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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 Oct 29. 2024

사람공부

#2 MU

“혹시 J.R.R. 톨킨 소설 좋아해?” 그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떠올리며 반갑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곧바로 말했다. “호빗 영화가 이번 주 토요일에 상영해. 함께 보러 갈까?”


알고 보니 그는 C.S. 루이스도 좋아한단다. 내가 좋아하는 루이스와 톨킨이 친구였다는 사실을 아는 걸 보면, 그의 관심사가 나와 맞닿아 있다는 느낌이 들어 마음이 더 설렜다.


토요일 저녁, 나는 약속 시간보다 일찍 영화관에 도착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그를 기다리며 극장 벽에 걸린 다양한 영화 포스터들을 한참 바라보았다. 설렘과 긴장이 뒤섞인 채, 곧 그가 등장할 문 쪽을 은근히 의식하며 핸드폰 화면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조금 후, 그는 익숙한 미소를 지으며 나타났고, 우리는 가벼운 인사를 나눈 뒤 상영관으로 함께 걸어갔다. 영화가 시작될 때까지 이어진 사소한 대화가 끝나고 극장의 불이 꺼지자, 스크린이 밝아졌다. 내 시선은 스크린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왼쪽에 앉은 그가 마치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영화 속에서는 거대한 모험이 펼쳐지고 있었지만, 내 마음은 그를 향한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스크린 속 장면이 가슴을 울릴 때마다 숨이 멎는 순간들이 있었고, 그는 어떤 장면에서 슬며시 웃음을 흘리거나 흥미로운 장면에 집중하는 듯했다. 그런 그를 몰래 곁눈질할 때마다 심장이 조금 더 빨리 뛰는 것을 느꼈다.


극장 안의 조명은 어둡고 은은한 불빛이 벽을 타고 흘렀다. 다른 관객들의 조용한 숨소리와 간간이 들리는 웃음소리, 스크린을 울리는 웅장한 사운드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그 모든 소리와 풍경이 흐릿해지고, 내 주변에는 오로지 그와 나만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영화가 클라이맥스를 향해갈수록 그의 손이 가까이에 있는 것 같았지만, 나는 끝내 무언가를 잡아야 할지 망설이는 상태로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의 곁을 지켰다.


영화는 3시간을 꽉 채우며 마무리되었고, 극장을 나서자 이미 늦은 밤이었다. 출입구에서 잠시 망설이고 있는데, 그는 나를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 제안했다. 선뜻 거절할 수 없었다. 그의 말에는 어느새 익숙해진 부드러운 배려가 묻어 있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연스럽게 그의 곁에 섰다.


밤 공기는 선선했고, 우리 주변은 조용했다. 가로등 불빛이 잔잔하게 비추는 길을 따라 걷는 동안, 나는 영화 속 장면보다도 그의 옆모습에 더 눈길이 갔다. 때때로 둘 사이에 긴 침묵이 흐르기도 했지만, 그의 발소리와 내 발소리가 나란히 이어지는 소리에 마음이 점점 더 차분해졌다. 몇 번이고 말을 꺼내려다 이내 삼켜버리는 짧은 순간들이 오히려 우리의 거리를 조금씩 좁혀주는 것 같았다.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고, 가끔씩 지나가는 차들의 불빛이 길을 스쳤다. 그는 내게 영화의 장면 중 인상 깊었던 부분을 묻기도 하고, 톨킨과 루이스 이야기를 꺼내며 서로의 감상을 나눴다. 마치 이 길이 조금 더 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와 걷는 시간이 길어지기를 바랐다.


집 문 앞에 서서 그를 향해 마지막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그는 조용히 한 발짝 내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가슴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늦은 밤, 가로등 아래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마음속 작은 떨림이 조용히 커져만 갔다.


그는 살짝 머뭇거리더니 낮은 목소리로, "오늘 정말 즐거웠어,"라고 말했다. 나는 미소로 답했지만, 그 말이 무언가를 더 전하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손을 뻗을까 말까 망설이는 그 순간, 바람이 살짝 불어와 나뭇잎들이 흔들렸다.


그때, 나는 입술에서 제어되지 않는 말이 툭 튀어나왔다. “너 나 좋아해?” 이 질문은 내가 의도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고 진솔한 순간이 되어버렸다. 순간, 공기가 정지한 듯했다. 그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지만, 무슨 말이 나올지 조심스럽게 기다리는 듯했다. 나는 그 시선에 압도되어 순간의 떨림을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내 어깨를 잡고, 부드럽게 다가왔다. 그의 따뜻한 손길이 어깨에 닿는 순간 심장이 요동쳤고, 이어서 그의 이마가 내 이마에 닿았다. 그 가벼운 키스는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전해주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마음을 나누고 있는 듯했고, 시간이 멈춘 듯 어색한 순간은 두 사람의 감정이 결합되는 새로운 시작이 될 것 같았다. 주변의 소음도, 시선도 모두 사라지고 오직 우리만이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의 눈빛 속에서 나를 향한 진심이 느껴졌다. 나는 그 감정을 받아들이며, 다시 한 번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정말?”이라는 질문이 내 입에서 나올 뻔했지만, 말없이 그 느낌을 나누고 싶었다. 그의 손이 내 어깨에서 천천히 내려가며, 내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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