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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삐딱한 나선생 Apr 17. 2023

하루만큼의 고통만

3월은 교사에게 가장 힘든 달이다.

하루하루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1년 치 고통을 한 번에 받을 필요는 없었다.



업무


올해 6학년을 4번째 한다.

처음엔 뭣도 모르고 시키는 대로 했다.

이제는 6학년이 돌아가는 시스템을 안다.


테마학습여행, 동영상 제작을 포함한 졸업 준비, 중입 배정.

여긴 5월 말 제주도로 계획 중이라 2월부터 여행사에 알아봐야 했다.

행사마다 사진을 잘 남겨야 하고, 주소와 학군을 미리 안내해야 중입 관련 민원을 줄일 수 있다.


꼭 6학년만 힘들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어떤 업무든 3월엔 연간 계획을 짜고 준비해야 한다.

생존수영도 7월에 좋은 날은 3월부터 예약하지 않으면 자리가 없다.


체육 업무를 맡으면 운동회, 각종 대회 등등

방과후는 강사 채용, 공개수업, 각종 민원은 덤으로

학교가 돌아가는 걸 보면 볼수록 무엇하나 쉬운 게 없다.


경력이 쌓일수록 더 두려워지는 건 이 때문이다.

하나하나 해결해 왔던 것들이 이제는 큰 덩어리로 느껴진다.

단순한 업무 진행뿐 아니라 다른 부서의 협조, 생각지 못한 변수들까지도.



학급


"3월 한 달에 기선제압이 중요해.

처음엔 웃어주지 말고 사무적으로 대해."

신규 선생님들에게 전하는 흔한 조언이다.


편하고 친근하게 대했더니 갑자기 함부로 하고 있고

좋은 마음으로 이해해 줬던 것들은 어느새 규칙을 무너뜨린다.

신규 선생님이 힘들어하는 것도, 본인이 힘들었던 것도 알기에 하는 말일 것이다.


내가 신규일 때는 이 말에 반대했다.

웃어줄 땐 웃어주지만 잡을 땐 잡을 거라고.

매일매일 진심으로 반응하며 학급을 운영할 거라고.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선배들의 말이 이해가 된다.

갈수록 교사의 분노는 허락되지도, 표현할 방법도 별로 없다.

아무리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도 어쨌든 1년을 이끌고 가야 한다.


내가 가르치는 게 옳다면 날 미워해도 좋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내가 교사를 그만두더라도 널 고치겠다 각오했던 적도 있다.

이젠 그 감정을 오래오래 나누어 써야 한다는 걸 안다.



하루살이


"너 지금 선생님 말 무시하는 거야!!"

예전엔 학생과 누가 이기나 끝장을 보려고도 했다.

"그럼 여기까지만 하고 다음에 다시 해보자."

너와 내가 오늘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조금만 천천히.


결혼하고 애를 낳는 뒤가 걱정되어, 사랑의 시작조차 두려워진 것처럼

일을 하는 시간보다 고민하고 주저하는 시간이 길어질 때.

지금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것만 하자.

나중의 걱정은 그때의 나에게 맡기자.


모든 일을 하루 만에 끝낼 수는 없다.

아이의 변화도 하루 만에 이뤄지진 않는다.

오늘의 나에겐 하루만큼의 시간과 에너지가 있다.


어쩌면 내 이야기는 우울한 패배자의 말인지도 모른다.

학교 곳곳엔 일도, 학급 운영도 열정으로 해내는 분이 많을 것이다.

언젠간 나도 미리 걱정하지 않아도 준비가 되어 있는 그런 날이 오길 바란다.


그래도 지금 힘든 누군가에겐 조금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견딜 수 있는 하루만큼의 고통만 받기를.

내가 할 수 있는 하루만큼의 삶을 살기를.

내일의 나는 또 살아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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