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을 May 04. 2022

04_니가 지금 강아지 키울 때야?

해피엔딩이 아닐지라도 - 시험관 고차수 난임에세이


■ 이전 글 <03_왜 엄마 혼자 딸 가진 죄인처럼 그럴까> 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강아지를 한 마리 입양하게 되었다. 남편과 오랜 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강아지를 굉장히 좋아했다. 누구든지 매우 애정하여 마음의 기쁨과 안정이 되는 대상이라든지 상황이 있을 것이다. 나는 강아지가 그러했다. 발을 핥아 그루밍을 한다든지, 꼬리를 흔든다든지, 하품을 한다든지 하는 동물들 특유의 본능적인 모습을 보고 있을 때 그 행동이 너무 귀엽게 느껴지고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이 행복했다. 모든 동물을 집에 들여 키울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강아지는 데리고 살 수 있는 동물이라 그중 강아지를 제일 좋아했던 것 같다. 어릴 때부터 계속 강아지를 키웠다. 여러 사정으로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하고 다른 손길로 보내진 강아지들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가족 중에서 가장 마음의 상처가 크고 힘들어했던 건 항상 나였다. 유독 내가 그 이별의 아픔을 잘 이겨내지 못했다.


내가 스무 살쯤 암컷 말티즈 한 마리가 우리의 새로운 가족이 되었다. 우유는 15년을 함께 하고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우유가 숨이 넘어가고 있다는 엄마의 전화를 받고 남편과 서둘러 달려갔는데 이미 우유는 영원한 잠에 빠진 뒤였다. 다 표현할 수 없이 마음이 아프고 힘들었지만, 그래도 우유는 예전에 우리 집을 거쳐간 다른 강아지들과 달리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한 것 자체가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가는 모습까지 보고, 우리 가족의 손으로 보내 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우유가 떠난 뒤 한동안 엄마의 펫로스 증후군이 꽤 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유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것이 엄마였다. 나와 동생이 학교에 가고 아빠가 출근을 하고 나면 우유의 돌봄은 대부분 엄마 차지였다. 또 나와 동생이 미국에 있는 동안 우유는 온전히 엄마의 손길로 키워졌다. 우리가 결혼한 이후 역시 우유는 엄마의 돌봄을 받았다. 15년의 시간을 모두 온전히 우유와 교감을 한 것은 엄마였다.    


엄마 다음으로 우유가 잘 따랐던 사람이 나였다. 함께 하자고 데려와놓고 많은 시간을 같이 해주지 못한 것 같아 늘 너무 미안했다. 우유가 가고 난 뒤 미안함과 아쉬움에 나도 오랫동안 힘이 들었다.


시간이 좀 지나고 어느 날 남편이 툭 이야기를 꺼냈다. 돌아오는 내 생일에 강아지 한 마리 데려올까 하고.




결혼 전부터 늘 꿈꿨던 것이 있었다. 내가 이루게 될 새로운 가정에서도 강아지가 함께 하는 거였다. 반려동물이 있으면 집안 분위기가 달라진다. 별 것 아닌 일로 가족 간에 대화할 에피소드가 하나 더 늘어나고, 웃을 일이 많아진다. 우유가 우리 가족에게 주었던 추억이 그랬기 때문에, 결혼 후에도 그런 기쁨들을 쌓아나가고 싶었다.


이런 내 소망을 잘 알기도 했고, 우유가 떠난 뒤 마음이 허전해하는 걸 알았던 남편이 먼저 고민을 해 보고 건네준 제안이었다. 새로운 동네로 이사를 한 지 몇 달 되지 않았을 때였다. 남편의 이직으로 인한 이사였다. 이제 막 개발되고 있던 신도시라 살고 있는 아파트 말고 주변에 아무것도 없었다. 빵 하나를 사려고 해도 차를 타고 10여분 이상을 나가야 했다. 친구와의 약속이나 업무적 일정이 생겨서 서울로 가야 할 때는 40분마다 한 번씩 오는 광역버스를 이용하거나 고속철도를 탔다. 막차 끊기는 시간이 일러서 집에 오지 못할 뻔 한적도 있었다. 교통이 불편하다 보니 웬만해서는 서울 나갈 일을 만들지 않았다. 아는 사람 하나 없이 낯선 동네에서 홀로 지내는 것이 참 힘들었던 시기였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 함께해 줄 반려동물 한 마리라도 있으면 참 좋겠다 싶은 마음이 종종 들긴 했었다. 그러다가 또 한편으론 우유는 그래도 온 가족이 함께 돌봤던 강아지였는데, 지금 내 곁에 강아지가 있다면 나 혼자서 이 아이를 돌봐야 하는데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도 들었다. 또 우유가 떠난 지 몇 달 되지 않았던 때라 괜히 우유한테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오랜 소망이긴 했지만 한 생명을 최소 10년 이상을 책임져야 하는 일이다 보니 쉽게 결정을 하기가 힘들었다. 결정은 좀 더 천천히 하고 일단 알아만 보자 했다. 16년 전 우유를 연결해주었던 아주머니를 찾아갔다. 오랜만에 뵈었는데도 나를 기억하셨다. 우유가 떠났다고 하니 마음 아파하면서도 그래도 좋은 가족 만나서 건강히 오래 행복하게 잘 살다 간 것 같다고 하셨다.


마침 아주머니 집에서 두 달 전에 태어나 돌봄을 받고 있는 남매 둥이가 있었다. 수컷은 입양이 확정되었고, 암컷 한 마리가 아직 새로운 가족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그 아이를 만나보았는데 이제 갓 50일이 된 아기강아지가 아주 에너지가 넘치고 건강해 보였다. 어떤 강아지가 오게 될지, 오는 것은 맞을지 아직 정해진 게 하나도 없었지만, 혹시 새로운 식구가 우리 집에 오게 된다면 겨울에 우리 집에 오게 되었으니까 '겨울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자고 했었다. 그 아이를 보자마자 '네가 겨울이구나' 싶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계속 눈에 밟혔다. 마음에 결심을 하고 아주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다음 주에 데리러 가겠다고.


아기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우게 되었다고 먼저 동생에게 말을 했다. 동생네 부부 역시 동물을 매우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제부도 오랫동안 강아지를 키워왔고, 사돈댁에서는 지금도 계속 강아지를 돌보고 계신다. 동생 부부는 한국에 돌아온 뒤 유기견 센터를 한번 찾아갔는데, 아직 한국에서 적응해야 할 상황들도 많고, 조카도 어려서 강아지 입양은 좀 더 나중에 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강아지를 입양한다고 하니 이제 언니네 집에 가면 강아지를 볼 수 있게 되었다며 좋아했다.  


그리고, 엄마도 당연히 좋아할 줄 알았다. 우리 가족 중 강아지를 싫어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었다. 겨울이를 보면 오랜만에 보는 말랑한 아기 강아지의 발랄한 모습에 온 가족이 웃으며 기뻐할 줄 알았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철딱서니가 없어도 한참 없는 거 아니냐고. 그동안 하는 짓들이 다 마음에 들어서 가만히 있었는 줄 아느냐고. 할 말이 없어서 가만히 있었는 줄 아느냐고. 나이들이나 적냐고. 사돈은 또 뭐라고 생각하시겠냐고. 어른들 마음은 생각지도 않고 늬들 멋대로 행동한다고. 다음 주 모임이고 뭐고 다 접으라고. 당분간 보고 싶은 마음도 없다고.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엄마의 말들이 하나하나 내 심장에 꽂히는 독설이었다. 그리고 갑자기 엄청난 수치심들이 몰려왔다. 몸에 맞지도 않는 어린아이들이 타는 놀이기구에 억지로 몸을 구겨 넣어 타고 있는데 저 사람 지금 뭐 하는 거냐며 손가락질받는 기분이거나, 아이들이 먹는 막대사탕 같은 과자를 쪽쪽 빨아먹고 있는데 주변 사람들이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는듯한 그런 기분이었다. 그런 행동을 해 본 적도 없고 그런 상황에 처해본 적도 없는데 그런 기분이 들었다. 다 큰 어른이 해서는 안될 짓을 하다가 들켜 큰 창피를 당하고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나는 늘 신중하려고 노력하고 애쓰는데, 엄마는 이따금씩 나를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는 철없는 아이로 취급한다. 자괴감이 들었다.  


난임과 병원을 다니기 시작한 지 3개월쯤 되었던 때였다. 우리 부부는 생각지 못한 진단에 한동안 마음의 여유나 평안이 전혀 없었다. 다음 주는 엄마 생일이었고, 엄마 생일을 맞아 동생네 부부까지 모두 모여 가족모임을 하려던 계획이 있었다. 가족들이 모이면 난임 치료를 받게 된 것에 대해 말하고 도움과 배려를 부탁하는 것이 좋을까, 아닐까 고민을 했었다. 정신이 없고 충격이 조금 컸기 때문에 이런 상황을 주변에 어떻게 말해야 할지 떠오르지도 않고, 말을 떠나서 생각 자체가 두서가 없었다.


나는 엄마에게 단 한 번도 우리가 딩크로 살기를 원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런데 엄마는 왜 우리가 아이 없이 강아지를 키우며 살 거라고 혼자만의 가정을 확신한 걸까.


시험관 시술 7회 차에 우리에게 첫 아이가 찾아왔다. 임신테스트기에서 처음 두 줄을 보았을 때의 기쁨과 감격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또, 이제는 가족들이나 지인들에게 그동안 우리 상황이 이랬노라고 다 말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니 가슴속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처음 수치나 상황들이 모두 안정적이어서 아기가 건강하게 찾아와 주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들이 벌어졌고, 결국 아이는 떠나갔다.  


저녁부터 자정을 넘긴 새벽까지 꼬박 응급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집에 돌아왔다. 출혈이 심했고, 당분간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고, 수술 날짜를 잡았다. 남편이 이제는 내가 심적으로나 직접적인 손길로나 누군가의 도움이 정말로 필요하다고 했다. 싫다고 여러 차례 얘기했지만 남편은 강권했고, 혼자 퇴근길에 엄마 집에 들러 그간의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아빠는 매우 걱정했고, 엄마는 오열을 할 정도로 울었다고 했다. 남편이 주말에 함께 엄마 집에 가자고 했다.



■ 다음 글 <05_고맙고 소중한, 나의 황금 원숭이>로 내용이 이어집니다.



시험관 고차수이고, 난임을 겪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 가정의 오랜 노력과 소망이 어쩌면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아도 좋겠다는 위험한 생각을 합니다. 말이 씨가 된다고 하는데 진짜 그러면 어쩌려고 이제 글까지 써서 남기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난 수년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마음들을 정리해봅니다. 누구나 바라는 것이 있겠습니다. 그 모든 바람이 해피엔딩이 아닐진대, 인생의 섭리를 인정하며 나에게 이 경험이 왜 찾아왔을지 사유해봅니다. 비슷한 상황에 있는 누군가에겐 부디 공감과 위로를 드릴 수 있길 바랍니다. 연재를 하지만,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적다 보니 글의 시점이 과거와 현재를 넘나 듭니다.
이전 04화 03_왜 엄마 혼자 딸 가진 죄인처럼 그럴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