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엔딩이 아닐지라도 - 시험관 고차수 난임에세이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 마가복음 10:51~52 (개역개정)
어려움의 시간이 길어지면 내가 처음에 진짜 원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내가 꿈꿨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그 첫 소망이 가물가물하게 흐려진다. 예수님이 당장 내 눈앞에 나타나 '내가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신다면 나는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동안 들인 시간과 노력, 그리고 돈을 생각하면 '아이를 갖게 해 주세요'라는 대답이 바로 나와야 맞을진대, 이 질문 앞에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것 같다.
소망이 가물가물해지니, 그 소망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품었던 시간이 참 행복했었던 것이구나 싶다. 그러니 그 힘든 과정을 견뎌왔던 거겠지. 분명 쉽지 않았던 순간들이었는데, 힘든 게 힘든 것인 줄도 몰랐었던 때가 있었다. 아직 꿈이 있다면, 소망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깨닫는다. 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을 때만 힘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마음에 무언가를 쥐려고 해도 힘이 필요하다. 기대를 잃지 않고 소망을 놓지 않고 오래 품고 있는 것도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다. 그 힘이 달린다면 놓아버리는 것이, 포기가 때론 더 쉬운 길일 수도 있다. 내가 요즘 그 힘이 달린다. 그래서 그 기분이 무언지 너무나 잘 알 것 같다. 그런데 그 맹인은 그 오랜 세월 그것을 놓지 않고 지키느라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마음의 긴장을 풀지 않고, 그 힘을 빼지 않고 계속 쥐고 있었던 것이다.
아닌가. 내가 보지 못한다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아주 많이 불편하고 답답할 것 같다. 눈을 뜨고 싶다는 그 소망을 과연 잃을 수 있을까. 소망을 잃지 않기 위해 없던 힘도 짜내어보지만, 어쩌면 그렇게라도 솟는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무기력증에 사는 것이 더더 힘들지도. 힘이라는 건 꼭 밥에서 비롯되는 것만은 아니더라. 어쩌면 힘의 원천은 생각보다 원초적이지 않은 곳에서 더 많이 생긴다.
난임이 죽을병은 아니다. 임신하는 것에 어려움이 있을 뿐, 일상생활을 하는데 불편함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난임 치료를 시작하고 난 뒤 약 부작용으로 인한 고통이 더 괴롭다). 죽고 사는 문제까지는 아니다 보니 나의 소망에는 그 정도의 간절함이 없는 것일까. 처음부터 간절함이 있긴 했던가. 이제는 그것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 또 가만 생각해보면, 나는 어렸을 때부터 늘 그랬다. 마음 가운데 원하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나 드러내 놓고 그것을 마음껏 표현하거나, 무엇이 갖고 싶다고 부모님을 크게 졸라본 적이 없었다. 그런 성격이 나의 기도, 간구에도 계속 드러난다. 이 상황뿐 아니라, 다른 문제 앞에서도 나는 하나님 앞에 무언가를 마음껏 졸라본 적이 많지 않다.
남편이 얼마 전에 그런 이야기를 한다. 이제는 아기를 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고. 그저 내가 너무 고생하지 않기를, 아프지 않고 건강하길, 하나님 뜻하시는 대로 이끌어주시길 기도한다고. 이제는 우리 둘 다 끈질기게 조르지 않아서 하나님은 결국 우리 가정의 소망을 외면하시는 건가.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친구라는 이유만으로는 그가 일어나 빵을 갖다 주지 않을지라도, 끈질기게 졸라 대는 것 때문에는 일어나 필요한 만큼 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 누가복음 11:8~9 (우리말성경)
평생 뭘 졸라보며 산 적이 없는데 내게 이런 말씀은 쉽게 묵상, 적용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에 누군가 나에게 한밤중에 찾아와 끈질기게 졸라댄다면 귀찮아서라도 빵을 내어주긴 할 것 같다. 그런 상황을 생각하며 너도 그렇게 구해보라고 하신다. 쉽지 않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제 뭘 어떻게 구해야 할지 정말 잘 모르겠다. 그동안 나름 구하고 찾고 두드렸다고 했던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직 부족하신가. '다른 간절한 가정들이 어떻게 구했는지 보아라, 너희는 아직 그 간절함이 부족하구나' 하시는 건가. 아무튼 이제는 많이 힘에 부친다. 끈질기게 조를 힘이나 의지도 남아있는 것 같지 않다.
거기에 38년 동안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가 거기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그가 이미 오랫동안 앓아 온 것을 아시고 물으셨습니다. “네 병이 낫기를 원하느냐?" 환자가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물이 움직일 때 못에 들어가도록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나보다 먼저 물속에 들어갑니다.” - 요한복음 5:6~7 (우리말성경)
그나마 맹인보다는 이 중풍병자의 케이스에 나는 조금 더 공감이 간다. 예수님께서 '네 병이 낫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그는 네, 아니오로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설명이 장황하다. 38년을 앓아온 분 앞에 어디 명함도 내밀지 못할 연수이지만, 지나온 시간 앞에 그 무기력함이 어느 정도 일지 나는 감히 공감하고 상상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지금 나에게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물으신다면, 나는 과연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거기에 시험관을 15차까지나 진행했지만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가 거기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또 그가 이미 오랫동안 힘들고 아팠던 것을 아시고 물으셨습니다. "아이를 갖기를 원하느냐?" 그가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지금껏 병원비로 수천만 원의 돈을 썼습니다. 그런데 얻은 게 하나도 없어요. 어렵게 아이가 찾아왔었지만 금방 또 떠나버렸어요. 건강했던 몸과 컨디션이 온갖 시술과 수술과 약기운으로 다 망가지기까지 했어요. 병원도 옮겨보고 좋다는 것은 다 먹어봤는데 소용이 없어요. 저와 비슷한 상황에 있던 사람들은 같이 고생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다 졸업해서 지금은 아기 낳고 행복하게 잘 살아요. 저만 제자리예요."
나도 네, 아니오로 명확히 말하지 못하고 동문서답을 한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거라.” 그러자 그가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 요한복음 5:8~9 (우리말성경)
장황한 동문서답까지는 중풍병자도 나와 비슷한데, 그는 갑자기 예수님의 선포 앞에 결단하고 일어나 걸어간다. 그의 결단이 부럽다. 일어나는 것까지는 해보겠는데, 사실 난 어디로 어떻게 걸어가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거라' 하는 주님의 말씀 앞에 나는 또다시 장황하게 자기 연민에 빠져 신세한탄을 한다.
주님, 저는 그냥 이 지겨운 것들이 이제는 끝이 났으면 좋겠어요. 이런 컨디션과 체력으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요. 저 예전엔 이렇지 않았잖아요. 뛰어다니고 싶고 날아다니고 싶어요. 생각의 흐름이 건강하게 흘러갔으면 좋겠어요. 약에 취해 호르몬에 취해 삶의 질이 뚝뚝 떨어지는 이런 무기력증, 온갖 부작용들 정말 지긋지긋해요.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예수님의 질문 앞에, 간단하게 '우리 가정에 아이를 허락해주세요'라고 말하면 이 모든 것이 끝날 문제이려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아이를 갖게 되어 예수께 영광을 돌리니라' 과연 이렇게 되려나. 지금 이 순간 그 한 줄의 간구가 나에겐 왜 그렇게 쉽지 않은지. 그분이 생명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이라는 믿음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생명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이 나에게 그 생명을 허락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없는 것인지. 모르겠다. 요즘은 그저 몸이 많이 지치고 힘이 든다. 진짜 환자가 된 것 같은 기분도 든다. 몸의 컨디션이 마음과 정신의 컨디션까지 지배한다. 몸이 힘든 것보다 더 힘든 것은 마음이 무기력해지고 힘들어지는 것이다. 처음 소망이 무엇이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이 약 기운들이 빨리 다 빠지고 컨디션이 좀 회복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뿐.
어디까지가 기도였을까. 차마 올려드리지 못하고 나 혼자 구시렁대다가 끝났을지도 모를. 어느 날의 말도 안 되는 묵상과 기도.
시험관 고차수이고, 난임을 겪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 가정의 오랜 노력과 소망이 어쩌면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아도 좋겠다는 위험한 생각을 합니다. 말이 씨가 된다고 하는데 진짜 그러면 어쩌려고 이제 글까지 써서 남기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난 수년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마음들을 정리해봅니다. 누구나 바라는 것이 있겠습니다. 그 모든 바람이 해피엔딩이 아닐진대, 인생의 섭리를 인정하며 나에게 이 경험이 왜 찾아왔을지 사유해봅니다. 비슷한 상황에 있는 누군가에겐 부디 공감과 위로를 드릴 수 있길 바랍니다. 연재를 하지만,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적다 보니 글의 시점이 과거와 현재를 넘나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