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MU
에메랄드빛 눈동자와 부드럽게 흐트러진 브라운 헤어, 캐주얼한 후드티와 늘어진 청바지를 입고 네가 커피숍에 들어섰을 때, 평범했던 공간이 마치 뉴욕의 한 모퉁이로 바뀌는 듯했다. 나는 수업이 끝난 후 한 수강생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녀의 질문이 많아 수업 시간에 못다 한 이야기를 이어가려 1층 커피숍에서 대화를 계속하고 있었던 그 순간, 네가 문을 열고 들어왔던 거다.
소란스럽던 주변 소음이 잦아들고, 커피잔을 사이에 두고 나누던 대화도 어느새 멈춰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커피숍 공간에 나지막하게 흘러나오던 재즈 선율이 그제야 귀에 뚜렷이 들렸고, 은은히 퍼지던 원두 향이 커피숍 한가운데에 서 있는 네 모습을 감싸는 듯했다. 그 순간, 나의 모든 시선이 너에게로 집중되었다.
내 수강생이었던 그녀가 너를 보자마자 반가운 듯 손을 흔들며 ‘Hi!’ 하고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내게 너를 가리키며 말했지. ‘제 영어 선생님이에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수강생의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네게 옮겨 똑바로 바라보았다. 너의 나지막한 인사와 함께, 나에게 보내는 짧은 눈 맞춤이 내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그날 이후, 너를 향한 호기심이 더욱 깊어졌다.
마침 석사 논문을 영어로 쓰고 있던 시기였고, 영어 선생님이 절실히 필요했기에 나는 네가 강의하는 곳에 가서 레벨 테스트를 받기로 했다.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이 나를 설레게 했고 레벨 테스트를 받는 날, 긴장된 마음으로 시험에 임하기보다는 너를 만날 생각에 더 많은 설렘이 있었다.
테스트가 끝난 후, 너의 반으로 배정되었을 때 내 마음속에 불꽃이 튀는 듯한 감정을 느꼈다. 석사 논문에 대한 영어 자문이 필요했지만, 그보다도 나는 너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고 너를 알아가고 싶었다. 나의 호기심은 단순한 학습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너와의 연결이 점점 더 가까워지기를 바랐다.
수업이 진행될수록 너와의 대화는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너의 말투, 너의 미소, 그리고 너의 생각은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 영어를 배우는 과정이었지만, 나에게는 너를 이해하고 너와 소통할 수 있는 기회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나는 나의 호기심이 깊어질수록 너와의 관계가 어떻게 발전할지 기대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의 일상은 너와 함께하는 수업으로 가득 찼고, 너에 대한 감정도 서서히 자라나고 있었다. 매주 수업이 끝날 때마다 너와 나눈 대화가 나의 마음에 깊은 흔적을 남기고, 우리의 연결이 점점 더 강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 감정이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해졌고, 너와의 관계가 단순한 선생님과 제자의 관계에서 벗어나기를 바랐다.
수업에 식사를 못하고 오는 사람들이 있어, 우리 반은 늦은 저녁을 함께 먹기로 했다. 저녁 식사를 나누는 동안, 우리는 수업 중의 긴장감을 뒤로하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영어로 프리토킹을 시작했다. 그때, 너는 나에게 “어떤 영화 좋아해?”라고 물었다.
나는 영화 밀양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 영화는 인간의 복잡한 감정과 심리를 심도 있게 탐구한 드라마야. 아들이 실종되면서 주인공의 삶은 극적으로 변하게 되지. 이 영화는 심리적 고통과 그로 인해 생기는 다양한 감정들을 섬세하게 그려내는데, 특히 인간의 상실과 무기력함, 그리고 신과 인간의 연결성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부분이 좋았어.”
내가 이렇게 말하자, 너는 잠시 나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 순간, 너의 시선은 마치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깊고 진지한 눈빛에서 나의 모든 생각과 감정을 읽고 싶어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영화는 정말 깊이가 있네. 상실감과 신과의 연결성을 다룬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아,” 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너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러고는 나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질문을 던졌다.
“나랑 영화 보러 갈래?” 그 순간, 식사를 함께하던 수강생들도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몇 초간의 침묵이 흐르고, 모든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는 느낌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주변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지만, 그보다도 너의 질문이 내 마음속 깊은 곳에 파고들었다. 가슴이 찌릿하고 심장은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 어색한 침묵 속에서 내 얼굴은 점점 붉어져 갔고, 머릿속에서는 다양한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잠시 망설이던 나였지만,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아! 어떤 영화를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