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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 Apr 27. 2022

03_왜 엄마 혼자 딸 가진 죄인처럼 그럴까

해피엔딩이 아닐지라도 - 시험관 고차수 난임에세이


엄마는 당신의 그림대로 딸들의 인생이 굴러가야 안심이 되는 분이었다. 혼기(엄마의 기준에) 찼는데 아직 결혼을 하고 있지 않은  딸들을 보며 조급해했다.   교제한    남자친구들이 있는데 다음 단계에 대한 진척이 없으니 더욱 그랬던  같다. 결혼할  아니면 헤어지든가, 아니면 빨리 결혼을 하기를 원했다. 그러다 어느  엄마는 덜컥 예식장 하나를 예약하고 왔다. 아무래도 어떻게 해서든지 올해 안에  놈이라도 보내야겠다고 결심이 섰는데, 일단 알아나 볼까 싶어서 예식장  군데 전화를  보았더니 이미 좋은 계절의 좋은 날짜는   남지 않았던 거였다. 취소할  하더라도 우선 하나라도 붙들어 놓아야겠다 싶어 예약금을 걸었다 했다. 바로 엄마의 선포가 이어졌다. 이러저러해서 예식장을 예약했으니,   아무라도  날짜에 결혼해.


동생이 먼저 결혼을 했다. 나는 몇 가지 이유와 사정으로 결별을 택했고, 다시 내 일상을 돌보고 정리하고 적응하기 바빴다. 한국 나이 갓 서른으로 사회생활에서는 한창 바쁜 연차였다. 당분간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엄마는 그래도 순서가 있지 내가 먼저 결혼을 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엄마에겐 동생의 결혼도 나쁘지 않은 세컨베스트였던 것 같다. 친구분들과 모이셨을 때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기를, '역시 애들 결혼에는 어른이 나서야 뭔가 진행이 된다'며 아주 잘 치러낸 인생의 큰 이벤트라고 생각하셨다.  


동생이 결혼하고 1년쯤 지났을까. 엄마가 동생과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의 언성이 높았다. 타국에 있어 늘 애틋하기만 했지 큰 소리 낼 일이 딱히 없었는데 무슨 일인가 했다. 통화의 앞부분은 이미 놓쳤고, 지금부터라도 들어보자 싶어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처음 들린 말이 '너 피임약 그렇게 오래 먹으면 안 돼'였다.


동생 부부는 다른 나라에서 공부하다 만나 연애를 했고 잠시 들어와 결혼을 해서 다시 출국을 했다. 동생은 결혼 후, 하던 공부를 잠시 쉬고 있었다. 엄마는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면서, 애도 안 갖고, 도대체 사돈집에서 보시면 뭐라고 생각하시겠냐' 등등의 잔소리 시전을 하고 있던 거였다.


나를 향한 잔소리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마 100개를 먹은 듯하게 속이 답답해져 왔다. 대체 동생이 아기를 갖지 않는 것에 대해 왜 엄마가 사돈 눈치를 봐야 하는가. 옛날에는 다 그랬으니까, 지금 어른들도 의례히 그런 거라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돈댁에서 눈치를 주시지도 않았지만 눈치를 주었다고 하더라도 그 눈치를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히려 그랬다고 하면 엄마는 딸 편이 되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엄마 혼자 딸 가진 죄인처럼 구는가. 딸을 향한 당신의 그림에 지금쯤 되면 손주가 생겨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보니 또 조급해진 것이다. 설사 동생네 부부가 평생 아이를 낳지 않는다고 결정을 하더라도 그건 이미 결혼해서 독립해 가정을 이룬 그 성인 두 사람이 알아서 만들어 갈 그들의 인생 계획이다.


또 타국에서 유학생 신분의 박사과정 남편을 뒷바라지한다는 것은 한국에서 새댁이 전업주부로 아기자기하게 살림하는 것과는 굉장히 다른 차원이다. 아주 터프하고 마음고생이 심한 여정이다. 동생은 아직 어리고 젊었다. 지금 당장 임신을 계획하기에 마음이 버거웠을 수 있다. 난 오히려 동생이 언젠가 그곳에서 임신, 출산, 육아를 하게 될 생각을 하면 안쓰럽기도 했다. 그곳에는 산후조리나 육아를 도와줄 수 있는 환경이 한국처럼 잘 되어있지 않다. 오롯이 산모, 엄마 혼자 감내해야 한다.     


(그리고 이건 다른 이야기이지만, 피임약 '그렇게 오래 먹어도' 된다.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이 직접 해주신 말씀이다. 나도 시험관 진행하면서 피임약을 계속 먹었다. 과배란을 자주 하는 사람들은 중간중간 난소를 쉬게 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도 호르몬제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피임약 부작용에 힘이 들었는데 나에게 맞는 피임약을 찾고 나서는 부작용이 거의 없어졌다. 잘 맞는 피임약을 찾고 나서부터는 오히려 컨디션이 더 좋아지기도 했다. 피임약은 해로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성 건강에 도움이 된다. 배란을 막아주니 여성호르몬에 노출되는 시간이 줄어들어, 여러 가지 여성 질병이 발생될 확률을 줄여주기 때문이다. 산부인과에서는 피임약으로 굉장히 많은 종류의 치료를 한다.)




내가 결혼을 하니 엄마는 또 나를 향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동생보다 늦은 결혼이라 엄마는 마음이 급했다.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친정에서 첫 식사를 하는데 내가 이것저것 잘 먹는 모습을 보며 엄마가 갑자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혹시 좋은 일 있는 거 아니니?'


엄마 기준에 나는 평소 입이 짧고 밥을 잘 먹는 편이 아니었다. 엄마는 내가 먹는 것이 시원치 않아 살도 잘 찌지 않고 비실비실하다고 늘 걱정을 했는데, 그날따라 내가 복스럽게 밥을 잘 먹는 모습을 보고 평소 나와는 다르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허니문 베이비가 생긴 건 아닐까 하는.


신혼여행 다녀오는데 10일 걸렸다. 좋은 일이 생겼다고 하더라도 아직 뭔가 반응이 나타날 시기도 아니다. 엄마 제발 그만 좀 해, 하는 눈빛을 보냈다. 엄마는 아님 말고, 하는 표정을 짓는다. 들은 사람은 단순히 '아님 말고'가 아니다. 툭 던진 말에 맞아 가슴이 너무나 답답해진다.


전셋집에서 신혼을 시작했다. 당장 집을 살 엄두는 나지 않고, 아파트 청약을 최대한 노려보려고 했다. 부동산에 관해 워낙 무지했던지라 아무리 이것저것 살펴보아도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지도 못했다.


첫 청약에 도전해보려는데 마지막으로 엄마에게 조언을 구했다. 내 이야기를 듣고 엄마도 나름 열심히 알아보시고 전화를 주셨다. '엄마가 알아보니 일단 괜찮은 것 같아. 너희는 신혼특별공급으로 넣어보면 좋을 것 같고. 자녀가 있으면 조금 더 우선순위가 된다던데, 신청하는 시점에 어쨌든 뱃속에만 있으면 인정된다고 하더라. 그럴 가능성은 없지?'


어떻게 하면 질문을 이런 식으로 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언젠가부터 엄마는 어떤 상황에서든 기승전'임신' 이다. 또 대화가 그쪽으로 흘러갈까봐 이제는 무슨 얘기든 시작하는 것이 무섭다. 엄마 뱃속에서 나왔는데 나와 엄마는 정말 너무나 다르다. 설사 지금 뱃속에 내가 아기가 있었다고 하면 그 임신 사실을 엄마한테 말을 하지 않았을까? 혹시라도 아직 안정기가 아니라서 말을 안 했을 수 있으니, 한번 떠보기라도 한 건가? 둘 다 아니라면, 이런 식으로라도 어떤 거룩하고 타당한 부담(내 집 마련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신혼부부에게, 아이가 있으면 그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다는)을 안겨주면 혹시 좀 더 노력하지 않을까 싶어, 청약 정보를 건네면서 슬쩍 숟가락을 얹어보는. 이 또한 엄마의 큰 그림 중 하나였을 수 있다.




난임 치료를 결정하고 병원을 다니면서도 한동안 엄마에게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었다. 그 과정에서 엄마와 겪게되는 이런저런 오죽 많은 일들이 있지 않을까, 불 보듯 뻔하여서. 그런데 그 과정이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다. 병원을 다니면서 만나 사귀게 된 사람들이 많다. 엄마의 케어를 받으며 이 과정을 진행하는 친구들은 나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엄마가 해 주는 좋은 음식들을 챙겨 먹고, 채취나 이식 후에는 친정에 가서 편히 쉬다 오기도 했다. 가장 부러운 것은 심적인 케어를 받는 것이었다. 고생을 하는 딸을 안쓰럽게보며, 이제는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너희 둘이 행복하게 살면 되지 너무 애쓰지 말라며 다독이며 위로를 받는 것이었다. 나도 엄마에게 진작에 말을 했으면 이런 관심과 돌봄을 받으며 이 과정을 진행할 수 있었을까. 그러면 좀 덜 힘들고 덜 외로웠을까, 아니면, 더 힘들었을까. 엄마에 대한 나의 스테레오 타입은 전자 쪽을 상상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좀 외롭더라도 더 힘들어질 가능성을 택하기보다 혼자 헤쳐나가보자 싶었다.


그 과정에 엄마와 냉전을 하게 만든 사건도 생겨버렸다. 엄마에게 모든 것을 말하기까지 일 년 반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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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관 고차수이고, 난임을 겪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 가정의 오랜 노력과 소망이 어쩌면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아도 좋겠다는 위험한 생각을 합니다. 말이 씨가 된다고 하는데 진짜 그러면 어쩌려고 이제 글까지 써서 남기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난 수년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마음들을 정리해봅니다. 누구나 바라는 것이 있겠습니다. 그 모든 바람이 해피엔딩이 아닐진대, 인생의 섭리를 인정하며 나에게 이 경험이 왜 찾아왔을지 사유해봅니다. 비슷한 상황에 있는 누군가에겐 부디 공감과 위로를 드릴 수 있길 바랍니다. 연재를 하지만,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적다 보니 글의 시점이 과거와 현재를 넘나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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