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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 Apr 21. 2022

01_라면 따위가 뭔데

해피엔딩이 아닐지라도 - 시험관 고차수 난임에세이 


찬바람이 돌기 시작하니 따뜻하고 감칠맛 있는 국물 생각이 간절하다. 그런데 그 국물 안에 담긴 것이 밥인지 면인지에 따라 내 혀를 거쳐 미각이 되어 뇌까지 전달되는 그 느낌은 사뭇 다르다. 국밥 말고 msg 특유의 감칠맛이 뛰어난 라면. 속이 더부룩해지고, 먹은 후 그다지 포만감도 없어 뒤돌아서서 후회할지언정, 정제된 탄수화물, 그것이 나에게 주는 행복감이 참 간절한 순간이 있다.


그런데 이게 뭐라고, 마주할 때마다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른 듯한 마음이 든다. 아니, 이런 음식이 난임 환자의 집 팬트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생각을 품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죄책감이 들 때가 있다. 성경의 교훈에 생각으로라도 죄를 짓는 것을 경계하라고 하셨는데, ‘라면아 사탄아 물러가라’ 고라도 해야 하는 상황인가.


일전에 한 친구에게 전화가 왔는데 '밥 먹었' 냐며 인사를 건네왔다. '응, 라면 하나 끓여먹었어~'라고 했더니, '너 지금 라면을 먹으면 어떡해. 거기서 환경호르몬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데'라고 했다. 라면이, 밀가루가, 환경호르몬이 얼마나 난임에 좋지 않은 것인지 알면서 너 같은 상황에 놓인 아이가 지금 그걸 어떻게 먹냐, 제정신이냐는 소리였다.


저차수 때야 나도 좋다는 것만 골라먹고 나쁘다는 것은 쳐다도 보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성공 후기에도 종종 온갖 식단과 관련된 간증들이 쏟아진다. 철저히 지중해식을 하고 인스턴트는 일절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 당신은 얼마나 의지가 있어서 그렇게 클린하고 모범적으로 살았는지 모르겠지만, 난 의지박약이라 이제 더 이상 못해먹겠다. '라떼는 말이야' 이런 유치한 변명 하고 싶지 않은데, 나도 첫 1-2년은 정말 착한 난임 환자였어. 내 혀가, 내 미각이, 내 후각이 라면의 맛과 향을 기억하는 한, 한국사람이라면 그 생각이 살면서 과연 진정 한 번도 안 날 수 있어? 함부로 정죄하지 말아 줄래. 그렇게 똑똑하고 성실한 당신, 죽을 때까지 평생 한 번도 안 그럴 수 있나 어디 보자.


술 담배를 일절 안 하는 남편이지만 아직도 어린아이처럼 과자나 쵸코렛을 좋아한다. 뭐든 잘 될 것 같고 잘할 수 있을 것 같던 아직 마음속에 꿈과 희망이 가득하던 저차수 시절, 클린한 음식을 골라 먹고 좋다는 영양제를 챙겨 먹으며 우리 부부는 참 열심히 살았다. 그러다 슬슬 중차수(?)에 접어들며 종종 나는 다시 커피에, 남편은 다시 콜라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서로의 모습을 보며 '당신은 그것 하나 좀 참을 수 없냐'며 나무라고 질책하다가 서로의 마음에 생채기가 났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아니 그 커피 한 잔, 콜라 한 잔 따위가 뭔데. 누구는 평생 그렇게 골초에 알코올 중독처럼 사는데 애만 여럿 잘 낳고 살더라.


지금도 남편이 주말 오후 팬트리에서 스낵 과자 한 봉지를 꺼낼 때면 나도 모르게 움찔 하지만, 이 한 봉지에 당신의 지난 한 주의 고단이 풀리고, 마음에 만족이 행복이 깃든다면 그걸로 된 거지 싶어, 다만 흘리지 말라며 쟁반 하나를 더 챙겨준다.


오늘은 호르몬이 요동치는 시기라 그런지 거짓된 배고픔이 자꾸 유혹을 해 온다. 호르몬제의 후유증. 어제까지는 그렇게 속이 울렁거려 아무것도 먹기가 힘들더니, 오늘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진한 탄수화물이 당긴다. 남편에게 컵라면이 먹고 싶다고 했더니 두말 않고(이것이 고차수 부부의 전우애) 편의점에 가서 사발면 하나를 사다 준다. 주방에서 잠시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제 먹으러 나오라는 소리에 방에서 나와보니 테이블 위는 이런 자태. 환경호르몬 최소화를 위한 그릇 세팅.


아니, 누가 컵라면을 이렇게 먹어. 이럴 거면 봉지라면을 먹지. 내가 컵라면이 먹고 싶다고 한 건 이 감성이 아닌데. 이러면 그 맛이 그 맛이 아니지 않나. 컵라면은 자고로 컵라면 용기에 담겨진 채 먹어야 제맛인 거잖아..


감성은 다르지만 그래도 한 젓가락 집어 입을 대어보니 내가 생각했던 그 맛이긴 하다. 다만 한껏 데워진 사기그릇이라, 면이 불기 전에 얼른 먹어야지 싶다.


그래도 고마워. 내 편, 내 사랑. 힘든 시절을 거쳤지만, 그래도 당신이 있어 함께 견뎠고, 지금도 견디고 있다. 당신도 그래 줘서 또 고마워.


후식으로 바나나킥까지. 제대로 일탈하는 날



시험관 고차수이고, 난임을 겪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 가정의 오랜 노력과 소망이 어쩌면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아도 좋겠다는 위험한 생각을 합니다. 말이 씨가 된다고 하는데 진짜 그러면 어쩌려고 이제 글까지 써서 남기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난 수년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마음들을 정리해봅니다. 누구나 바라는 것이 있겠습니다. 그 모든 바람이 해피엔딩이 아닐진대, 인생의 섭리를 인정하며 나에게 이 경험이 왜 찾아왔을지 사유해봅니다. 비슷한 상황에 있는 누군가에겐 부디 공감과 위로를 드릴 수 있길 바랍니다. 연재를 하지만,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적다 보니 글의 시점이 과거와 현재를 넘나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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