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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성향 Oct 06. 2024

왜 사람은 ‘해야 하는 것’을 하지 않을까

고통과 창조에 대하여

작성일: 2023-07-08


<왜 사람은 ‘해야 하는 것’을 하지 않을까>




바로 어제(7/7 금) 있었던 일이다. 어제 오전 11시에는 내가 다니는 필라테스에서 진행하는 ‘금바타’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참고로 나는 지난 5월부터 화, 목요일 오전 10시, 주2회 필라테스를 다니고 있다. 여기에 원장님께서 선물 주신 금요일 금바타까지.  



이러한 나의 운동에 대한 의지는 둘째가 다니는 ‘공동육아 어린이집’의 내 별명이 ‘운동’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상상해보라. 어린이집 모든 아이들과 선생님들, 학부모들이 나를 보며 ‘운동’이라 부른다. (참고: 공동육아 어린이집에서는 서로 ‘별칭’을 부르는 문화가 있다.) 





오죽하면 운동을 개인 별명으로까지 지었을까. 별명을 지었어야 했던 연초에 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었다. ‘둘째가 이 어린이집 다니는 동안 내가 이거 하나는 꼭 해냈다 하는 것이 뭐면 좋을까?’ 답은 ‘운동’이었다. 그래, 적어도 3년 동안 다른 건 몰라도 운동 하나라도 하면 성공이다란 명확함이었다. 나에게 운동이란 ‘머리로만’ 해야지 해야지 하고, 잘 안 하게 되는 것이었어서, 별명으로라도 지어두면 운동할까 싶어서라는 절박함이었다. 이 정도면 내 스스로가 얼마나 명료하게 ‘나 자신에게 운동이 꼭 필요하고, 해야한다라고 잘 이해하고 있는지’ 설명되지 않는가. 





하지만 역시 인생은 반전의 연속. 두 달 가까이 시간만 되면 기꺼이 운동에 곧잘 나서던 나였다. 그런데 바로 어제 아침에는 거실 쇼파에 앉은 내 엉덩이가 안 떼지더라. 그러던 내 오른손이 타블렛에서 ‘댄스가수 유랑단’ 어제 걸 플레이 하고 있었다. 딱 5분만 봐야지 하던 시간은 조금씩 연장되어 한 30여분 즘 보고 있을 때였다. ‘잠시만 잘까, 너무 피곤한데?’, ‘어제 목요 코칭스터디도 밤 늦게까지 하고 늦게 퇴근했잖아.’ 등 달콤한 내면의 속삭임은 앉아 있던 나를 왼편으로 스르르 눕게 했다. 몸은 누웠으면서 속으론 외쳤다. ‘아, 누우면 안 되는데’, ‘지금 몇 시지?’ 시계를 보니 아직 10시였다. ‘그래 30분만 자자’, ‘자고 일어나면 다시 가고 싶어질거야.’ 스르르 감기는 눈꺼풀에 속절없이 당하고 있는 내 귀에는 ‘여름철 장마’답게 예고없는 폭우 소리가 창 밖으로 들리고 있었다. 




얼마나 잤을까, 한참 쇼파 베개에 누워 단잠을 자던 나는 벌떡 일어나서 시계를 보았다. 10시 30분. ‘지금 차 몰고 출발해야 11시 ‘금바타’ 수업에 들어갈 수 있다!’ 비몽사몽 졸던 나는 <습관처럼> 벌떡 일어나서 문고리에 걸려 있는 운동가방과 차키를 들고 집을 나섰다.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 시동을 걸고 광안리로 향했다. 다행히 늦지 않았다. 센터에 들어가 <아무 영혼 없이> 레깅스로 갈아입고, <아무 영혼 없이> 운동슈즈를 신고 매트에 앉아 수업 시작하길 기다렸다. 11시 땡 하자 원장님은 수업을 시작하셨고, <아무 영혼 없이> 오늘의 운동 설명을 들었다. 짧은 워밍업이 끝났고, 타이머 째깍대는 소리에 맞추어 20초 운동 10초 휴식 패턴으로 타바타가 시작됐다. 





내 영혼은 3번째 기구였던 ‘숄더프레스’에서 눈을 떴다. 와, 한번 도 써보지 않은 가슴근육에 고통이 어마무시했다. 10kg 무게는 도저히 칠 수 없어서 원장님이 뒤에서 심지어 들어 주셨었는데, 정말 곡소리가 절로 나왔다. 너무 힘들어서 웃음이 났다. 아니 나는 이 시간에 여기서 왜 이 힘든 걸 하고 있는가 그냥 웃음이 났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금바타는 멤버 순서별로 운동기구를 순환하며 도는 것이기에 한 번 시작하면 멈출 수 없다. 그렇게 나는 어이 없는 웃음을 계속 허허 대며 가슴, 엉덩이, 등, 허벅지 들에 고통을 당했다. 






언제나 그렇듯, 시작이 있으면 다행히 끝도 있다. 그 죽을 것 같던 금바타의 언덕도 마침내 막을 내렸다. 쿨링다운 타임, 차분하게 스트레칭 하면서 요가매트에 누워 있는 나에게 쎈 깨달음이 왔다. 




“아, 이 고통을 내가 아니까, 본능적으로 오기 싫었구나. 아니까. 이 고통을.” 




그렇다. 사람이 머리로 해야 한다, 알고 있는 것을 행동하지 않는 이유. 바로 그 행위를 할 때 동반되는 ‘고통’ 때문이다. 고통스러운 걸 아니까 거기에 손이 가지 않는 거다. 고통스럽지 않고 할 만한 것은 손쉽게 착수할 수 있지만, 본능적으로 ‘내가 이걸 하면 고통스럽겠구나.’란 걸 아는 것들은 미루고 또 미루고 미루려 한다. 그 중 가장 큰 ‘하면 좋은 걸 알지만 잘 하지 않는 행위’는 ‘창조(creativity)’에 관련된 것들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에는 엄청난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니.  






내게 최근 꼭 넘어야 하는 창조의 산이 있었다. 내가 하는 “코칭 비지니스들을 시스템으로 만드는 것”과 “홈페이지 기획하는 것(홈페이지 제작 업체에 넘겨서 바로 제작만 하면 될 정도로 구체적인 내용이 다 완성된 기획)”이었다. 여기에 현 비지니스 수입 관련 머니로드(money road) 만드는 것까지. 





말만 들어도 느낌 오지 않는가. 이 얼마나 나 같은 코치들, 개인사업자, 프리랜서들에게 너무나 해야 할 당위성이 충분한 일이란 말인가. 대다수의 코치들이 ‘그래, 그거 해야 하지.’ 알면서도 잘 안 되는 일들일 것이다. 나 포함 이 수많은 사람들이 왜 알면서도 하지 못하는 것이겠는가. 바로 동반될 고통이 너무나도 자명하게 예상되기 때문이다. 





비지니스를 시스템으로 만들려면 지금까지 한 모든 일을 꺼내서 살펴봐야 한다. 그 과정에는 숨겨둔 체 모른 척 했던 자신의 취약점들을 직면해야 한다. 그 뿐인가 여기에 비지니스 컨설팅까지 받는다 상상해보라. 대충 내 선에서 있어 보이게 어느 정도 해내왔던 나의 일들을, 그 분야 아주 전문가인 한 사람의 시선으로 다 꼬치꼬치 따져지고 분석을 당하고 조언을 듣는 일에 수반될 고통은 누구나 상상될 것이다. 그냥 이왕 모른 김에 덮어놓고 대충 잘 하던 것만 계속 잘 하며 살아간다면 얼마나 편할까. 게다가 난 전략적 사고에 있어서도 아주 취약한 직관형 사람이다. 그 말 뜻인즉 그 고통이 몇 배로 더 크다는 것이겠지. 





그래서 나는 지난 몇 년 간, 그 예상되는 고통을 가급적 최대한 미루고 싶어서 알면서도 모르는 체, 미루고 미뤄왔다. 그러나 최근 ‘직면하고 창작하는 고통’보다 ‘모르는 체 미루는 고통’이 더 커졌다. 그 말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만약 여기서 더 미루게 되면 알면서도 하지 않는 자기 자신을 미워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지금까지 얻었던 열매가 아닌 더 새로운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새로운 씨앗을 심어야 가능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씨앗도 심지 않은 체, ‘아, 나도 언젠가 더 새로운 열매를 얻고 싶어’라고 말한다. 나도 그랬다. 한 쪽 눈을 감고 아웅했다. 나도 그 새로운 열매(안정적인 일 시스템, 월 천 수익 등)을 얻고 싶어 했다. 그러나 어느 날 깨달았다. 실컷 그 새로운 열매 얻는 법을 유튜브 등 정보를 얻으면 뭐하는가, ‘씨앗’ 자체를 심지 않는 것을. 주변에 체중감량을 원하면서 식이조절, 운동을 하지 않고, 수익을 더 벌고 싶다 하면서 그 수익 시스템을 점검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바로 그 사람이 나였다. 씨앗도 심지 않고 새로운 열매를 원한 사람. 나는 그 말도 안 되는 논리 위에서 행위 없이 결과를 원하는 나를 만났다. 그리고 어느 날 밤, 섬뜩한 질문을 나에게 했다. ‘근데, 성향아. 만약에 너 그 A기업 인사팀에서 연락와서 그 교육기획안 내일 점심 때까지 정리해서 제출하면 1천만원을 비용처리 해 준다해. 그럼 너 안 해?’ 바로 내 안에서 말했다. ‘아니, 밤을 새서라도 바로 해야지.’ 바로 나온 답이 우스웠다. 그런 내게 말했다. ‘그럼 지금 너는, 니가 진짜 원하는 새로운 삶, 그 이상적인 삶을 미래로 가져오는 것이 1천만원보다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거니?’ 하아, 할 말이 없었다. 내가 던진 어처구니 없는 ‘만약 질문’에 나는 마음의 눈을 번쩍 떴다. ‘내 미래를 위한 씨앗을 심자’ 






결국 온 몸을 앓게 되면서 완성 해냈다. 그토록 몇 날 몇 일을 머리로만 해야지 하며 고통 받던 일들을, 각 잡고 몇 일 밤새서 하루종일 몰두해서 기록해냈다. 몇 십여개 포스트잇에 각기 적혀 있던 아이디어들, 휴대폰 메모장에 이곳 저 곳 적혀 있던 기록들을 다 확인하고 정리하고 찢어 버렸다. 





그런데 신기하지, 나는 이 행위를 하는 것이 줄 고통을 예상하고 하지 않으며 미리 그 예상되는 고통 에너지 자체에 압사되어 고통 받았었는데, 실제 행위하고 나서 겪은 느낌은 오히려 ‘자유함’이었다. 내가 제일 하기 싫어하고 미루고 싶은 것을 제일 먼저 그저 해내고 났을 땐, 하기 싫어서 미루며 더 커져만 갔던 부정적 에너지들보다 그저 해내버림으로서 느껴지는 ‘자유함’의 에너지가 가득 채워졌던 것이었다. 






“만약 매일 내가 그 날 가장 하기 싫은 것을 제일 먼저 해낸다면 어떨까?”





“가까운 미래에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지금 내가 (고통스러울지라도) 반드시 해야 하는 가장 핵심적인 실행은 무엇인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얻고 싶은 열매를 이미 키운 사람의 이야기(성공스토리), 혹은 열매를 잘 키우는 법에 대해 검색하고 정보를 탐색한다. 그 열매 씨앗 심는 것도 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런 이들에게 내가 이번에 온 몸을 앓아가면서 들었던 메시지를 끝으로 나누고 싶다. 


나는 몇 일 골골 대며 아파가며 결국은 해내어갈 때 나를 사랑하는 신의 속삭임을 들었다. ‘성향아, 네게 꼭 이 좋은 세상(삶)을 보여주고(선물해주고) 싶었는데, 딱 이 구간만 넘어오면 안 될까? 여기만 넘어오면 내가 너에게 주고 싶은 게 너무 많아.’  





지금 당신이 계속 유예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 곁에도 당신의 수호천사가 ‘딱 그것(유예하고 있는 것)만 해내기만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에게 보여주고, 주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아서.’ 






그러나 그 주고 싶은 것들은 바로 우리가 외면하고 싶었던 그 ‘고통’을 통해서만 키워질 근육들이 있어야 다룰 수 있는 것이라, 그들도 발 동동 거리며 그대가 그 ‘고통’ 구간만 지나서 건너만 와주길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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