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를 거듭하며 여러 가지 것들에 의문이 생기고 머릿속은 잡념으로 가득하다. 반죽기 문제인가? (아주 좋은 회사의 훌륭한 제품이다) , 속도 조절을 해야 하나? (이건 맞는 말인 것 같다) , 핸드믹서나 거품기를 가지고 손으로 작업을 하는 편이 더 나은가? (대량작업과 거리가 멀어진다) , 온도가 이렇게나 중요하다면 워크인 냉장고라도 들어가서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니야? (케이크 완성 전에 내가 먼저 케이크가 되겠지)
그래서 현 상태에서 변화를 줄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시도해 봤다. 그중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했던 속도조절. 기계의 속도를 더 높여보니 기포가 너무 많이 들어가서 점점 원하는 상태랑 멀어졌다. 속도를 줄여보니 어? 이건 좀 괜찮네?! 그런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지금 중요한 건 시간보다 완성 도니까 기계 속도를 조금 줄여서 작업하는 게 낫겠다. 한 가지 괜찮은 방법을 발견하면 쭉 같은 방식으로 잘됐으면 좋겠는데 그게 그렇게 간단하고 단순했으면 내가 이렇게 앉아 지난날을 추억하는 일도 없었겠지. 그래도 일단 저속 쪽으로 방향성이 생겼다. 방향성이 생겼다는 건 아주 긍정적인 발전이다. 길 잃은 산속에서 만난 양갈래 길에서 드디어 내가 가야 할 한쪽 길을 선택할 수 있게 됐다.
저속으로 돌리는 선택을 하고 나니 부작용 아닌 부작용이 생겼다. 시간이 좀 걸리니까 다른 할 일들을 조금이라도 해야지 하면서 한눈을 팔면 기계를 꺼야 할 타이밍을 놓치고 오버휩 상태까지 가는 일이 생겼다. 그래도 이 정도쯤이야 내가 기계 앞을 지키기만 하면 해결될 일이라 큰일은 아니었다. 한 번에 케이크 여러 개를 만들 수 있을 만큼의 양을 돌리는데 처음에 맞춘 생크림의 점도는 그대로 유지되지 않고 조금씩 풀려 사용 직전에 다시 점도를 맞춰야만 했다. 어차피 다시쳐야 하는데 처음부터 많이 돌릴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 좀 묽은 상태로 완성했다. 어느 날은 기계를 오래 돌려서 작업이 어려운 것 같다가 또 어느 날은 기계를 오래 돌려도 괜찮았다. 마치 생크림도 그날그날 컨디션이 달라지는 것 같았다.
휘핑을 좀 다양한 방법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죽기를 사용했다가 핸드믹서를 써보기도 하고 또 직접 손으로 해보기도 했다. 또다시 뇌피셜이지만 기계의 크기가 작아질수록 생크림의 상태가 섬세하게 조절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한동안은 기계의 사용을 최소화하고 손으로 대부분의 작업을 해보기도 했다. 정말 비효율 끝판왕이었지만 어쨌든 나는 생크림의 상태가 원하는 대로만 나와주길 바랐다. 효율 따지다가 망해서 다시 하느니 비효율적인 방법이라도 완성도만 높아진다면 그대로 괜찮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실망해서 기운 쭉 빠지는 기분은 느끼지 않아도 됐으니까.
이제는 나름대로의 노하우가 생겨 반죽기부터 핸드믹서 손을 모두 사용해서 점도를 맞추고 있다. 반죽기는 어느 정도 돌려야 하는지 핸드믹서와 손으로 작업할 땐 또 어느 정도로 해야 망하지 않는지 알게 됐다. 생크림을 마주할 때 이전에 느꼈던 부담은 사라졌고 조금 망치더라도 금세 복구할 수 있는 노하우도 생겼다. 이론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몸이 기억해야 하는 일이었다는 것이 내 최종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