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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신과 의사 나종호 Jan 25. 2022

<엔칸토>와 엄친아, 엄친딸들의 나라

디즈니 애니메이션 <엔칸토> 후기

작년 연말에 개봉한 디즈니 신작 애니메이션 <엔칸토(En Canto)>가 연일 화제다. 극장가에서는 팬데믹 여파로 예상보다 평범한 수익을 올렸지만, 틱톡을 중심으로 OST가 인기를 끌면서 현재 <겨울 왕국>의 'Let it go'가 세웠던 빌보드 순위 기록을 깼을 정도로 화제를 모으고 있다(실제로 필자도 '입에 담지마 브루노(We don't talk about Bruno)'라는 노래를 딸아이와 수백 번 들은 탓에, 귀에서 환청이 들릴 정도이다).


<엔칸토>는 기적의 재능들을 갖게 된 마드리갈(Madrigal)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다. 주인공인 미라벨의 어머니는 음식으로 어떤 상처도 치유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고, 이모는 자신의 기분에 따라 기후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 큰 언니 루이사는 당나귀 여러 마리를 어깨에 짊어질만한 괴력을 가지고 있고, 둘째 언니 이사벨라는 가는 곳마다 아름다운 꽃을 수놓는 환상적인 능력을 갖췄다.  


주인공인 미라벨은 남을 위할 줄 알고, 무엇보다, 스스로와 자신의 가족을 사랑할 줄 아는 소녀이다. 다만 여타 디즈니 만화 주인공들과 한 가지 큰 차이가 있다면, 미라벨에게는 가족 모두에게 있는 특별한 마법의 힘이 없다. 그녀는 기적의 마드리갈 가문에서 유일하게 마법의 재능이 없는 구성원이다.

주인공 미라벨만 빠진 가족사진. 모두들 기쁨에 도취된 나머지, 미라벨이 사진에 없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다. (출처: 디즈니 <엔칸토>)

영화를 관통하는 가장  주제는 세대를 잇는 트라우마(transgenerational trauma, 세대 전이 트라우마)이다. 세대 전이 트라우마란, 트라우마를 겪은 부모가  트라우마로 인한 내상을 자녀들에게 물려주는 것을 뜻한다. , 묻어둔 트라우마가 자녀와의 관계,  나아가 가족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의 이민자와 소수인종들은 본국의 험난한 상황을 피해서 오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에, 이와 같은 세대 전이 트라우마를 경험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런 면에서 <엔칸토> '이민자의 나라' 미국에서  반향을 일으키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다. 실제로, 영화의 배경이  남미계 이민자들은 물론이고, 이민사회 전반에서  영화에 대한 찬사가 이어지고 있다.  세대 전이 트라우마는 한국에도 무척이나 유효하다. 한국의 현재 노인 세대는 바로 일제강점기, 한국 전쟁과  전쟁의 잔해라는 트라우마를 온몸으로 경험한 세대이기 때문이다.  

미라벨 가문을 일으켜 세운 할머니는 가족의 '옥에 티'와 같은 미라벨에게 유독 매몰차다. 그녀에게 마법을 쓰지 못하는 미라벨은 '아픈 손가락'일까, 아니면 천덕꾸러기일까.

<엔칸토>의 할머니인 알마(Abuela Alma)는 세대 전이 트라우마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등장인물이다. 피난 과정에서 남편을 허망하게 잃은 그녀는 자신이 어렵게 일군 가족의 성과를 지키기 위해 자녀들에게 무척이나 엄격하다. 그녀의 불가능에 가까운 기대로 인해, 태산을 옮길만한 힘을 가진 루이사도, 완벽해 보이는 이사벨라도 내면이 곪아간다. 단지 겉으로 내색하지 못할 뿐.


이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의 중심에 미라벨이 있다. 미라벨이, 그리고 이 영화가 루이사와 이사벨라를 비롯한 가족 모두에게 전파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다. 영화 말미에 강해 보이기만 하는 루이사가 '나도 가끔 울어'라고 하자, 이사벨라와 미라벨이 '나도 그래’ 라고 화답하는 장면은 이 메시지의 백미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한국의 많은 아이들을 떠올렸다. '엄친아' 혹은 '엄친딸'라는(이제는 통용된  너무도 오래된) ()조어는 진공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언어는  사회를 반영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단어가 만들어지고, 계속 사용된다는 사실 자체가  단어가 사회 구성원들의  공감대를 불러일으킨다는 방증이다.


대학생일 당시, 원어민 영어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다. 토론 위주로 진행되는 수업이었는데, 도중에 한 학생이 '엄친아'라는 단어를 꺼냈다.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였던 강사는 처음 듣는 말이라며, 그 뜻에 대해 물었다. 학생들은 '엄친아'가 어떤 의미로 쓰이는지에 대해 설명하고자 부단히 애를 썼으나, 끝내 실패했다.

'엄친아'라는 신조어는 한국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출처: 한국 교육신문)

평면적인 단어를 우리가 평소에 경험하는 일상에 대입하면 조금 더 사회 현상이 명확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대화는 아마 이렇게 시작되지 않을까. 중학생 아이가 공부를 하지 않고 게임을 하고 있다. 엄마는 들어와서 말한다.


"옆집 철수는 밤 열두 시까지 공부 한다더라."


조금 상황을 뒤로 돌려보자. 그 중학생 아이가 엄마의 말에 충격을 받고 공부를 열심히 해서 반 1등을 한 성적표를 가져왔다.


"앞집 영수는 이번에 전교 1등을 했다던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은, 만인의 비교 대상인 '완벽녀' 이사벨라 조차 할머니의 기준으로 인해 힘들어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비교의 논리는 단순히 비교의 사슬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뿐 아니라, 비교의 상위 계층에도 큰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다. 왜냐면, 비교가 만연화된 사회에서 내가 그 사슬의 최고봉에 있기란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완벽해 보이는 엄친아, 엄친딸도, 다른 엄친아/딸을 보며 열폭하기 마련이다. 비교의 사회가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영화를 보며 미라벨이 마법의 재능이 없었음에도 그토록 구김살 없어 잘 자랄 수 있었던 것은 그녀에게 좋은 부모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미라벨의 엄마와 아빠는 틈만 나면 미라벨에게 이렇게 말한다.

미라벨이 마법의 재능이 없이도 잘 자랄 수 있었던 이유는 부모의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미라벨, 넌 우리에게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돼(Mirabel, you have nothing to prove).


자신들의 딸이 그 자체로 사랑받을 만한 존재임을 그녀에게 되새겨주는 것이다. 나는 한 번도 나를 누구와 비교하지 않고 그 자체로 사랑해주신 부모님께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의 자녀 교육 철학의 우선 순위 또한 딸아이를 누구와 비교하지 않고, 그 자체로 사랑하는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딸아이는 내년 할로윈에 미라벨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나도 모르게 '이사벨라는 어때?'라고 되물었다. 아마 자동적으로 사회에서 흔히 인정받을만한 이사벨라가 더 좋게 느껴졌던 것 같다. 딸아이는 약간은 의문스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여전히 미라벨이 되고 싶다고 했다. 나도 황급히 스스로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았다.


내년 할로윈까지 딸아이가 <엔칸토>를 좋아할 지는 미지수이다. 하지만 딸아이에게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라는 메시지를 준 것 만으로도 이 영화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아, 그리고 명곡으로 가득찬 OST를 준 것 또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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