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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 May 11. 2022

05_고맙고 소중한, 나의 황금 원숭이

해피엔딩이 아닐지라도 - 시험관 고차수 난임에세이


■ 이전 글 <04_니가 지금 강아지 키울 때야?> 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아주 오래전에 한 친구가 시험관 시술을 했었다. 우리 둘 다 상대적으로 어린 나이였고, 그때는 결혼한 친구도 많지 않았을뿐더러 아이를 낳아 키우는 친구는 더더욱 많지 않았다. 친구는 아이가 생기지 않는 마음의 어려움과 난임 시술 중의 고민과 아픔 들을 나에게 몇 차례 털어놓았었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그 사실을 잘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부분 만나서 한 이야기들이 아니다. 하루하루의 고단이 쌓여 찌들 때로 찌든 사회 초년생의 퇴근길, 붐비는 전철에서 만원 버스 안에서 전화로 친구의 이야기를 들었었다. 집중하기가 힘든 상황이기도 했고, 아직 미혼이었던 나는 친구가 하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인공수정과 시험관의 차이도 잘 모르던 때이다. 어쨌든 친구가 여러 가지로 힘들어하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위로를 전하며 다독여주었던 것 같다. 이해도 못하면서 무슨 말로 어떻게 위로하고 다독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쩌면 실수를 했는지도 모른다. 오래전 난임에 대해 무지했을 때에는, 사람에 따라 시간이 조금 걸릴 수는 있겠지만 아이는 언젠가는 어떻게든 생기는 건 줄 알았다. 그때도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제발 생각으로만 끝났길, 그때 내가 친구에게 너무 조급해하지 말라며, 너 아직 어리지 않냐며, 때 되면 다 생길 거라며, 좀 내려놓으면 될 거라며, 마음을 편히 먹으라는 따위의 말을 제발 제발 지껄이지 않았기를 바란다.


내 코가 워낙 석자였던 때라, 하루의 고단함과 몇 시간 후 아침이 밝아오면 다시 찾아올 업무들에 대한 압박으로 늦은 밤 퇴근길 내 마음과 머릿속은 늘 여유가 없었다. 그 순간에는 최선을 다해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지만 내 메모리 안에 오래 저장되지 못하고 밀려져 나갔던 것 같다. 남편의 주재원 근무가 끝나 수년만에 귀국한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다. 난임 병원을 다니고 있다고 하니 내 일처럼 아파하며 걱정해준다. 그제야 친구가 시험관 시술로 어렵게 아이를 낳았던 것이 떠올랐다. 나란 인간 어쩜 이럴 수가 있을까. 삶이라는 게 결국 되게 나 중심으로 이기적으로 개인적으로 돌아간다. 살면서 보고 듣는 것이 그렇게 많아도 결국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 간직할 수 있는 것만 골라 내 기억을, 그리고 지식을 만들어간다.




엄마도 난임이라는 것이 마냥 다른 세상 이야기인 줄 알았던 것 같다. 아침에 하는 건강 TV 프로그램 등에서 아니면 종종 연예인들이 관찰 예능에 나와 얘기하는 시험관이니 인공수정이니 하는 내용들을 스치듯 보기도 했겠지만, 엄마 시절에는 그런 게 없었으니까, 난임이란 것은 마치 그냥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희귀병 정도로 생각하고 그런 게 있나 보다 하고 보고 넘겼던 거였다.  


하루는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소문난 한의원이 있는데 한약을 한 재 해 먹어보자고 한다. 옛날에는 그저 여자 몸이 차면 여자 몸이 허하면 애가 잘 안 들어선다고, 용한 한의원에 가서 한약 몇 재 지어먹으면 생기더라고, 다 그렇게 살았던 걸 나도 안다. 몸만 따뜻하게 만들어 다 잘 될 거면 그럼 매일 사우나에 가서 죽치고 앉아 있으면 애가 턱 생기려나. 그렇게 쉬울 거면 세상에 난임이니 불임이나 하는 말이 왜 있을까. 난임은 단순히 여자 몸이 허해서, 여자 몸이 차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다. 남성 요인도 허다하고, 굉장히 복합적인 요소들이 작용해서 생기는 문제이다.


시험관 시술을 이미 여러 차례 하고 있던 중이었다. 사람마다 전문가마다 의견이 분분하긴 하지만, 나는 시험관 시술 중 한약 복용을 겸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의견에 조금 더 동의해서 우선은 양방적인 난임 치료에만 집중을 하고 싶었다. 한약을 먹지 않겠다고 하니 엄마가 또 폭발을 했다. 너네는 대체 무슨 생각이냐고, 애 안 낳고 살 거냐고 계획이 없는 거냐고.


TV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난임에 대한 얘기들은 남의 얘기 같았으면서, 당시 유행하던 딩크니 욜로니 하는 신조어들은 신경 쓰이게 들렸나 보다. 나는 엄마한테 딩크로 살겠다고 말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엄마는 왜 우리가 요즘 젊은 사람들이 많이 한다는 그걸 선택한 거라고 혼자 그렇게 생각했을까. 엄마도 엄마에게 들리는 것 하나를 골라 그것을 엄마의 지식으로 삼고 단정 지었다.  




남편 손에 이끌려 주말에 친정에 갔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엄마가 날 안고 울었다. 그동안 그렇게 고생한 것도 모르고 힘든 것도 모르고 미안해서 어떡하냐고. 이제야 그동안 내가 했던 이런저런 말들이 퍼즐 조각처럼 맞춰지며 이해가 간다고 했다.


자초지종을 듣고 보니 그제야 여기저기서 했던 얘기들이 생각난다 했다. 어느 어느 집 딸도 오랫동안 고생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이제 생각해보니 난임 시술을 받고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이런 세상이 있다는 것만 알았지 실제로 이렇게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몰랐다 했다.


한 달전쯤 동생이 꿈을 꿨다고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고 한다. 태몽 같이 여겨지는 꿈을 꿨는데 왠지 지금 언니 뱃속에 아기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고 한다. 왜 그랬는지 그렇게 우리의 임신이 간절했던 엄마가 그 꿈을 새겨듣지 않고 그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며 흘려 들었다고 한다.

동생의 꿈속에서 내가 아주 작은 황금원숭이를 두 손에 올려 안고 있었다고 했다. 동생이 '언니 무슨 원숭이가 돌아다니지도 않고 말썽도 안 피우고 이렇게 얌전하고 착해?’ 라고 물었더니 내가 '이 원숭이 정말 어렵게 힘들게 구했어. 굉장히 귀한 거야'라고 했다고 한다. (다시 생각해봐도 꿈이 참 신기하고 신통하다. 정말 어렵게 힘들게 구한 것 맞으니까. 그래서 굉장히 귀한 것 맞으니까)


어떻게 생겼을지, 누굴 닮았을지, 성격은 어떨지 하루에도 수십 번을 상상하고 떠올렸었다. 동생의 꿈에 따르면 떠나간 아이는 참 얌전하고 순한 남자아이였나보다. 많이들 황금원숭이 꿈은 아들 꿈이라고들 했다.


유산 후 한 달이 지나 소파수술을 했다. 배출이 완전히 되지 않은 것들이 있어 제거를 하기 위함이었다. 소파수술을 하는 날 다른 가족에게 말을 하지 않고 남편과 둘이 다녀왔다. 한번 말을 하면 또 이런저런 상황들을 전달드려야 할 것 같아서 조용히 다녀오고 싶었다. 마취가 풀리고 나니 아랫배가 며칠 욱신거리며 아픈 느낌은 있었지만 크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이미 한 달 동안 몸도 어느 정도 추슬렀다고 생각했고, 떠나간 아기에 대한 애도도 충분히 하고 슬슬 일상생활로 돌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뭔가 다시 한 달 전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미역국도 이미 한 솥을 먹었는데 다시 좀 더 먹어야 하는 건가 싶고, 몸조리를 잘해야 한다고들 말하는데 뭘 어떻게 해야 몸조리인지, 언제쯤 어떻게 끝내야 하는 건가 싶었다.  

얼마 뒤 수술 경과를 보기 위해 병원을 다시 방문했다. 수술은 문제없이 잘 마무리되었다고 했다. 병원 진료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더운 날씨에 갑자기 중국 냉면이 당겼다. 친정 근처에 있는 중식당이 중국냉면을 참 잘했다. 남편이 어머님, 아버님께 연락드려서 같이 식사를 하자고 한다. 남편이 전화를 했고, 엄마 아빠도 좋다고 해서 식당에서 만났다.

얼마 전 소파수술을 했다고 했더니 엄마 아빠가 그럼 지금 컨디션은 괜찮은 거냐고 묻는다. 그리고 엄마가 잠시 생각하더니 혹시 소파수술을 한 날짜가 언제냐고 물었다. 지지난주 무슨 요일에 했다고 얘기했더니, 엄마가 '아, 그 꿈을 딱 그날 꾸었구나' 했다.


엄마가 꿈속에서 수영장인지 강인지 모를 큰 물가에 있었는데, 한 원숭이가 물 깊이 잠겨서 나오지를 않고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잠수를 하며 노나 싶었는데 너무 오랫동안 나오지를 않아서, 쟤 숨도 못 쉬는데 저러다 죽겠다고 건져내야 할 텐데 하다가 잠이 깼다고 한다.    


꽤 오랜 시간 가족에게 난임의 어려움을 말하지 못하고 혼자 겪어왔었다. 그 과정에 생긴 엄마와의 트러블들로 오래 마음이 아팠다. 꿈이란 것을 과학적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참 신기한 일이다. 나도 남편도 꾸지 않은 태몽이다. 우리의 아기는 동생과 엄마의 꿈속에 나타나 자기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내 주었다. 눈에 보이진 않았지만, 세상 밖으로 나오진 못했지만, 내가 존재했던 게 맞다고 온 가족에게 알려주었다. 그래서 나는 이 경험의 여정 중 가장 힘들었던 시간에 가족의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잠시였지만 나의 뱃속에 머물렀던 우리의 아기. 내가 수술하던 바로 그날 엄마의 꿈을 통해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이모, 이모부 나 이제 정말 가요'라고 말하고 싶었나 보다. 누군가는 아직 태동조차 느끼지 못할 때인데 뭐가 그렇게 임팩트가 있었냐 하기도 하겠지만, 이 티끌 같은 작은 생명이 내 영과 육에 미치고 간 영향력은 엄청났다. 그건 남편도 알지 못하는 나만의 경험. 그리고 이 티끌 같은 작은 생명에도 영이 있고 혼이 있다는 것을 정말 절실히 깨달았다.


유산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건너 방에 들어간 남편의 오열 소리를 들으며 애써 삼켰던 눈물이 다시 터져 나왔을 때, 하나님께서 내 안에 들려주셨던 약속하셨던 말씀이 있다. '내가 한 알의 밀알을 떨어뜨릴 때 절대로 허투루 떨어뜨리는 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더 자라지도 살지도 못했던 작디작은 네가 이렇게 잠시 왔다 간 목적, 그리고 너의 희생, 엄마가 평생 잊지 않고 기억할게. 이렇게 짧게 다녀가게 해서 지켜주지 못해서 너무 미안해. 그리고 아주 많이 고마워. 천국에서 꼭 다시 만나자. 그땐 우리 빛나는 황금원숭이, 우리 천사, 우리 아기 내 손으로 꼭 안아볼 수 있기를.



유산이 무슨 일인지 이해나 할는지 모르겠지만, 특별히 이모에게만 주는 거라고 하며 건네 준, 조카가 만든 네잎클로버



시험관 고차수이고, 난임을 겪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 가정의 오랜 노력과 소망이 어쩌면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아도 좋겠다는 위험한 생각을 합니다. 말이 씨가 된다고 하는데 진짜 그러면 어쩌려고 이제 글까지 써서 남기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난 수년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마음들을 정리해봅니다. 누구나 바라는 것이 있겠습니다. 그 모든 바람이 해피엔딩이 아닐진대, 인생의 섭리를 인정하며 나에게 이 경험이 왜 찾아왔을지 사유해봅니다. 비슷한 상황에 있는 누군가에겐 부디 공감과 위로를 드릴 수 있길 바랍니다. 연재를 하지만,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적다 보니 글의 시점이 과거와 현재를 넘나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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