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크림(4)-무너짐

by 이런이유지


한 동안 나를 구렁텅이에 빠트린 또 하나의 주역은 바로 무너짐 현상이다. 쫀쫀하면서 부드럽고 가볍고 산뜻하면서 우유의 풍미가 진한 맛의 생크림을 꿈꾸다 보니 성공적이라는 느낌을 받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처음에는 내가 그런 맛의 크림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모르긴 몰라도 그런 맛을 완성하려면 절대 분리현상이 일어나면 안 됐는데 내 손만 닿았다 하면 생크림 속 유지방들이 약속이나 한 듯 뿔뿔이 흩어졌다. 일단 분리가 됐다는 건 입에 기름기가 감도는 느끼한 맛이란 의미였다. 아무리 상황이 힘들어도 나조차도 먹고 싶지 않은 케이크를 만들어 팔 수는 없었다.


크림 분리현상이 아무래도 손이 많이 닿아서 그런 것이라면 애초부터 좀 묽게 작업하면 되는 거 아닌가 싶은 뇌피셜에 휘핑을 좀 덜한 상태로 작업을 해보기도 했다. 적당한 점도가 안 생겼으니 모양도 당연히 나오지 않았고 내가 상상했던 것처럼 완성될 때쯤 알맞은 점도로 맞춰지지도 않았다. 그런 불안정한 상태로 작업을 하다 보면 케이크의 옆면에 붙어있던 생크림들이 마치 테두리 부분에 싱크홀이라도 생긴 듯 주르륵 무너지기 시작한다.


다른 곳은 그럭저럭 잘 됐는데 하는 아쉬움에 흘러내린 부분만 조금 복구하려 욕심을 내면 보란 듯이 더 처참한 모습으로 무너졌다. ‘이럴 거면 애초에 이렇게 공들여하지도 않았을 거야!’하는 허탈함에 마음이 두 배는 상했다. 흘러내린 부분을 거둬내고 그 부분만 다시 덧붙여보기도 하고 에어컨 온도를 더 낮춰보는 등 컨디션을 돌려보기 위해 할 수 있는 무리수를 총 동원해 봤자 결론은 원점부터 다시 시작하는 방법뿐이었다.


망쳐버린 생크림을 버리는 것은 언제나 아깝지만 이렇게 무너짐 때문에 기껏 작업하던 크림을 덜어내고 보면 시간과 정성까지 녹다 남은 눈뭉치 같은 지저분한 흰 덩어리로 남겨진 것 같아 더 보기 싫었다.


아슬아슬하게 무너짐의 위기만은 겨우 면해봤자 아래 테두리에 물이 생기거나 입에 기름기가 남는 맛으로 귀결됐다. 크림을 잔뜩 버리고 나면 나의 이 어려움을 저 먼 나라 들판을 뛰노는 소들에게라도 전하고 싶어 진다. 그 엉뚱한 마음의 불똥이 유통업체 사장님께 튀어 기어이 수화기를 들었던 적도 있었다.


“혹시 생크림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요? “ , ”생크림 공장 기계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요? “ , “다른 업체 사장님들은 이런 연락 없으신가요?” 뭐 대충 이딴 말도 안 되는 질문으로 사장님을 곤란하게 해 드렸다. 아이고 인간아..


한동안은 무너짐을 해결하지 못한 채로 케이크를 완성해 판매했다. 개별포장하면 다 괜찮다고 말해주는 남편의 말에 의지해 포장과 장식으로 보기 싫은 부분을 덮으려 했다.


서툰 솜씨로 완벽한 모양에 집착하다 보면 작업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고 점도의 짝인 온도가 흔들리니 탄력을 잃은 크림은 무너져 내렸다. 적당히 마무리했으면 됐을 텐데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어떤 부분에 욕심을 내면 시야에 보이지 않는 반대 부분이 또 무너지고. 크림을 고루 펴 바르지 않아 한쪽만 두꺼워진 부분이 또다시 무너지고. 그렇게 온갖 이유들로 크림은 내 마음과 함께 무너지고 또 무너지길 반복했다.


무너지거나 울퉁불퉁하거나. 얼마나 마음 상했으면 사진도 다 흔들린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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