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국식 Jan 26. 2021

샤라웃 투 코미디

<박완서_나의 아름다운 이웃>을 읽고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찰리채플린의 말은 그가 죽은 몇 십년이 지나도 회자되고 있다. 웃긴 모습으로 기억되는 그지만 실제의 삶의 모습은 무뚝뚝한 것에 가까웠다고 했다. 그 사람의 말과 존재가 일치했을 때 오는 말의 힘은 무겁다. 


  콩트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개그콘서트가 생각났다. 콩트라는 것은 그런 개그 프로그램에서 하는 웃기는 상황극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인터넷에 검색해 봤다. 예상은 했지만 단편 소설보다도 짧은 소설을 콩트라고 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 속에 삶에 대한 유머, 해학 등이 담겨져 있는 그런 짧고 짧은 소설이 콩트였던 것이다. 사실 굳이 검색해보지 않아도 작가 박완서가 쓴 글을 보면 아 이런 것이 콩트구나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박완서의 콩트를 읽고, 검색해보았던 콩트의 정의를 생각하며, 다시 찰리채플린의 말을 떠올려본다. 어쩐지 조금은 쓸쓸해 진다. 삶을 조금 더 연민하게 된다. 가공된 짦은 이야기 속 사람들의 삶을 통해 조금은 씁쓸한 연민의 웃음을 짓게 된다.


  나는 삶은 긍정하고 싶다. 처음 글을 쓰고 싶어했던 나의 마음을 생각해본다. 그 때는 19세와 20세의 사이었다. 그즈음의 나는 꽤 부정적이었다. 아니 어떻게 삶을 긍정해야하는 방법을 몰랐던 것 같다. 나는 세상이 더 밝아졌으면 하는 마음에 더 어두워졌다. 글을 쓰고 싶어했던 마음은 거기에 있었다. 나의 삶과 같이 사는 세상이 더 행복해지길 바라면서. 그리고 나도 행복해지기를 바라면서.


  얼마전 한 희극인이 죽었다. 누군가의 죽음에 감흥없이라고 쓰려는 내가 스스로 새삼 무섭지만 실제로 요즘엔뉴스에서 어떤 연예인이 죽었다 하면 에구 안타깝네 하며 별 감흥없이 화면을 슥 올렸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죽었다는 기사에는 머리에 쿵 오랜 진동의 충격을 받았다.


  어쩌면 그녀의 닉네임처럼 세상에서 가장 멋쟁이희극인이었기 때문에 힘들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세상을 가장 연민하고 사랑하는 이가 제일 외롭고 힘들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박완서의 콩트를 읽으며 비록 한 세대 전에 쓰여진 소설이지만 지금의 배경을 떠올리고 읽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그 말은 사람사는게 다 거기서 거기라는 진부한 말처럼 느껴졌다. 그런 진부한 말이 사실이라면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삶은 죽음을 향해가는 지옥일뿐이라면 어떻게 살아햐할까. 정작 이 말을 한 쇼펜하우어는 굉장히 오래 살았다. 세상을 긍정하면 긍정할 수록 부정하게 되고 부정하면 부정할 수록 긍정하게 되는 삶의 비극인 것 같다. 


  인생은 이런 코미디인 것 같다. 그렇기에 오늘은 코미디를 다루는, 희극을 다루는, 모든 이에게 오늘은 존경을 표현다. 샤라웃 투 코미디. 샤라웃 투 박지선.


2020. 11. 20.

작가의 이전글 귀찮은 몸뚱아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