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빅이슈코리아 Apr 04. 2023

교열, 문장의 무늬를 찾아서

쪽프레스 김미래 편집장

안녕하세요, 저는 책입니다. 제가 완성되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손길을 거치지만, 그중에서도 글의 품질을 결정짓는 데는 ‘교열’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독자들이 읽기 좋은 문장으로 다듬는 교열은 저‧역자의 요청에 따라 그 강도가 달라지기도 하지만, 모든 글자를 본다는 점에서 책을 만드는 책임감의 다른 이름일 수 있지요. 글에 빛을 더한다는 건, 두 눈으로 문장의 무늬를 찾는 일과도 같은데, 마치 지금 창밖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듯 책을 읽다 좋은 기분을, 감정을 느꼈다면 분명, 그건 교열의 흔적일지 모릅니다. 글 쓰는 직업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일기 한 편, 편지 한 장, SNS에 짧은 글을 써본 사람이라면, 내 문장이 가진 고유의 무늬를 찾아보세요. 분명 그 문장엔 스스로 문장을 갈고닦은 마음이 담겨 있을 거예요. 책의 여행, 여덟 번째 주인공으로 ‘한쪽(으로읽는)책’ 등 실험적인 도서들을 펴내는 출판사 쪽프레스의 김미래 편집장을 만나 교열에 관해 물어보았습니다.


교열에 처음 관심을 갖게  계기가 궁금합니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근무했는데요. 버지니아 울프의 책을 편집하면서 교열에 대한 직업의식이 쌓인 것 같아요. 여성 문학을 익숙하게 접하고는 있었지만, 오래된 문학에서 거의 동시대적으로 공감한 것은 직접 편집하고서였어요. 울프의 책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100년 전에 쓰인 글이 번역자를 통해 새로운 언어로 바뀌고, 편집자가 다듬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책도 작업자도 물리적으로 영향받는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교열이 단순히 책 제작에의 조력이 아니라 편집자 자신이 직접 관여하는 강렬한 체험이라는 걸 깨닫는 계기가 됐죠.


버지니아 울프의 책에서 기억에 남는 문장이 있나요?

<등대로>는 1927년 발표된 장편소설인데, 2013년 편집을 맡은 저는 ‘To the Lighthouse’보다는 ‘燈臺路’로 읽을 만큼 유독 예스럽게 다가왔어요. 감수성이 풍부하고 자의식이 비대한 아버지와 그를 내조하는 어머니, 그들의 아이들이 등장하는 이야기인데요. 등대를 보러 가자는 아이들의 청에 어머니는 “그래, 물론이지, 내일 날이 맑으면 말이야.”라고 희망을 주고, 그다음 장에는 “하지만 날이 맑지 않을 게다.”라고 아버지가 그 희망을 우그러뜨리는 장면이 나와요. 이 장면은 일상적이지만 어린이가 세계에 던진 첫 제안이 아버지가 대표하는 세계로부터 튕긴 듯한 절망을 암시하는 대목이죠. 이때 아이들은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도끼나 부지깽이, 아니면 아버지의 가슴에 구멍을 낼 수 있는 어떤 무기라도 가까이 있었다면, 바로 그때 그 자리에서 그것을 움켜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에는 도끼와 부지깽이가 어린이 손에 쥐여 있지 않고요.


교열교정윤문의 차이는 무엇인지 궁금해요.

낱말의 한자를 보고 가늠해보자면 교정(校訂)은 문장의 오류를 바로잡는 것, 교열(校閱)은 문장을 넘어 내용을 판단하는 것, 윤문(潤文)은 내용 이후의(혹은 이전의) 문예에 관여하는, 말 그대로 빛을 내는 일입니다. 편집 과정에서 이 세 가지가 정확히 구분되거나 순차적이지는 않아요. 교열과 윤문은 결국 문장의 질감이나 표면에 가해지는 작업인데, 번역서의 경우 역자와, 동시대 책이라면 저자와 소통하면서 그 강도를 결정하게 됩니다.


교열의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요?

운동을 시작하면 시간이 흐를수록 능숙해지고 신장되는 것이 느껴지는데요. 교정교열은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이 없고 어렵게 느껴지는 듯해요. 누군가의 글을 바꾸거나 들여다본다는 게 인간관계만큼 미묘해서, 저·역자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도 있지만, 영향이라는 것은 결국 압력이란 것이고, 이를 받기 전의 사람과 글 자체가 있는 그대로 충분하다고 느껴지기도 하죠. 그래서 교열 작업하기 전에 원하는 작업 강도나, 저자의 선호, 그간의 작업 방식에 대해 여쭤보곤 합니다.


그렇다면교열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하루에 30페이지를 교열할 때도 있고, 두세 페이지에서 그칠 때도 있거든요. 전속력 달리기가 아니고 산책하듯이 독서할 수 있으니 즐거워요. 또한 교열은 책이나 텍스트에 기여한다는 실용적인 기능 외에, 작업자에게 명상과도 같은 정신적인 훈련이 된다는 점이 좋습니다.


평소 문장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국어사전 찾는 것을 추천해요. 글과 문장에 영어나 한자보다 우리말 단어가 많을수록 흐름이 좋다고 생각해요. 글을 읽는 것을 걷기라고 상상해보면, 외국어는 산책길에 있는 눈에 띄는 상점이나 동물이고, 우리말은 산책자가 스쳐 지나가는 ‘햇살’이나 ‘바람’ 같은 요소예요. 사전은 쓰려는 낱말의 본뜻을 알려주면서도, 충분히 대신할 만한 우리말 뭉치를 제공해줍니다.


교열하면서 저자의 글이 이해가   때는 어떻게 하나요?

질문하죠. 편집자의 힘은 무수한 독자를 뒤에 두고 저자에게 감히 질문할 수 있다는 점이죠. 편집자는 호기심과 용기를 가지고 저자와 소통할 수 있어요. 편집자마저 글을 이해 못 하면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독자에겐 더더욱 닿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저자에게 자주 듣는 질문이 ‘이게 읽히세요?’인데, 적어도 한 사람이 제대로 이해해준다면 그 불안은 사라집니다.  


좋은 글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글은 결국 생각을 옮긴 것이니까,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쓰는 게 가장 중요해 보여요. 원고 청탁이란 이상한 제도 같아요, 생각을 요청한다는 부자연스러운 행위죠. 우리는 청탁받기 전, 이 순간에도 이미 생각하고 있죠. 이 생각은 나를 구성하고, 나를 만나는 사람에게 영향을 줍니다. 그런데 이 눈에 안 보이는 생각을 써내서 보이게 만들면, 아직 구성되지 않은 나에게도, 혹은 나를 만나지 않은 사람에게도 전해질 수 있어요. 그게 글의 놀라운 점이라고 생각해요.


출판에서 교열의 의미도 궁금해요.

‘창’의 역할인 것 같아요. 저자와 독자 사이에 주어지는 레이어임은 분명한데, 아주 투명해서 잘 인식되지 않죠. 다만 독자 입장에서는 책 속의 세계로 들어가기 전의 안전장치이고, 저자 입장에서는 책 바깥을 들여다볼 수 있는 도구인 셈이죠.


미디어에 비친 교열부의 모습을 보면서 어떤 감정이었나요?

일본의 드라마 <수수하지만 굉장해! 교열걸 코노 에츠코>(2016, 이하 <교열걸>)는 개성 강한 캐릭터가 좌중을 휘어잡는 이야기에요. 패션지 에디터를 꿈꿔왔던 주인공이 출판사에 입사해 우연히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교열부에 배치된 후, 점점 더 작업에 빠져들면서 문장을 교열한다는 게 저자와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걸 깨닫죠. 초심자 특유의 용기로 계속해서 책 속으로 침투하면서 창작의 매너리즘에 빠져 있던 저자들도 교열에 진심인 주인공을 통해 새로운 영감을 얻는 과정이 코믹하게 그려집니다.


끝으로미래의 독자들에게 책을 통해 전하고픈 메시지가 있다면요?

출판 브랜드를 직접 운영하는 가장 큰 기쁨은 ‘정석’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자유예요. 아는 것만을 이야기(출판)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싶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점이죠. 저는 생산자지만, 제게는 책이 아웃풋이 아니라 오히려 인풋의 역할을 합니다. 잘 알아서가 아니라 좋아하는 마음을 믿고, 앞으로 헌신할 영역으로 삼으면 책으로 경험할 세계는 무궁무진하게 느껴져요. 


글. 정규환/ 사진. 이규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