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이게 되네?
나트랑 마라톤이 끝나고 이제 내게 남은 마라톤 대회는 9월 8일 이천 도자기 마라톤 대회. 주수로 치면 31주 0일에 나가는 대회였다.
이천 마라톤은 내가 참여하는 동호회에서 함께 나가는 '단체 대회'였고, 그 동호회의 운영진인 내가 어쩌다 진행을 주도하게 되어서 비교적 이른 7월부터 신경썼던 대회. 준비를 진작에 다 마쳐서 8월 말에는 크게 신경쓸 일이 없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9월 7일 자격증 필기 시험을 앞두고 있어 공부에 매진하느라 마라톤 연습은 거의 하지 못했다.
아니 하지 않았다는 말이 더 맞을 수도. 뱃 속 아기는 다행히도 주수에 맞게 1500g이라는 몸을 뽐내고 있었고(평균보다 조금 크다) 배는 30주가 바싹 다가오자 더 커졌다. 자궁 경부 길이가 3.7cm로 튼튼한 덕(?, 의사쌤께 여쭈어보니 경부 길이도 선천적인 거라고)에 대회에 나가 못 뛸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공부와 무거운 몸을 맞닥뜨리니 '그냥 실전 때 열심히 하자'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일주일 전인 9월 1일 5km로 연습 종료.
시간은 흘러 9월 8일 당일이 되었고, 역시 완주만 하자!의 마음이더라도 대회는 대회인지라 설레는 마음으로 대회장 입성. ㅎㅎ
하필 그 전날 차가 고장나서 부랴부랴 쏘카를 빌리고, 친구들 배번을 내가 들고 있었던 지라 여기저기에 신경을 온통 빼앗기고 있던 탓인지 아차차 아들 신발을 안 챙기는 실수를. (헐) 덕분에 아들은 양말을 신발삼아 대회장을 휘젓고, 남편의 유아차런에도 신발 없이 착석. 아직 시작 전인데 저 까매진 양말을 봐...
드디어 대회 시작!! 기록보단 완주 목표였기에 스타트라인 뒷 쪽에 서서 대회를 시작했다. 유아차런을 하는 남편에겐 앞으로 가라고 일러두고, 혼자 고독한 달리기 시작.
나트랑 마라톤 때도 느꼈지만, 대회를 시작하면 사람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 저렇게 배가 나온 임산부가 달리기를 한다고 (우리나라 문화상) 손가락질이나 혹은 걱정을 듣진 않을까-하는 생각도 때로 들지만, 뭐든지 나의 자의식 과잉인 것을(누군가 추켜세울 것이라 생각하는 마음 또한 자의식 과잉이다).
시작을 알리는 총소리가 울려퍼지면 주로에 선 러너들은 누구나 앞으로 나아간다. 양 옆에 임산부가 뛰든 헐크가 뛰든 임금님이 뛰든 그저 자신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행위가 달리기인 것이다. 그런 사실이 오히려 나를 편하게 했다.
이 주로에서 또한, 언제나 그랬듯, 그냥 나만 잘하면 돼. 나만 잘하면 돼. 나만 포기하지 않으면 돼.
빨라지지 않도록 적당한 속도인 7:00~8:00 사이를 맞춰가며 1km 지나가는데 오 저건 뭐지..? 언덕이구나,, 설마,, 언덕인가 싶었는데 진짜였다. 이천 마라톤 오르막 내리막이 많다더니 진짜였구나 호호. 게다가 나무는 하~~~나 없는 땡볕이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더운데 9월 초는 진짜 땡.볕! 와 덥구나 호호. 오르막내리막 콤보에 땡볕을 이겨내고 나니 어느새 4km.
이 때부터 반환점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약간 흥이 올랐다. 저기엔 친구들이 분명 있다. 서울달리기때 매번 느끼지만, 반환점에서 돌아오는 수많은 러너들 중 아는 얼굴 찾기에 몰입하면 발이 저절로 움직이고, 1km, 2km가 쑥쑥 지나는 매직이 있다.
다만, 4km부터 이런 매직을 기대했던 것보면 확실히 힘들었던 듯하다. 이 때부터 5km로 나갈걸..이란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또 이렇게 겪어봐야 아는구나. 30주 지나면 5km만 나가라구요! 몸이 소리쳤다. (미안혀)
결국 오른쪽 배가 먼저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임신 중 여러 번의 달리기를 하며 이건 단순한 배 땡김이다, 이건 쉬어야 하는 배다-하는 걸 알게 되었는데, 명백히 쉼을 요구하는 배의 신호였다. 배 당김이 있을 때는 슬슬 문지르며 태명을 불러주면 좋아지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500m 이상을 가도 쉬이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걷기 시작했다. 나보다 무조건적으로 아기의 건강이 더 중요하니.
10km 대회에서 걷기라니. 2013년 첫 10km 대회 기록이 59분대였던 나는 10km 대회에서 걸어본 적이 없었다. 마라톤 초심자 아는 동생과 나갔던 대회를 제외하고 10km 대회를 1시간 이상 뛰어본 적도 없다. 나에게 10km란, 있는 힘껏 뛰지 않아도 1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가 아니고, 무엇보다 아무리 입이 바싹 마르고 힘들어도 10km의 끝은 반드시 온다는 믿음이 있다. 5km만 뛰면 반 밖에 안 남았고, 7km 뛰면 3km 밖에 안 남았고, 10km 대회를 처음 나가는 친구들에게는 '8km부터는 정신력으로 밀어'라고 말하는 나였다. 그런데 내가 걷고 있다니. 31주에 10km를 나가겠다는 무모함이 나를 돌아보게 했고, 그럼에도 완주를 하겠다고 꾸역꾸역 걷는 내가 재밌게 느껴졌다. 나는 나구나. 지금까지 어떤 대회도 중도 포기('DNF', Did not finish의 약자다.)하지 않았던 내 유일한 장점 지구력이 여기에서도 발휘되는구나. 아무리 걷더라도 너무 처지고 싶진 않아 팔을 열심히 흔들며 앞으로 나아갔다. 나아가는 도중 상달이를 만나는 천운이 있어 더욱 힘차게 걸을 수(!) 있었다.
10km 대회에서 걷기라니! 긍정적으로 생각하니 모든 게 다 새로웠다. 10km 대회에서 걷고 있다는 것도, 무려 같이 걷고 뛰는 페이스메이커 상달이가 옆에 있는 것도, 이천의 푸른 들판이 보이는 풍경도, 유아차런으로 시작했지만 아들과 걷고 있는 아버지도, 어쩌면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꼬리에서 걷뛰걷뛰하며 스스로와의 싸움을 이어나가는 주자들도, 다 흔하지만 흔하지 않은 풍경처럼 생경하고 감사했다. 내가 30주가 넘은 임산부의 몸으로서 마라톤 대회에서 뛰고 있듯, 마라톤은 어떻고 저렇다라는 통념을 깨뜨리는, 경험이었다.
초반 5km를 7분대로 밀고, 2km 정도를 10분 페이스로 걷고 나머지 3km는 몸이 움직이는대로 8~9분대로 뛰었더니 어찌저찌 1시간 반 안에는 들어온 임신 31주의 10km 대회. 피니쉬에 이르자 사회자 분이 "만삭인데도 완주를 하시네요!"하셔서 갑자기 뭇 사람들의 시선을 받았던 이천 마라톤 완주!
둘째 또한 수술 예정으로 '운동량을 줄여주세요'하는 의사쌤 조언에 따라 임신부 달리기는 이제 은퇴합니다. ㅎㅎ
그래도 참 좋은 건, 임신 때도 달리기를 이어간 덕분인지 첫째 때처럼 근육이 빠지거나 몸이 헐렁해지는 느낌은 확실히 덜 하다는 것(+주 3회 코어 운동). 첫째 때는 출산 50일부터 달리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좀 더 일찍 시작해도 될까요? 벌써부터 다가올 늦겨울의 달리기가 기대된다!
꿈제야, 몸 건강히 6주 뒤에 만나자요! 엄마는 네가 정말 기대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