설 떠나는 사람떠나는 장소』 출간


   20년 삶의 전부였던 회사 생활을 그만두고, 시간 부자가 된 나는 자유로운 시간에 한이라도 풀 듯이 하루 종일 책을 읽는다. 직장생활 스트레스 풀이로 한 달에 한번 20~30권 이상 제목만 보고 구매한 책들이 집안 모든 방 4면의 책장에 뱅뱅 둘러 꽂혀 있다. 작가 시리즈, 커피 시리즈, 여행 시리즈, 심리학 시리즈, 추리소설 시리즈, 같은 단어 제목 시리즈 등 모두 이유가 있는 시리즈물로 구매한 책들. 표지 한 번 열어보지 않고 고이 모셔둔 이들을 하루에 한 권 씩 꺼내 읽는다.    

 

  같은 시간 적어도 한 번쯤은 나는 책을 읽고 있고, 같은 이름의 그녀는 글을 쓰고 있지 않았을까? 상상의 순간, 나는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는 그녀가 된다. 


  <떠나는 장소>로 <공항>을 떠올린다. 코로나 19로 지금은 너무나도 한적한 인천공항 - 지금 모습의 공항을 잠시 잊고 - 예전 수많은 사람들이 머물고 오가던 공항을 생각하며 나는 내 이름과 같은 작가님의 제목을 빌려 글을 써본다. 

 

[중간 생략] 출장의 마지막 일정을 마치고, 볼로냐 공항을 지나 경유지 파리 샤를 드골 국제공항에 잠시 머문다. 복잡한 머리와 천근 같은 몸을 공항 내 카페 구석자리에 박혀 넣는다. 껌뻑거리는 두 눈으로 공항 속, 오고 가는 수많은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쳐 지나간다.

 ‘ 출국을 하는 사람들은 이곳에 모든 미련을 두고 가겠지. 
  그리고 돌아올 때는 아무도 두고 갔던 미련을 찾아가지 않겠지. ’ 

나는 이곳에 무엇을 두고 갈까 고민해본다. 12시간 후면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또 직장생활의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현실을 두고 가고 싶다. 동시에 게이트 19번이 오픈되었다는 영어가 들린다. 체크인이 시작되었다는 소리에 맘이 급하다. 성격 급한 나에겐 작은 것 하나도 두고 갈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스스로의 현실 조급증에 실망하면서 게이트를 찾아 나선다. 

그때, 누군가가 내 등을 살짝 친다. “지금 한국으로 돌아가?” 한국말이다. 반말이다. 놀람과 동시에 머릿속 데이터를 총동원하여, 이 목소리가 누구인지 기억해본다. 결과는, 모르는 사람이다. 

낯선 땅에서는 같은 말 종족이 더 무섭다고 했다. 누구인지 질문을 하기 전에 먼저 못 들은 척하는 것이 상책이다. “ 정말 나 몰라? ” 다시, 뒤에서 그가 말을 던진다.

더 빨리 걸음을 옮긴다.  “ 서운하네. 떠나는 마당에. 이제 우리 평생 못 볼 텐데 ” 이 말에 멈추었다. 

‘ 다신 못 볼 사람이라고. 누굴까? 그래, 여긴 공항이야. 무서울 것 없어’ 몸을 돌려 나에게 말을 거는 그를 보았다. 역시 안면이 일도 없는 남자다.  순간,

 “ 앗! 이런! 죄송해요. 제가 사람을 잘못 봤어요. 마지막으로 한번 더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앗! 이런!”
나와 마주쳤던 그의 눈은 아래로 떨구어진다. 한번 더 죄송합니다를 허리 굽혀 인사하고 터벅거리며 그는 내 앞으로 먼저 지나갔다.

게이트 19에서 체크인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출국을 하는 사람들은 이곳에 모든 미련을 두고 간다. 다시 돌아올 때 아무도 미련을 찾아가지 않는다>처럼 나도 오늘 2-3분 마주친 어떤 남자와의 긴장감과 이별을 두고 가련다.
담에 다시 파리 공항에 왔을 때, 내가 그 남자를 기억이나 할까?...... [중간 생략] 

  

  책을 읽는 것과 글을 쓰는 건 정말 확연하게 다른 장르의 일임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그와 함께 나도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동명 이해미 작가님의 책, 떠나는 사람떠나는 장소를 구매해서 읽어 보고 싶다.  



[마지막 카피오늘의 부고 이해미(전 내일 일보 기자)씨 모친상  


   나와 같은 이름, 이해미 님의 모친상 부고가 기사에 있다. 무거운 망치로 머리와 심장을 크게 얻어맞은 듯하다. 천천히 마우스를 돌려서, 하단의 병원과 발인 날짜 정보를 살펴본다.


   이름만 같을 뿐인데, 머리가 멍하고, 마음이 먹먹하다 못해 숨쉬기가 가쁘다. 너무 아프다.


   4 가족 중 오빠, 아빠를 모두 하늘로 보내고 엄마만 남아 있다. 엄마도 언젠가는 오빠와 아빠의 곁으로 갈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안다. 더더욱 두 사람 모두 너무 갑작스럽게 가버린 죽음이었기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무서움이 나에겐 크지 않다고 줄곧 생각했다. 


   죽음이라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들에겐 언젠간 반드시 닥칠 일이다. 단 그 언젠가를 살아있는 인간들은 절대 알 수 없다는 것과 누군가 죽고 나면 내가 살아있는 동안 서로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라고 정의했다. 스스로 다시 이 죽음이 언제 어떻게 닥쳐온다 해도, 더 이상은 놀라지 말고, 떨지 말고 의연하게 대처하자고 매번 생각하며 살았다.


   고작 검색을 통해 동명이인의 모친상 부고를 보고, 마음이 아프고, 눈물은 갑자기 왜 흘러내린걸까? 놀라면서 기사 페이지 닫기를 클릭해버린다. 

 

  벨소리가 울린다. 오전 11시에 예약한 마트 배달이다. 

배달된 물건들을 현관 앞에 올려두고,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엄마, 아침 먹었어? 난 지금 마트 배달 와서 정리하려고. 어디 아픈데 없지? ” 안부전화를 끊고,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얼굴도 모르는 동명이인 모친의 명복을 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단순히 동명 검색만 했을 뿐인데 그 시간이 지나자, 왠지 모를 피곤함이 밀려온다. 배달 온 물건들을 그대로 식탁 위에 쌓아둔 채, 베란다 화분에 쏟아지는 겨울 햇살과 차가운 공기를 온몸으로 맞이 해본다. 

너무 평범하여 검색되지 않는 나, 이해미의 일상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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