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아버지
애 낳을 수 없는 여자. 어느 날, 나는 그로부터 그런 말을 들었다.
마흔을 넘긴 내가, 그와 열 살 차이가 나는 내가.
그의 정자와 내 난자가 한 번이라도 만난 적 없는 상태에 나는 이미 불가능의 이름으로 불렸다.
그 불가능이란, 그 집안의 혈통을 이어갈 생명을 낳지 못할 여자라는 뜻이었다.
내 몸은 그들의 시선에서 실패한 땅, 기대를 저버린 땅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불가능이란 단순히 아이를 낳지 못하는 차원을 넘어서 있었다.
그것은 나의 몸, 나의 시간, 나의 모든 선택이 그들 앞에서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내가 살아온 길, 그 길 위에서 쌓아온 기억들, 나만의 속도로 흘러온 시간은 그들에게 단 하나의 기준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직 내가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나의 존재를 정의했다.
어느 날 남자 친구에게 전해 들은 말은 “왜 애도 못 낳는 여자랑 만나냐고 하셨어.”
그의 아버지가 나를 가리켜했다는 말이었다.
무언가가 내 안에서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내 자존심일까? 아니면 그와 함께했던 소중한 시간들일까?
아니면, 내 존재 그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그 한 마디는 내 삶의 여러 층위를 침범해, 나를 단번에 결핍으로 축소시켰다.
‘애도 낳지 못한다.’는 그 말은 단순히 생물학적인 사실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를 여성으로서 불완전한 존재로 만드는 낙인,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훼손하는 말이었다.
그 말은, 결국 그가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알게 해 주었다.
그의 아버지의 말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내가 아니라,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과 내 존재 자체에 대한 불편함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내가 그와 그의 아들과의 나이 차이만큼이나 다른 길을 걸어왔다는 이유로,
그의 기대에 부합하지 않는 내가 싫었던 것이다.
나는 그가 전한 그의 아버지 말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너도 그렇게 생각해?"라고 물어볼 것을
그 말을 전한 남자친구의 의도도 궁금했지만,
순간 나는 그 말에 반박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알았다.
내가 살아온 내 삶의 의미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음을 알고 그 어떤 말도
내 존재의 가치를 제한할 수 없으며, 나는 나로서 이미 충분함을 알고 있다.
내가 살아온 시간은 그들 앞에서 결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그 말은 그저 누군가가 내 삶을 규정하려 했던 시도에 불과했다.
나는 그 말 앞에서 내 삶을 변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잠시 그의 말에 내가 흔들리던 것을 스스로에게 물었다.
"왜 내가 내 삶을 변명해야 하지?"
그리고 남자친구 앞에서 한바탕 크게 웃었다.
그것은 내 안에 억압과 혼란을 털어내는 해방의 순간이었다.
나는 내 삶을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며 살아간다.
내가 열심히 살아온 이 삶이 ‘애도 못 낳는 여자’라는
그 말로 깎여나갈 만큼 가벼운 것이 아님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 말은 내 존재를 스쳐 지나간, 아무 의미 없는 헛된 말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