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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국식 Feb 21. 2021

700번 버스

  오늘 700번 버스를 탔다. 무슨 노래를 들을까 하며 멜론 플레이리스트를 살폈다. 재주소년, 강아솔로 이루어진 플레이리스트를 재생시켰다. 덜컹덜컹 버스가 몇 번 흔들리고 노래는 강아솔의 '하도리 가는 길'로 바뀌었다. 순간 제주에서의 일상이 떠올랐다.


  7년 전 일하던 하도리의 게스트하우스는 예상치 못한 곳에 자리했다. 제주도가 한참 개발된 지금에 가더라도 그곳의 주변은 썰렁하니 그때는 더더욱 휑한 곳이었다. 사실 그 점이 맘에 들었다. 처음에는 버스정류장도 없고 도로에 가로등도 없어 밤에는 별이 정말 잘 보였다. 얼마 안 있어 '하도리개긋물'이라는 이름의 버스 표지판이 생기고 도로에 가로등도 생겼지만 그래도 무척 외진 곳이었다.


  게스트하우스 스텝 생활은 하루 일하고 하루 노는 단순한 일과이다. 그래서 노는 날에는 일할 때 만난 게스트들과 같이 이동을 하며 놀기도 하고, 자전거를 타고 성산일출봉을 중심 삼아 오조리 포구를 돌거나, 세화리 카페에서 바다나 보며 하루 종일 있거나 했다. 제주까지 와서 일하는 스물다섯으로썬 제주를 느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한 이주가 지났다. 이주 뒤 스텝 생활은 일하는 날과 노는 날이 구분이 없었다. 그냥 일상을 보냈다. 그때는 같이 일하는 형이 있었는데 서로 번갈아가면서 일하고 놀았다. 그런데 형도 나도 웬만큼 돌아다녀 보니 이 생활도 일상이 되며 그냥 같이 오전에 후딱 일을 끝내고 봉고트럭을 타고 근처 맛집이나 카페에 다니곤 했다. 때로는 정말로 조용한 게스트하우스의 재주를 살려 제주의 한구석의 고요를 느꼈다. 그렇게 제주 시골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떠나오고 싶었던 도시의 일상을 다시 떠올리곤 했다.


 하도리 게스트하우스를 나와 제주 시내로 가기 위해선 700번 버스를 타야 한다. 제주 700번 버스는 일주 버스라고도 불리는데 제주 일주로를 따라 사람들을 실어준다. 제주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버스이다. 평일에 게스트가 없을 때는 스텝 형과 제주시내에 나가 머리도 자르고 제주 시내 유명한 맛집과 술집에 가서 놀다 돌아오곤 했다.


  어느 날은 혼자 약속이 있어서 700번 버스를 타게 되었다. 나는 하도리 게스트하우스 스텝 2기였는데, 스텝 1기를 지냈던 친구가 제주 시내에서 주택공사 인턴을 하고 있었다. 그 친구와는 벨롱장에서 핏짜비어를 팔면서 친해졌다. 핏짜비어는 게스트하우스 사장님 회심의 아이템이었다. 말그대로 피자맛이 나는 맥주였는데 부산출신인 그는 항상 핏짜비어라고 발음했다. 인턴하며 쉬는 날 놀러 왔다가 벨롱장에서 같이 일하고 술을 한 잔 기울이며 친해졌고 이후에 약속이 잡혔던 것이다.

이게 그 핏짜비어이다.


  그날 영화를 보고 간단히 저녁을 먹고 700번을 타고 다시 게스트하우스로 오는 길이 참 좋았다. 해 질 녘에 일주로를 달리는 버스 그리고 제주 시내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제주사람들 사이에 껴서 맥주 한 잔하고 돌아가는 느낌이 좋았다. 나도 이 아름다운 섬의 한 부분처럼 느껴졌다. 꽉 채워 출발한 저녁시간 700번 버스에서 제주 시내가 일터일지 모르는 아저씨가 함덕에서 내리고, 해녀들일지도 모르는 할머니께서 동복리에서 내리고, 나처럼 시내에 놀러갔다 온 건지도 모르는 학생이 세화리에서 내리고 나면 어느새 어둠이 깔린 도로를 지나 '하도리개긋물'라고 적힌 표지판에 멈춘다. 그러면 나도 집에 도착한다.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라는 에어비앤비의 문구를 나중에 보면서 나는 많이 공감했다. 7년 전 제주에서의 생활은 여행이었다. 세화리 하나로마트에서 장을 보고 1.5톤 트럭을 타고 월정리에 놀러 가고 그냥 침대에 누워 느끼던 바람들 같은 것이 여행이었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약속을 잡아 버스를 타고 나갔다 돌아오는 일이 여행이었다. 일상처럼 살아가는 것이 여행이라면 그 반대도 맞을 것이다. 여행처럼 살아가는 일상 말이다. 구석의 게스트하우스에서 떠나온 생활을 그리워했듯 여행은 일상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일상에 돌아가 삶을 여행처럼 만들어주겠지.


  우연치 않게 오늘 일산에서 타는 700번 버스와 이어폰으로 들려온 강아솔의 하도리 가는 길로 오랜만에 좋은 기분을 다시 꺼내어 느낄 수 있었다. 오늘은 정말이지 7년 전 700번 버스를 탈 때처럼 따뜻한 날씨였다. 여행 같은 일상이었다.


2021. 02. 20.


2014년 봄, 제주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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