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되어준 사람
포항지진이 덮친 그해였다. 부서지고 사라진 집터 위에서 나는 노래로 집을 짓고 있었다.
돌아갈 곳을 잃은 사람들, 한순간에 삶이 흔들린 이들을 위해 나는 벽 대신 선율을 쌓고, 창 대신 가사를 열고, 그 위에 따뜻한 온기를 덮었다.
"그들에게 잠시 머물 수 있는 집이 될 수 있을까?"
그런 마음으로 나는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그때 그 자리에서 한 남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나의 집을 짓고 있었다.
그를 처음 만난 건 광주 송정역에서였다.
공연 관계자가 마련한 픽업 차량에 매번 같은 사람이 나를 마중 나왔고, 공연이 끝나면 다시 역으로 데려다주었다. 그는 항상 조용하고, 정중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반년이 흘렀다.
그러다 어느 날, 공연 관계자로부터 들었다.
"모르셨어요? 그분이 직접 모시겠다고 하셔서 담당하셨대요."
그제야 떠올랐다. 늘 같은 자리에서 기다리던 눈빛, 길이 막히는 날이면 먼저 커피를 사 두던 손.
그는 반년 동안 묵묵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무렵, 나는 집을 잃었다.
임대 계약이 끝났고 이사 가려던 곳에서 집주인이 갑자기 비밀번호를 바꿨고 나는 집에 들어갈 수 없었다.
"계약서까지 작성했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나는 졸지에 떠돌이 음악가가 되었다. 공연이 있던 날, 캐리어를 끌고 무대에 올랐다.
이삿짐을 끌고 다니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날따라 조명이 유난히 따뜻했다.
이상하게 여기던 그가 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이 캐리어는 뭐예요?"
나는 상황을 이야기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가 입을 열었다.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으세요?" 그가 물었다.
"담양 대나무숲길, 그리고 부산." 나는 툭, 던지 듯 말했다.
그리고 다음날 그는 정말 내가 가고 싶다는 곳곳에 머물 곳을 마련했다.
나는 그가 짠 동선대로 며칠간 여행을 했고, 마지막 날 그는 약속한 장소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집이 꼭 벽과 지붕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이 누군가의 집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드디어 문제가 생겼던 집에 이사하는 날이었다.
이삿짐센터가 도착하고 친구들이 몰려와 짐을 나르는 와중, 그는 얼굴을 가릴 만큼 큰 꽃다발을 들고 나타났다. 친구들이 그를 둘러싸고 웅성거렸다.
(친구들 모두)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그는 얼굴을 가린 꽃다발을 내리고 말했다.
"프러포즈하러 왔어요."
친구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퍼져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그 순간에도 그는 꽃다발을 내 손에 쥐게 한 뒤, 말없이 커튼을 달고 액자를 걸고 깨진 싱크대를 글루건으로 메우고 있었다.
이삿짐센터 직원들과 친구들의 소란 속에서도 그는 조용히 나의 집을 짓고 있었다.
마지막 못질을 툭, 끝내고 그는 나를 한 번 바라보았다. 그리고 사라졌다.
밤이 깊어지고, 친구들도 하나둘 돌아갔다.
텅 빈 집 안, 방금까지 누군가가 있었던 자리에 나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벽에 기대앉아 커튼의 주름을 매만지며, 그의 손길이 스쳐간 자리를 하나씩 더듬었다.
낯선 집인데도, 이상하게 익숙하고 따뜻했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었을 때였다. 문자 하나를 받았다.
"저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마치 오래 접어둔 감정을 조심스레 펼치는 것 같은 그의 문자였다. 무엇이라도 써서 답장을 보내야 할 것 같았지만, 그에게 건넬 말들은 늘 마음보다 한 걸음 느렸고, 그동안의 감정을 문자 몇 줄에 담기엔, 내 언어는 한없이 작았다. 그래도 나는 용기를 냈다. 짧은 문장을 건넸고, 그 뒤로 우리 사이엔 사랑이 피어났다. 서툴렀지만, 그 시간만큼은 서로를 향한 마음이 분명했다. 그는 여전히 말보다 행동으로 마음을 전했고, 나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따뜻함을 배웠다. 하지만 그 계절은 길지 않았다. 삶의 방향은 서로를 향하지 않았고, 우리의 사랑은 천천히 멀어졌다. 사랑이 끝났다는 사실보다, 그 온기를 잊지 못하는 내 마음이 오래 남았다. 하지만 시간은 흐르고, 계절은 계속해서 지나갔다.
두 해마다 전세 만기가 찾아오고, 나는 익숙하게 짐을 싸고 머물던 곳을 정리한다. 손에 익은 체크리스트를 점검하지만,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멍하니 멈춰 선다. 낯선 곳으로 떠날 때마다, 짐을 싸면서 자연스럽게 그가 떠오른다. 그가 달아준 커튼, 벽에 걸어준 액자, 글루건으로 메운 싱크대까지. 그가 남겼던 흔적들은 하나둘 사라져 가지만, 그가 남긴 온기는 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다.
어쩌면, 사람은 늘 누군가에게 머물고 있는지도 모른다. 벽이 아닌 마음으로, 지붕이 아닌 손길로, 떠나고 다시 돌아오는 모든 순간에 사람의 온기를 남기며, 사람은 그렇게 누군가의 집이 되어주고 있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