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u Oct 23. 2024

사람공부

#1. 한 남자의 스토킹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처음엔 그저 호의적인 관심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내 방송을 좋아해 주는 수많은 시청자 중 한 명일 뿐이라고. 그러나 그의 문자는 언제나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도착했다. 수요일 저녁 8시. 무언가 불길한 패턴이었다.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저보다 좋은 남자를 만나시길 바랍니다. 제가 드린 선물은 돌려주세요."


메시지를 읽는 순간, 등 뒤로 차가운 것이 서서히 흘러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왜 하필 수요일, 8시인가? 그 시간이 바로 내 방송이 시작되는 시간이었다. 처음엔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는 그저 기분 탓이라고 넘겼다. 하지만 세 번째, 네 번째가 되자 그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저보다 좋은 남자를 만나?"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나의 콘서트를 처음 찾아온 그의 첫인상은 참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 마스크 너머로 보였던 그의 눈빛은 따뜻했고, 그는 진심으로 내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코로나 시국에 시작된 나의 방송은 그와 같은 이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던 것 같다. 저녁마다 진행된 방송에서 청취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즉석에서 노래를 만들어 주는 프로그램은 진행자에게도 청취자에게도 신기하고 특별한 경험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꾸준히 나의 방송을 청취했고, 곧 익숙한 이름이 되어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팬덤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그를 포함한 일부 청취자들과는 오프라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가졌다. 처음엔 그저 차 한 잔을 나누며 대화를 나누는 정도였지만, 점차 식사를 함께할 만큼 친밀해졌다. 그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늘 예의 바르고, 내 음악에 대한 열정적인 팬처럼 보였다. 내가 하는 말과 행동에 집중하며,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세세하게 기억하는 모습을 보였다.


알고 보니 그는 내 친한 후배의 지인이기도 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후, 그는 단순한 팬의 한 사람이 아닌, 개인적으로도 몇 번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관계가 되었다. 그와의 대화는 처음엔 편안하고 자연스러웠다. 그가 내 방송을 통해 나를 알게 된 팬이었다는 점이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후배의 지인라는 연결 고리가 있어서 더욱 경계심 없이 그를 대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나에게 점점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표현하기 시작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 관심이 나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행동은 점점 더 집착적인 색채를 띠기 시작했다.


그가 나에게 보내는 관심이 점점 달라지기 시작했을 때, 내가 선택한 방법은 침묵이었다. 그의 메시지를 아무 대답 없이 넘기고,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포기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침묵은 오히려 그를 자극한 듯했다.

그의 문자 내용은 점차 집착으로 물들어갔다.


"왜 답변하지 않으시나요?"


그 짧은 문장은 단순한 질문 같았지만, 그 속에는 묘한 조바심이 묻어나 있었다. 마치 내가 대답하지 않는 것이 그에게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인 듯. 그 단순한 문장이 나의 불안감을 더 크게 만들었다. 나는 휴대폰을 쥔 손에 무심코 힘을 주었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은 이제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나를 감싸고 있었다. 침묵만으로는 그를 멈출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순간, 그의 관심은 단순한 호감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나는 이전에 방송에 초대한 적이 있는, 나와 또래가 비슷한 심리학 박사님께 연락을 드렸다. 그와 주고 받았던 메세지를 캡처해 보내며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박사님은 나에게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단순한 호감 이상의 문제입니다. 스토킹의 초기 징후가 보여요."


그 말에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내가 불안해하고 있었던 그 모든 감정들이 하나의 단어로 명확해졌다. 박사님은 덧붙였다.


"지금 바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더 심각해질 수 있어요. 그에게 받은 선물의 목록을 세세하게 기록하시고 선물은 모두 다 그가 보내달라는 곳으로 보내시고 물건을 보냈다는 증거를 남겨두세요. 연락을 무조건 무시하는 것도 위험할 수 있습니다."


나는 박사님의 말을 듣고 깊은 혼란에 빠졌다. 침묵이 그를 더 자극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느끼고 있었지만, 그것을 깨닫는 순간 나의 불안은 한층 더 깊어졌다.


다음 날, 박사님의 조언대로 나는 그가 보낸 모든 선물을 목록으로 적었다. 시든 꽃 한 송이조차 빠뜨리지 않았다. 그 물건들은 단순한 선물이 아니었다. 그 안에 그의 시선, 그의 존재감이 스며들어 있었다. 선물들을 하나씩 정리하며 그의 무게가 실감 났다. 이삿짐센터에 연락해 사정을 설명했다. 기사님의 반응은 의외로 가벼웠다.


"남자들이 원래 좋아하면 그럴 수 있잖아요, 아가씨. 너무 튕기지 말고 받아줘요."

그 말에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기사님, 따님 있으세요? 따님이 이런 상황에 처하면 어떠시겠어요?"

내 목소리가 떨렸다.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기사님이 대답했다.

 "참나 원, 그러면 그 주소로 보내면 되나요?"


그가 알려준 사무실 주소로 택배를 보내기로 했다. 모든 게 그렇게 끝나길 바랐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택배는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택배 회사에서 온 문자에는 짧은 설명이 적혀 있었다. 그가 연락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 내 휴대폰이 진동했다.


"선물은 왜 다시 보냈죠? 다시 저를 받아주실 수 있나요?"


그 문장을 읽는 순간, 가슴속 깊은 곳에서 낯선 공포가 밀려왔다. 그저 단순한 문장이 아니었다. 그의 말은 무언가 더 깊은 위협을 감추고 있었다. 날카로웠다. 마치 나를 시험이라도 하듯이, 그 안에는 나를 옥죄는 보이지 않는 힘이 숨어 있었다. 정중한 표현 속에 감춰진 통제욕. 그의 요구는 단순한 물건의 반환이 아니라 나를 다시 그의 손아귀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공포는 곧 현실이 되었다.


"나를 무시하지 말아요."


이 짧고 단순한 문장이 얼음처럼 차갑게 내 가슴을 찔렀다. 그 순간, 나는 이 상황을 더 이상 혼자서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이 떨렸다. 경고음이 머릿속을 울리며 점점 더 커져갔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나는 휴대폰을 집어 들고 112를 눌렀다. 떨리는 목소리로 경찰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스토커가 있어요. 그가 저를 위협하고 있어요.”


내가 그 말을 하는 순간, 그의 그림자가 어디선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는데







                    

이전 03화 사람공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