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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삐딱한 나선생 Mar 14. 2024

너에겐 너무 아픈 말

교사는 말로 먹고 산다.

생활지도도 대부분 말로 전한다.

해도 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가르친다.



상처가 되는 말


"야이 씨O"

복도를 지나는데 쌍욕이 들렸다.

내가 있는 줄 몰랐던 학생은 당황했다.

그냥 쳐다만 보았고, 미안해했고 사건은 끝났다.


욕을 습관적으로 쓰는 학생은 마음이 무너진 상태이다.

선생님이 있는데도 욕이 들린다면 그건 무너진 교실일 것이다.

욕은 그 자체로 흉기이며, 날카로운 감정 말고는 어떤 의미도 없다.


작은 학교에 있으면서 욕을 들은 일이 거의 없었다.

고작 내 눈빛 레이저로 사건을 끝냈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하지만 대놓고 하는 욕이 아니어도 은근히 상처를 주는 말들도 많다.


어릴 적 키 큰 친구는 '롱다리' 작으면 '장롱다리'라고 불렀다.

당연히 롱다리는 좋고 장롱다리는 놀림이었다.

뚱뚱하면 돼지라고 놀리는 것도 흔했다.


비유를 수업에 가르치지만 아이들은 이미 쓰고 있다.

요즘은 급식충, 진지충 벌레를 지칭하기도 한다.

벌레라는 단어가 이렇게 쓰일 줄 알았을까.


단어의 의미는 사전에 정의된 대로 전달되는 게 아니다.

그 낱말을 어떻게 경험하느냐에 따라 각자의 머리에 쌓여간다.

그리하여 그 어떤 말도, 심지어 따뜻해야 할 사랑의 말도 아프게 남기도 한다.



상처로 남은 말


"부모님께 모레까지 신청서에 사인받아와~"

작년, 방과 후 신청서를 나누어 주었다.

다음 날 할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우리 애한테 부모님 얘기했어요?!"

갑자기 소리부터 지르는 통에 당황했다.

해당 학생도 나랑 잘 지내고 나쁘게 했던 게 없었기에.


"저는 그냥 안내의 차원이었지 다른 말을 한 게 없었습니다."

"어쨌든 우리 애한테 엄마 이런 얘기하지 마세요!"

연세가 있으신 할머니지만, 속이 너무 상했다.


아이를 불러 오해를 풀고도 싶었지만 아예 말도 꺼내지 말라 했다.

그 뒤로는 가능하면 "집에서 받아와, 어른들께 받아와"이런다.

그냥 보호자나 법정대리인이라고 불러야 할까.


어떤 단어가 누군가한테는 상처로 남아있을 수 있다.

그 말을 알고 있다면 조심해 주는 게 맞긴 하겠다.

하지만 그렇게 말을 없애가는 게 좋은 일일까.



상대에 대한 말


요즘 대학에서는 남녀가 애매하게 공존하는 듯하다.

연애는 하고 싶으면서도, 취업에선 경쟁자, 정치적으로는 상대 집단.

뉴스를 봐도 젠더이슈를 키우거나 댓글에 서로 혐오하는 말을 적기도 한다.

선거철이 다가오면 일부러 한쪽 성을 편들어 표의 절반을 확보하는 전략인 듯도 보인다.


'남성'이 누군가한텐 범죄자, 공포, 악마에 가까운 단어일 수 있다.

'여성'이 누군가에겐 단지 성욕의 대상일 수도 배신, 아픔일 수도 있다.

누군가 상대에 대한 단어를 그렇게만 둔다면 절대 '사랑'으로 오진 못할 것이다.


다행히 내 아내는 '남성'의 단어가 책임감, 믿음, 능력 등으로 연결되는 것 같다.

장인어른이 그러셨고, 나도 20살 처음 만남부터 신뢰를 쌓아왔다.

(그렇기에 남편 욕을 해야 하는 여자 집단에서는 입을 닫는다.)


나 또한 '아내'라는 단어엔 동반자, 친구, 사랑 등의 개념으로 연결된다.

흔히 아저씨들이 말하는 구속, 잔소리, 집안일 이런 것과는 다르다.

(그렇기에 나도 남자들 사이에서는 힘든 척도 해야 한다.)


그저 잘난 척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단어의 의미는 혼자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남자 여자도, 사랑도 그 결실인 아이와 가족이란 말도.



상처가 나을 말


첫 도덕 시간, 책 차례를 훑어보았다.

3단원 '행복이 가득한 우리 집'을 함께 읽었다.

그리고, 난 아이들에게 이 단원은 가르칠 수 없다고 했다.


"집집마다 가족의 상황은 많이 달라요.

어떤 아빠는 무섭기도 하고 자상하기도 하지요.

어떤 집은 엄마가 세기도, 아빠가 더 강하기도 해요.

또 어떤 부모님은 멀리 일하러 가기도, 너무 바쁘기도 합니다.


부모님이 여러분에게 사랑만 주면 좋겠는데 아닐 때도 있어요.

부모님 사이가 좋다면 다행인데, 싸우고 불안할 수도 있지요.

'행복이 가득한 우리 집'을 읽으면서 오히려 더 슬퍼지는 사람도 있을지 몰라요.

행복이 가득해야 하는데, 그래야 할 것만 같은데 우리 집은 그렇지 않다면요.


선생님도 어릴 적엔 아빠 엄마가 엄청 밉기도 했어요.

선생님의 아빠도 군인이었고, 무서웠고, 때리기도 했어요.

부부싸움도 자주 했고, 어떨 땐 방 문을 잠그고 잠들기도 했어요.

또 어떤 날은 엄마가 도망가는 걸 잡으려 논밭에 뛰어가기도 했지요.


지금 부모님이 좋고 잘해주신다면 감사히 여기세요.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해도 너무 실망하지 말아요.

여기 이렇게 잘 살고 있는 선생님도 있잖아요.

'부모'라는 단어가 지금은 아픈 말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나중에 여러분이 '부모'가 될 땐 행복한 말이길 바래요."


올해 내 모교인 초등학교에 왔다.

실제 주소가 군인 관사인 학생이 많다.

또한 한부모, 재혼 가정도 조금은 있다.


내가 이 아이들의 부모가 되어줄 수는 없다.

'부모'라는 단어를 좋게 바꿔주지도 못할 것이다.

다만 내가 "부모님께 사인받아와~" 이렇게 말하더라도,

상처로 느끼지 않는 정도의 우리 사이는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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