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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가는 Aug 15. 2019

무지개가 나에게 준 약속


남편이 집을 비우는 시간은 거의 12시간 가까이 된다. 아침 8시 30분쯤 출근한 남편은 매일 8시가 넘어서 고단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오곤 한다. 한국에서야 남편이 출근한 사이에 차를 끌고 나가 장도 보고, 쇼핑도 하고, 가족들이나 친구를 만나고 하느라 바쁘겠지만, 이곳 독일에서는 유독 그 시간이 참 길게 느껴진다. 거의 3개월을 그렇게 보내니 나 자신의 쓸모가 염려가 되었다. 나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가?라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한국에서는 나름 직장생활도 하고 공부도 열심히 했는데, 이곳에서 고작 하는 것은 어학원을 다니는 것밖에 없으니 더 불안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대학원에 지원을 했다. 분야도 내가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했을 때 일했던 분야이기도 하고, 마침 집 앞에 있는 대학원 전형이 독일어 전형에서 영어로 바뀌어 "이건 하늘이 열어주신 길이다!"라는 생각으로 지원했다. 


그렇게 원서를 준비해 제출하고 얼마 전에 그 대학원에서 결과를 통보받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불합격"이었다.  "이번 해에는 쟁쟁한 지원자가 너무 많아, 교육학이나 컴퓨터 공학 학부를 전공한 사람만 받기로 했습니다."라고 쓰여있었지만 그런 말로는 위로가 되지 않았다. 불합격할 수도 있다고 늘 가능성은 생각했지만, 막상 탈락 통지를 받고 나니 생각보다 타격이 컸다. 첫째로는 내가 거절당했다는 거절감이 컸다. 나는 과연 이래서 세상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는 사람들한테 뭐라고 말하지? 였다. 주변에서 많은 응원을 해주고 격려해줬는데, 어떻게 불합격했다는 이야기를 할까- 내 표정은 어떨까- 어떻게 말해야 내가 덜 불쌍해 보일까- 벌써부터 몸이 근질근질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불합격 통지를 받은 다음 날, 교회 친구들과 집에 모여서 염색을 하기로 해서 조잘조잘 웃고 떠드는데 갑자기 밖에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독일답지 않게 와르르 쏟아지는 비를 보며 신기하다고 생각하는데, 한참이 지나고 나니 갑자기 햇살이 비취기 시작한다. 한 친구가 "와! 저거 봐요!"라는 소리를 하며 베란다로 나간다. 거짓말처럼 비가 그치고 무지개가 떠있었다. 한 개도 아닌 두 개의 쌍 무지가 개 떠있었다. 마치 내가 주인공이라는 것처럼 우리 집을 기준으로 크고 둥글게 떠 있는 무지개를 보니 성경에서 말하는 무지개의 의미가 생각났다. 무지개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약속'을 의미한다. 갑자기 이 무지개가 나에게 미래에 대한 어떤 약속같이 느껴지며, 내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닌가? 하는 주책일지도 모르는 자뻑이 들었다. 


우리의 인생도 이유를 모를 비가 쏟아질 때가 있다. 분명히 예보되지 않은 비었는데 당황스럽게도 내 계획과 다르게 비가 와장창 쏟아질 때가 있다. 그리고 그 비를 온전히 맞으며 걸어가야 하는 순간이 분명히 있다. 또 인생에서는 예기치 않은 햇살을 만날 때도 있다. 내 능력밖의 일인데도 기다렸다는 듯 모든 일이 술술 풀리고 길이 열리는 경험을 누구나 해 봤을 것이다. 이런 햇살 덕분에 우리는 또렷한 무지개를, 혹은 인생을 향한 약속을 마주하기도 한다. 가만 생각해보면 비를 만나고 햇빛을 만나는 건 우리가 잘하고 못하고의 영역 밖의 일이다. 노력하지 않고 모든 것을 우연의 일치로 돌리는 것과는 다르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들을 이렇게 예기치 않게 만날 때, 인생에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들도 있음을 깨닫게 된다. 


어쩌면 내 대학원의 탈락도 그런 것이었을까. 준비를 하는 과정에 나의 열정을 쏟아부었고 그 과정이 즐거웠다면 괜찮다. 준비하는 나 자신이 맘에 들었고,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았다면 결과와 상관없이 그것 또한 괜찮다. 툭툭 털고 일어나 오늘 주어진 하루를 또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거절에 대한 회복 탄력 주기가 조금씩 빨라지는 것은 거절감에 마음이 무뎌지는 것일까 아니면 성숙해지고 있다는 증거일까. 어느 쪽이든 예전에는 한 달이 넘게 슬퍼하고 애곡 했을 일도 이제는 몇 주, 며칠이면 거뜬하게 극복하는 걸 보면 마음의 근육이 길러지는 것 같다. 인생의 소나기를 만날 때 저 너머에 있는 무지개를 바라볼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것들을 인정하고 그 시간을 묵묵히 견딜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우리 집에서 본 대망의 그 무지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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