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크 장식(1)

화분도 안 기르는 내가 꽃밭 가꾸기라니..

by 이런이유지

제누아즈와 생크림의 난관을 지나고 보니 그동안 큰일이 아니라 생각해 외면했던 데코레이션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새롭게 떠올랐다. 인터넷을 뒤져보면 정말 다양한 케이크 장식들이 나오는데 내가 해낼 수 있는 것은 없었고, 어디선가 케이크 데코레이션 수업을 한다고 해도 따로 시간을 내기 어려웠다. 빵과 생크림에 적응하기도 벅찬 상태에서 장식을 위한 시간을 추가로 더 들인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결정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아주 단순한 생각으로 허브와 꽃을 이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허브와 꽃을 이용하면 내 부족한 손재주를 커버할 수 있지 않겠는가. 또한 자연의 질서 있는 모양과 색감의 조화를 도저히 내 능력으로는 따라갈 수 없으니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생각했고 결과적으로는 그 생각이 맞긴했다.


본격적으로 꽃과 허브를 사용하기 전에는 조각 케이크는 주로 깍지를 이용해 크림으로 장식했고 가끔 있던 홀케이크 주문에는 과일을 잘라 테두리에 두르는 방식으로 마무리를 했다. 달리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해 과일로 장식을 하면서도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양이 영 마음에 안 들었던 이유는 과일을 다루는 기술이 부족한 탓이 가장 컸을 테지만 내 취향과도 거리가 멀기도 했다. 허브와 꽃은 종류도 색감도 다양하니 여러모로 나에겐 쓸모 있고 필요한 재료였다. 처음부터 길러서 사용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지역 특성상 꽃과 허브를 다양하게 구하기가 어려웠다. 해풍이 적은 중산간 지역이기도 하고 이것이야 말로 자급자족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사실 처음엔 별로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냥 모종 몇 개 가져다가 심어두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부담도 뭘 알아야 느끼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꽃과 허브를 심었고 야외공간이니 알아서 잘 자라겠지 하고 신경을 쓰지 않았다. 햇볕을 싫어하고 풀과 벌레를 꺼려해 야외보다 실내를 좋아하는 나에게 텃밭 가꾸기는 너무 부담스럽고 피하고 싶은 일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처음엔 케이크 완성도에 집중하느라 내가 느끼는 꽃들의 존재 자체도 미미했다.


장식을 하다 보니 좀 더 다양한 꽃들을 사용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본격적으로 식물을 잘 길러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땐 어디서부터 무엇을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어릴 적 풀독으로 고생했던 기억으로 나는 풀을 무서워한다. 식물이 살갗에 닿는 느낌을 싫어하는 데다가 도시에서도 집순이로 생활하던 나에게 자연은 늘 멀리 있었다. 보통 제주도에는 자연을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와 남편은 그렇지 않았다. 자연을 좋아하긴 하지만 가까이하지는 않았다. 해변가에 살면서 지금까지 바다에 몸을 담가본 적도 없고 한라산은 멀리서 그 자태를 지켜보는 것만으로 충분해서 등반을 고려해 본 적 조차 없을 정도였다. 누군가는 우리의 인생을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말하지만 나에게는 자연이 그랬다. 멀리서 보면 아름답기만 한 자연도 가까이 보면 두려움을 주는 요소가 많았다. 그중 꽃밭에서 필연적으로 만나야 하는 존재가 벌레들인데 제주에서 가장 적응이 어려운 것 또한 벌레였다. 꽃들이 조화롭고 예쁘게 정돈되어 있는 그림 같은 화단은 내 현실엔 없었다. 잘 자라주기를 바라는 꽃들은 꽃을 피워내기가 어렵고 잡초는 어찌나 빨리 자라고 많이 퍼지는지. 뽑아도 뽑아도 제자리걸음이었다. 잡초만 있으면 다행이겠지만 화단은 벌레들의 놀이터였다. 지네, 공벌레, 사마귀, 노린재 등을 포함한 그 밖의 이름 모를 벌레들이 총출동해 있었다. 내 눈에 비친 꽃밭은 꽃은 조금, 벌레 반, 잡초 반, 공기 반이었다.


꽃밭 가꾸기는 케이크 만들기 만큼이나 어려웠다. 그나마 크기가 작아서 다행이지 더 컸다면 어땠을지는 겪어보지 않아도 알 것만 같다. 케이크는 실내에서 만들지만 꽃은 밖에서 가꿔야 하기 때문에 온도며 습도, 날씨와 태양 그리고 언제 날아들지 모르는 날벌레들과 언제 기어 나올지 모를 땅속 벌레들까지 모든 것이 나를 긴장하게 했다. 밥을 챙겨주는 길고양이들이 감사의 표시로 쥐라도 잡아다 놓는 날에는 기절초풍을 하며 실내로 뛰쳐 들어왔다. 산너머 산이라는 말이 지금의 나를 위해 만들어졌구나 싶은 순간이었다.


이렇게나 바쁜 내가 이 정도로 큰 비중으로 신경 써줬으니 나머지는 좀 알아서 잘 자라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꽃을 길렀다. 자연의 질서로 비와 바람과 햇살이 알아서 식물을 잘 크게 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그런 줄로 알았다. 산과 숲을 보면 여러 식물들이 그 모습 그대로 아름답게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까. 부디 알아서 자라주기를 바랐다. 나에게 적당 하다의 기준이 꽃들에게 적용될 리가 없었고 그렇게 우리의 꽃밭은 늘 어딘가 2% 부족한 모습이다. 꾸역꾸역 꽃을 길러보니 꽃도 관심을 가진 만큼 잘 자란다는 어쩌면 당연한 진리를 알게 됐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꽃을 가꾸는 일에 대해서는 4년 차인 지금도 특별히 나아진 것은 없고 우리 화단과 화분에서 심고 기르는 일에 조금 익숙해졌다는 아주 미약한 발전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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