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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 May 17. 2022

06_그 부부가 싸운 이유를 알 것 같아서

해피엔딩이 아닐지라도 - 시험관 고차수 난임에세이


진료를 마치고 간호상담실에 앉아 다음 진료 일정 등에 대한 안내를 받고 있던 중이었다. 갑자기 밖에서 누군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남자의 목소리였고, 굉장히 화를 내는 것 같았다. 간호선생님이 무슨 일인가 싶어 밖으로 나가보시는데 나도 뒤따라 가보았다. 다른 방에 있던 사람들도 놀랐는지 다들 웅성이며 밖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한 여자가 의자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있었고, 남자는 서서 여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부부인 것 같았다. 남자는 주변 사람들이 쳐다보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계속 소리를 질렀다.


"아, 그만 좀 하라고 좀! 집어치우라고!"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소란이 너무 커서 그냥 너무 명확하게 들렸다. 몇 마디 들어보니 대충 무슨 상황인지 짐작이 갔다. 참 마음이 좀, 그랬다.  




난임 부부들이 싸우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부부 중 어느 한쪽이 난임 치료와 시술을 원치 않거나, 아니면 돈 문제이다. 난임을 겪고 병원을 다니게 되면서 언니동생 하며 친구가 된 사람들이 많다. 그 친구들과 단체채팅방을 만들어 소통하면서 정보도 교환하고 안부도 물어가며 지내고 있는데,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어서 그런지 힘이 참 많이 된다.


경험적 통계(?)에 의하면 난임을 오래 겪은 부부들은 대부분 금실이 매우 좋다. 이렇게 애틋하고 아껴주고 사랑하는데 왜 이런 부부들에게 아기를 주지 않으실까 하늘이 참 원망스럽고 이해가 가지 않는다. 원래부터 금실이 좋았었던 것일 수도 있지만, 이 고난의 과정을 함께 겪어 나가다 보면 어떻게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둘만 아는 끈끈한 전우애가 생기는데 이게 그들의 금실을 더 견고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그런데 이런 부부 사이에서도 최소 1번쯤은 다투고 지나가게 되거나, 싸움으로 이어지진 않더라도 속앓이를 하게 되는 이슈가 있는데 바로 돈이다. 일반적인 가정에서 감당하기 쉽지 않을 정도의 비용이 계속 들기 때문이다. 지금은 예전보다 건강보험을 통해서 지원받는 횟수나 금액이 조금 늘긴 했지만 내가 처음 시험관 시술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아무리 보험이 적용이 된다고 해도 1회 차의 시술당 "최소" 150-200만 원 정도의 비용이 들었다. 문제는 이 것이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임신이 될 때까지 이 비용을 계속 지불해야 하는데, 그 끝이 언제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난임 치료를 처음 시작했을 때 정부 지원으로 받을 수 있는 보험 적용 횟수는 총 4회까지였다. 처음에는 그 4회라는 횟수가 적지 않아 보였다. 네 번이나 도전할 건데 그 중 한 번은 되겠지 했다. 또 횟수도 횟수이지만, 내 기대감은 병원비에 비례하기도 했다. 이 나이까지 이렇다 할 명품백 하나 없으니, 평생 큰돈을 한 번에 써본 적이 거의 없다. 내가 일시불로 지불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큰돈의 단위는 십만 원 단위였다. 십 만원씩 열 번을 쓸 순 있어도 백만 원을 한 번에 쓰는 것은 나에게 굉장히 큰 일이었다. 그런데 백만 원 단위의 돈이 네 번 나갈 예정이라니, 가성비를 생각하면 그 돈을 투자한 결과는 아주 당연히 내게 주어져야만 했다.


내 생각과는 달리 네 번의 시술은 소득 없이 끝이 났고, 결국 나는 모든 지원 횟수를 다 사용하게 되었다. 이제 앞으로 보험 적용이 되지 않으면 1 회차당 500만 원 이상의 비용이 들어가는데 그 비용을 들여가며 시술을 더 진행할 자신이 도저히 없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그즈음 정책이 변경되어 난임시술에 대한 보험 적용 횟수가 3회 더 늘어 7회 차까지 늘어났다. 지원 금액은 1~4회 차보다 적었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되는 지원이었다. 하지만 이미 내 기준에서는 그동안 큰 지출을 감당해왔는데, 앞으로 지금 해온 것보다 더 큰 지출을 몇 번 더 하는 것이 맞을지 고민이 되었다. 마음속에서는 비용에 대한 문제만 아니라면 조금 더 도전을 해보고 싶었다. 첫 시작이 어려웠지, 한 번 시작하고 나니 이 과정을 멈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몸이 힘들고 컨디션은 계속 난조였지만, 그래도 조금만 더 힘내면 좋은 결과가 찾아와 줄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여기까지 온 것이 아깝기도 했다. 아직 고지에 이르지 않았는데 포기하는 것은 아닐지, 정상을 밟지 못하고 내려간 것에 나중에 후회가 남으면 어쩌지 싶었다.


이런 내 고민의 과정에 매번 결단을 내려준 것은 남편이었다.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평생의 시간 가운데 지금 쓰는 이 몇 백만 원의 돈은 별 거 아니라고, 앞으로 그래 봤자 뭐 한 천만 원 정도 더 쓸 텐데 (이때만 해도 우리의 여정이 어떻게 흘러가고 얼마나 더 남았을지 아주 잘못짚었던, 선견지명이 참 없었던 남편의 발언이다) 당장 우리 그 천만 원 없어도 안 죽는다며 써야 할 돈은 근심하지 말고 쓰자고 했다.


이런 남편의 말이 너무 든든하긴 했지만, 전체적인 집안의 경제 흐름을 살피고 있는 것은 나였다. 우리가 돈을 쌓아놓고 쓰는 것도 아닌데 통장 잔고 사정을 알고나 하는 소리려나. 정 안되면 빚을 내서라도 할 건 해야 한다는 남편의 지론에 못 이기는 척 따라갔지만, 지나고 생각해보니 내심 나는 남편이 그렇게 말해주길 바라기도 했던 것 같다. 그 당시 나는 정말 내려놓아지지가 않았다.


보험 적용이 거의 되지 않았던 더 오래전에는 시험관 시술을 통해 잉태된 아이들의 태명이 일억이, 이억이였다는 우스갯소리 같은 말(하지만 농담이 아니고 진담인)을 들었었다. 아무리 아이가 간절하다지만 그 말도 안 되는 돈을 들여 임신을 했다니 솔직히 믿어지지도 않았고 이해하기가 힘들었던 시절이 나도 있었다. 그런데 눈 깜짝할 사이에 그 우스갯소리는 나의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7회 차의 보험 횟수가 다 끝나고 나니 그때부터 청구되는 병원비는 상상을 초월했다. 8회 차부터는 PGS라는 유전자 검사도 진행을 했기 때문에 검사가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비급여 항목의 주사와 약들이 처방이 될 때마다 몇 십만 원의 금액이 우습게 추가가 되었다. 연말정산 시즌이 되어 서류를 뗄 떼면 우리가 이 많은 돈을 쓴 것이 정말 맞는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아이를 키우고 있는 친구들이 자녀를 영어 유치원을 보내는 것에 대해, 사립 초등학교를 보내는 것에 대해 고민을 해보고 예산도 따져보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육아 경험이 없는 나는 아이를 키우는 데, 아이를 교육하는데 그렇게 많은 돈이 들어가는 건지 몰라서, 또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지도 잘 몰라서 깜짝 놀랐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동안 우리가 쓴 돈이면 아이 영어유치원은 보내고도 남고, 사립 초등학교도 충분히 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요즘은 우리 빼고 다 수입차를 타고 다니던데, 저 비싼 차를 다들 어떻게 턱턱 사서 타고 다닐까 싶었던 적이 있다. 그 돈이면 우리도 수입차를 살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돈을, 예전에는 이렇게 쓸 수 있을 거라 상상할 수도 없던 액수의 돈을 우리는 썼고, 그 지불에 대해 우리가 얻은 결과는 0(Zero)이다.   




내가 여자다 보니 같은 여자 입장이 되는 건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그 아내분에게 사실 더 마음이 쓰인다. 그들은 그날 어떤 이유로 외래에 들렀던 것일까. 이식 후 첫 피검 날이었을까. 비임신인 것을 확인하고 다음 진료를 안내받았는데, 뭐 하러 또 오냐며, 이제는 다 그만 하자는 소리였을까. 보험 횟수를 다 소진한 부부이려나. 이제 다시 시작하려면 모든 것을 자비로 해야 하는데 재정상 도저히 더 해나갈 수 없는 상황일까. 아니면 과배란 중 중간점검을 왔을까. 아무리 호르몬을 투여해도 몇 주째 난포가 보이지 않고 있으려나. 이 상황에서 계속 진행을 해야겠냐고, 제발 좀 그만하자는 소리였을까. 이미 부부 사이엔 이번까지만 하고 그만하기로 합의가 되었던 걸까. 그런데 병원에 와서 다시 마음이 흔들리는 아내를 보며 남편은 화가 났던 걸까. 이런저런 상상을 해본다.


남편 입장도 이해가 간다. 몇 회차의 시술 끝에 결국 그렇게 터지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말이 좋아 고귀한 지출이고 고귀한 투자이지, 비용만으로 보면 평범한 가정에서 편안하게 쓸 수 있는 액수가 아니다. 교환가치를 생각해 볼 때, 화폐의 가치만큼 상품의 가치가 따라와야 공정한 것인데 손에 얻는 것이 전혀 없다. 이 거래와 투자가 전혀 상식적이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조금 많이 과격했다. 아내의 마음에 상처가 깊을 것 같다. 아무리 답답하고 화가 나도, 병원에서 그 상황에서 그러진 말지, 조금만 더 좋은 방법으로 얘기해보지.


'돈 주고도 못 살 경험'이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얼마나 귀하고 가치있는 경험이길래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걸지 모르겠다. 비록 나의 이 경험이 큰 돈을 주고 얻은 것일 지라도, 나에게는 돈 주고도 못 살 경험 이상으로 귀하고 가치있는 것이라고 여긴다. 원래 내가 얻으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보다 더 가치있는 '경험'을 얻었고 또 지금도 계속 얻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하려 애쓴다. 소망했던 것을 손에 얻지 못하고 있으니 가시적인 가치로 생각하면 나는 투자에 실패한 것이고, 사기도 이런 사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게 정말 끝이라면 내가 너무 억울하니까, 뭐라도 얻어가야 한다. 그래서 나는 하루하루 이 경험을 아주 공들여 곱씹고 또 곱씹는 중이다.


오랜 난임을 겪은 시험관 고차수 부부들은 안 그래도 자존감이 낮아질 대로 낮아져 있다. 거듭된 실패는 참 사람을 초라하게 만든다. 살면서 이렇게 냉정한 실패를 셀 수 없이 겪으며 사는 일이 있을까. '선천적으로 어쩔 수 없었던 거예요. 환자 분 탓이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의사 선생님의 말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난임 성공수기마다 뭘 먹었고, 무슨 운동을 했고, 어떤 생활습관을 통해 난임을 극복했다는 간증이 투성이이다. 나는 그렇지 못해서, 내가 잘 못해서, 내가 올바로 살지 않아서, 내가 모범 난임환자가 아니라서 나는 성공에 이르지 못한 것 같아 결국 내 탓으로 여기고 자책을 한다.


마음을 강하게 먹어야 하는데 살아가는 세상이 자본주의 사회라 난임 치료를 하는  있어서도 돈이  사람을 초라하게 만든다. 단톡방의  친구가 속상한 마음을 달래며 산책을 하다가  사진, 하늘 사진  장을 찍어 공유했다. 갈수록 늘어나는 병원비가 버거웠던 친구의 남편이, 친구가 관리하는 생활비에 대해 싫은 소리를 하며 간섭을  모양이었다. 시부모님 용돈까지 드려가며 허리띠를 조이는 친구다. 말도  되는  고물가 시대에 어디서   아끼나.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 대사처럼 시대가  많은  좌우한다. 드라마의 배경이었던 1997 IMF 때나, 지금이나 그놈의 시대는   단호하다.

종종   병원에서 싸우던  부부 생각이 난다. 그냥 가만히 아무  없이  과정을 겪기만 해도 우리는 자신감이  없어지는데,  때문에 서로의 자존심을 다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부디 지금쯤은 마음을  풀고 서로  보듬으며 살고 있기를 바래본다. 좋은 일로 마무리가 되어서  식구가 되어 알콩달콩  살고 있다면   좋겠다.  




시험관 고차수이고, 난임을 겪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 가정의 오랜 노력과 소망이 어쩌면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아도 좋겠다는 위험한 생각을 합니다. 말이 씨가 된다고 하는데 진짜 그러면 어쩌려고 이제 글까지 써서 남기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난 수년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마음들을 정리해봅니다. 누구나 바라는 것이 있겠습니다. 그 모든 바람이 해피엔딩이 아닐진대, 인생의 섭리를 인정하며 나에게 이 경험이 왜 찾아왔을지 사유해봅니다. 비슷한 상황에 있는 누군가에겐 부디 공감과 위로를 드릴 수 있길 바랍니다. 연재를 하지만,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적다 보니 글의 시점이 과거와 현재를 넘나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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