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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른히 Jul 15. 2021

하루에 10장만 가능하다는 것

원고를 넉넉하게 살펴보겠다는 마음

편집자마다 원고에 온 힘을 쏟는 시기가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조판, 그러니까 책의 틀에 맞춰 원고를 끼워 넣은 후에 살피는 것을 선호한다. 그러나 대부분 초교에서 가장 정성을 들이지 않을까 싶다. 초교는 원고를 훑어보고 기획안을 쓰고 일정을 짠 다음, 그 기획안에 따라 본격적인 교정에 돌입하는 시기다. 교정지가 아닌 모니터를 통해 진행하는 교정이므로, ‘모니터교’나 ‘화면 교정’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기획안 작성을 위해 살피던 때와 다르게 초교에 들어서면 숨어 있던 것들이 원고에서 톡톡 튀어나온다. 그래서 간혹 기획안에 적힌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교정이 진행되기도 한다. 단순히 문장을 읽어 내려가면서 틀린 것만 잡아내면 되지 않느냐 싶지만, 원고에 따라 문제점을 잡아내는 데 쓰는 에너지가 천차만별이다.

맞춤법을 확인하는 것은 물론이고 원고에 나온 정보가 사실에 부합하는지 인터넷과 참고 도서를 통해 찾아낸다. 중복된 부분이 있다면, 독자의 입장에서 한 번 강조하고 넘어가는 게 좋은지 고민한다. 독자가 지겨울 만하다고 여겨지면 그 부분을 삭제한다. 분량을 채우려고 작가가 껴놓은 여담도 이것이 숨 고르기에 도움이 될지 세심하게 살핀다.


작가가 보내주는 초고, 즉 초벌로 쓴 원고에는 작가의 글쓰기 방식이 그대로 녹아 있다. 매일 꾸준히 원고를 채우는 사람의 원고는 차분한 편이지만, 막판에 몰아붙이는 사람의 원고에는 오탈자를 가리키는 빨간 줄이 그득하다. 일정을 맞추느라 원고를 훑어보지 못하고 보낸 사람들은 중복된 부분이 여럿 있는지를 편집자의 말을 통해 나중에 알게 된다. 갤럭시탭이나 아이패드 등 태블릿으로 글을 쓰는지, 자그마한 키보드로 타자를 치는지도 띄어쓰기나 오탈자를 통해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최대한 고쳐 써서 원고를 보내주는 사람도 있지만, 방향을 잡지 못한 채 고민하다 편집자에게 S.O.S를 치는 사람도 있다. 어떻게 마무리 지어야 할지 고민이라는 작가의 말을 들으면, 많은 편집자는 우선 원고를 다 쓰고 보내주면 검토하고 의견을 말하겠다고 답할 것이다. 이러한 편집자의 선의가 언제부터 곡해된 것인지, “편집자가 문장을 다시 써 준다고 하던데요?”라는 질문을 던지며 오탈자 하나 바로잡지 못한 원고를 툭 보내는 작가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작가들은 자신의 원고가 어떤 모양새인지 나중에 안다. 따라서 편집자로서 뒤늦게 변수가 생길 수 있음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일정만 맞추려고 했다가는 곤란해질 수 있다.


Photo by Emil Bruckner on Unsplash


예전에는 빠르게 교정을 마치면 편집자로서 할 일을 다 한 줄 알았다. 

빨리 마쳐야 하니 최대한 원고의 방향을 그대로 두면서 보완할 점을 아예 생각하지 않은 적도 있다. 출판사도 빠릿빠릿하게 교정을 끝내는 편집자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어쨌든 책이 빨리 나오니까. 그러나 원고를 깊이 파고드는 곳일수록 나의 장점은 곧 단점이 됐다. 

그걸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을 때는 빠르고 꼼꼼하게 일을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그렇게 잘난 사람이 아니었다. 빠르게 교정을 마쳤다가 나중에 문제점들이 튀어나와 작가와 얼굴을 붉혀야 했던 때도 많았다. 빨리 끝나는 줄 알았는데 수정이 끝없이 이어지면서, 몸이 축나 병원에 들락날락한 적도 있다.


한창 손이 빠를 때는 하루에 A4 기준으로 20장 정도 교정을 했다. 그러나 편집자로서 빠른 것보다 꼼꼼한 것이 낫다는 걸 알게 된 후로는 최대한 여유를 두려고 하는 편이다.  이것을 깨닫은 초반에는 대충 일정을 가늠한 다음에 평소 일정보다 하루 이틀 여유를 뒀다. 며칠 원고만 들여다보기도 힘들뿐더러 변수는 늘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월급을 주는 출판사 입장을 고려해서 무작정 기한을 늦추지는 않았다. 다른 편집자의 일정을 눈치껏 파악한 다음, 출판사에서 용인할 만한 일정을 제시했다. 그보다 더 늘어질 것 같으면 원고를 여러 번 들여다보면서 사유를 만들어냈다. 이러저러해서 늦을 수밖에 없지만, 최선을 다해서 책을 만들겠다 말하면 대부분 넘어갔다.


지금은 꼼꼼히 살펴볼 게 많은 분야인 경우, 초교는 하루에 10장 정도로 계산하고 있다. 나름 체계적으로 일정을 정하는 셈이다. 원고 전체 분량을 10으로 나누고 거기에 하루 이틀 여유를 두면 그것이 곧 초교 일정이 됐다. 초교는 원고를 처음 맞닥뜨리고 에너지를 충분히 쏟아야 하니 일정을 많이 둘 수밖에 없다. 교정을 몇 차례 진행하면 하루에 볼 수 있는 원고의 양도 그만큼 늘어난다. 인쇄 직전에는 몇 시간 만에 원고를 훑어보기도 한다. 

초교 일정에는 잠시 머리를 식히면서 커피를 마시고 기지개를 켜는 시간이 포함되어 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온종일 책상 앞에 앉아 같은 자세로 몇 시간이고 원고만 들여다볼 것이 틀림없다. 또한, 괜히 마음만 초조해져서 원고의 많은 것을 놓치고 말 것이다. 그럴 바에 기지개 한 번 켜고 가끔 딴짓도 하면서 느릿느릿 움직이는 게 여러모로 낫다. 


일정을 넉넉히 두기 시작하면서 원고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문장 하나에 깊이 고민해보고, 그보다 나은 자료가 있다면 메모를 덧붙인다. 참고할 만한 책이 있는지 서점을 기웃대고 어떨 때는 다큐멘터리를 찾아보기도 한다. 딱히 필요한 말은 아니더라도 작가에게 해주면 좋을 이야깃거리를 쟁여 두기도 한다. 예전에는 주어진 일을 빨리빨리 해내서 인정받자는 주의였다면, 지금은 조금 늦더라도 결과물로 승부하겠다는 주의다. 물론 아직은 서툰 편집자이지만, 언젠가는 인정받겠지, 뭐.



카피 사진: Photo by Nareeta Marti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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