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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터마인 Jan 12. 2019

9. 시작해야만 끝낼 수 있다면

하루 치 향유 - 필름사진을 본 후, 쓰고 그립니다

  왜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공부나 일은 할 수 없는 걸까. 나는 왜 대충 모자를 눌러 쓰고 무거운 노트북을 들고서라도 카페에 와야만 집중할 수 있는가.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뜨거운 플랫화이트의 하트 모양 우유 거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두 시간 안에 보내야 하는 기사는 이제 겨우 첫 단락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때 딸랑, 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들어와 커피를 주문했다. 어, 저 가방 브랜드 나도 아는 건데. 튀지않는 디자인에 디테일한 마감, 합리적인 가격때문에 디자인 회사 사람들이 곧잘 들고 다니는 브랜드였다. 나도 디자인 회사를 주로 출입하는 기자다보니, 저 브랜드에서 남성용으로 나온 명함지갑을 하나 가지고 있다. 여자가 말한다. ‘로나 갤로우로 쿠폰 적립 해주세요.’ 이 카페는 단골 손님들의 이름을 적은 스탬프 쿠폰을 벽에 붙여놓고 그들이 올 때마다 쿠폰에 체크를 해 준다. 로나 갤로우는 내 이름 밑에 붙어있던 쿠폰이었다. 흔하진 않지만 흥미롭지도 않은 이름을 가졌네. 인스타그램에 검색하자 상위에 그녀의 프로필 사진이 보이는 계정이 뜬다. 공통된 팔로워가 3명 있다. 셋 다 여기에서 두 블럭 떨어져 있는 디자인 회사에 다닌다. 아마 그녀도 이 회사에 다니는 거겠지.


 그녀의 계정은 전체공개 상태였다. 피드를 좀 더 탐색해 본다. 다행히 셀카는 별로 없다. 계정의 스크롤을 한 번 쭉, 내려보면 그 사람의 대략적인 관심사가 드러난다. 피드에 셀카가 쫙 깔려 있다면 그 사람의 최대 관심사는 자신의 외모, 그 중에서도 얼굴, 그 중에서도 실물과 간극이 있는 가장 아름다운 각도와 필터 안에서의 얼굴인 게 아닐까. 뭐, 편견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녀의 피드는 전반적으로 세 가지 키워드로 압축된다. 식물, 인테리어, 음악. 대부분 트렌디하지만 그 안에서 자신에게 맞는 것을 디깅(digging)하는 취미도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물 없이 키우는 것으로 유행하는 탈란드시아 보단 좀 더 크고 뿌리가 거친 반다를 키우는 식이다. 반다는 벽에 걸어두고 일주일에 한 번씩 물에 담그며 잘 관리해주면, 일 년에 딱 한 번 화려한 꽃을 피워낸다. 가끔은 종로 꽃시장에 가서 직접 식물을 사오기도 하는 듯 하다. 조명 인테리어에 대한 안목도 마음에 든다. 뭐, 루이스폴센은 절대적으로 아름답지만. 비싸고 흔한 것도 사실이니까. 수 십만원 대의 금액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산타앤콜 조명을 바닥에 툭 하고 내려놓은 게 바닥의 카펫과 잘 어울리네. 볕이 잘 들어오는 오후에 그 조명 옆에 아무렇게나 앉아 멍 때리는 옆모습 사진이 잘 나왔다. 어차피 친구 또는 애인이 카메라를 들자 급하게 의식한 각도겠지만. 지금 내 대각선 쪽 테이블에 앉아 에어팟을 귀에 끼고 에코백에서 꺼낸 거대한 디자인 북을 훑어보는 옆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게, 아름답다.


 스토리의 테두리에는 new를 알리는 무지개 색 선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다. 클릭하고 싶지만 그러면 나의 아이디가 노출된다. 거의 쓰지 않는 부계정으로 전환해 다시 접속한다. 그녀의 스토리를 클릭한다. 5분 전에 유튜브에서 캡쳐한 음악을 하나 올렸다. 지금 듣고 있는 거겠지. half moon run의 'warmest regards' 영화 <데몰리션>의 사운드 트랙이다. 약간 소름이 돋을 뻔 했다. 내 플레이 리스트에서 지난 곡 재생을 두 번 누르자, 그 음악이 흘러 나온다. 마르지 않은 몸에 건강한 낯빛, 꾸밈없는 표정만 봐서는 몰랐을텐데. 내면의 어두움을 훔쳐본 느낌이다. 사실상 훔쳐봐 달라고 드러낸 거지만서도. 그녀가 좀 더 궁금해졌다. 구글에 이름을 쳐본다. 예상대로 근처 디자인 회사의 사업부 소속이었다. 회사의 내년도 컨셉과 방향에 대해 인터뷰한 기사도 있었다. ‘우리의 비전과 전망에 대한 답이 있을 지 모르겠지만, 계속 질문을 던져요. 옳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가다보면 꽤 멀리까지 나아갈 수 있을 거란 믿음으로.’ 신중하고 현명하다. “로나 갤로우 씨!” 갑자기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놀라서 쳐다보니, 점원이 그녀에게 웃으며 스마트폰을 건네주고 있다. “화장실에 놓고 가셨던데요.” 그리고 허술하다.


 만약 내가 그녀와 사귀게 된다면, 우리 둘은 거의 확실히 잘 맞을 것 같다. 나는 나의 폭스바겐으로 그녀의 화분들을 종로에서 집으로 옮겨다 줄 것이고, 거의 요리를 안 하는 그녀를 위해 오믈렛을 만들겠지. <데몰리션>을 인상깊게 봤다면, 아마 <고스트 스토리>를 보고 눈물을 흘릴지도 몰라. 은은한 조명에서 함께 영화를 보고 나면, 따뜻한 차와 함께 그 영화의 사운드 트랙 ‘i get overwhelmed’를 들으며 감상을 나눌 것이다. 깊은 새벽까지 이야기를 하다가 거의 잠긴 목소리로 ‘로나, 너의 작은 중심에 있는 건 뭐야?’ 하고 옳은 질문을 던질지도 모른다. 딱히 답이 없어도 나아갈 수 있는 그런 질문을.


 아니면 우리 사이는 처음부터 삐걱댈수도 있다. 인간은 대체로 실망스러운 존재니까. 데이터를 기반으로 내가 쌓아올린 그녀에 대한 환상은 아늑한 거실과는 달리 정리가 안된 지저분한 옷장을 보며 금이 가기 시작할수도. 창가에 늘어선 식물들이 마를 때 까지 친구들과 밤을 새 술을 먹는 사람일지도 모르지. 스토리에는 <데몰리션> 사운드트랙을 올리고, 실상은 빌보드 차트를 귀가 울리도록 시끄럽게 재생할지도. 책에서 본 그럴싸한 글들을 인터뷰에서 얘기하면서 화장실에 두고 온 지갑처럼 중요한 서류들을 자주 깜박해 회사 내 평판이 좋지 않은 사람일 수도 있다. 디자인 업계의 페이는 높지 않다. 어쩌면 조명이나 가방을 찔끔찔끔 사 모으느라 저금은 하나도 못 하는 상황은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깨어진 운명의 파편을 들고 이 카페에 홀로 다시 돌아와 마감 못한 기사를 완성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만약에, 그녀와 내가 관계를 시작한다는 가정 하에 말이다.


 그러다 메시지가 오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마감 30분 남은 거 알지? 이번에도 늦기만 해. 진지하게 면담 들어간다.] 편집장의 메시지였다. 노트북의 모니터에는 아직 두 번째 단락을 시작하지 못한 기사와 함께 로나 갤로우에 대한 수 개의 검색탭이 떠 있었다. 또 이런 식이군. 착각의 바다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현실에서 익사해버리는 일. 마감 앞에서는 이런 사람 관찰과 쓸데없는 착각까지 흥미진진하지만, 이제는 진짜 현실 속에서 살아남아야 할 때다. 그 순간, 대각선 방향의 테이블에 앉아있던 로나 갤로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다가왔다.


 혹시, *** 디자인 컴퍼니 출입하는 기자 아니예요? 론이랑 아는 사이죠? 제 회사 동료 거든요.


 확실히, 공통된 팔로워 중에 론이 있었다. 그는 마케팅 부서 소속으로 요즘 나와 함께 일하고 있다. 맞아요, 저도 론과 일해요. 하고 대답하자 로나가 명함을 건네며 말했다.


 얘기 많이 들었어요. 론이 저한테 소개시켜주고 싶다고 했었는데… 언제 셋이 커피 한 잔 할래요?


 나는 노트북 뚜껑을 닫았다. 쓰는 건 시작했으니 어떻게든 마감은 하겠지. 그리고 그녀에게 말했다.


 지금은 시간 어때요?


 우리의 끝이 어떻든, 시작할 수 있다면 일단은 그걸로 된 거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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