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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달아 Aug 13. 2024

임신 27W, 나트랑 마라톤 10km 완주!

신혼여행, 태교여행, 해외 마라톤, 임신 중 마라톤, 렛츠고

  

  코로나19가 창궐하던 2020년에 결혼한 우리는 신혼여행을 가지 못했다. 혼수로 이미 뱃속에 아들이 있던 터라(...) 그 애가 태어나고, 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해외여행을 가기 시작한 작년에도 여행가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올해 4월, 열심히 일하던 도중 갑자기 어떤 생각이 들었다. "비행기를 타고 싶어!" 

  당시 임신 초기였던 나는 신혼여행이자 태교여행으로 비행기를 타리라 결심했고, 태교여행의 한계상 비행 시간 5시간 이내란 조건이 걸렸다. 5시간 내에 갈 수 있는 흥미로운 여행지라. 선택지가 많지 않아 몇 개의 도시를 찾아보던 중 내 눈을 단번에 끄는 이벤트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해외 마라톤!!


  해외 마라톤이라. 내가 달리기에 막 입문해서 열심히 뛰고 있을 무렵 대학교 동기 오빠가 빌려준 책, 타카기 나오코의 '해외 마라톤 RUN RUN!'. 책은 달리기만큼 먹고 마시고 즐기는 걸 사랑하는 작가의 해외 마라톤 체험기를 만화로 풀어낸 수작(?)으로 그 책을 보면 누구나 해외 마라톤을 꿈꾸게 한다고 자부할 수 있다(?). 

  코로나로 마라톤은 커녕 외국 여행의 문이 잠기고, 작년 이후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해외 마라톤에 참여했지만 큰 감흥이 없었는데, 막상 내가 해외 마라톤에 나갈 수 있는 진짜(!) 기회가 생기니 더 없이, 정말 더 없이 그만큼 설레는 일이 없었다. 이미 꿈제도 알고 있겠지. 엄마에게 최고의 태교는 달리기인걸. 

  다만 레이스 당일이 8월 11일, 27주였고, 4월에는 27주에 얼마나 배가 나오는지 가늠하지 못했던터라(첫째 임신 때의 기억은 사라진지 오래..) 5km를 나가야할까-? 고민했는데, 남편의 단호한 한마디. "해외까지 가서 마라톤을 하는데 5km나가는 건 너무 아깝지 않아?" 아, ㅇㅋ. 그럼 10km 간다! 나와 남편, 2명분의 10km 등록이 모두 완료되었다는 메일을 읽고 또 읽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설렐까. 타카기 나오코 작가도 이런 마음으로 살았겠구나, 이런 마음이 그녀에게 만화까지 그리게 했구나- 어렴풋이 느끼며 그 책을 처음 접했던 2018년? 당시 내게 말해주고 싶다. 이달아, 너 해외 마라톤 나간다! (그런데 임신 중에!)


임신 7개월의 10km 도전기는 이때부터 시작


  바쁘게 지내다보니 5, 6, 7월이 쑥쑥 지나가고 그만큼 다행히 배도 건강히 나와줬다. 달리기도 나름대로 꾸준히 하면서 나온 배에 걸맞는 감각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다. 7월 어느 토요일에는 동호회 친구들과 함께 여의도공원에서 뛰었는데, 친구들과 오랜만의 수다런이 너무 반가워서 6km를 넘게 뛰었다. 뛰면서 5km 이상 뛸 때 스스로의 컨디션을 면밀히 체크했다. 임신 중기로 몸은 생각보다 가벼웠지만 배의 수축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럴 때는 속도를 조금 낮추고 배를 쓰다듬으며 운동하는 몸에 익숙해지도록 노력했다. 기온 또한 이미 30도에 가까웠기에 동남아에 위치한 나트랑 기후에 충분히 대비한다고 생각했다.


  8월이 가까울 즈음 확인해보니 10km 시작 시간이 오전 5시였다. 풀코스는 3시, 하프는 4시, 10km는 5시, 5km는 5시 25분. 너무 이른 것 아닐까? 생각했는데, 베트남에 와보니 현지의 생활을 반영한 시작 시간임을 알 수 있었다. 나트랑 여행 첫 날, 나트랑 해변에서 에어로빅을 하는 사람, 수영하는 사람이 오전 6시부터 가득한 것을 보고 정말 깜짝 놀랐다. 이후에도 지켜보니 6시 반부터 영업하는 식당도 적지 않았다. 나트랑 현지 사람들의 생활은 오전 6시부터 시작하는 셈이니 그들에겐 5시 시작하는 10km 마라톤이 결코 빠르지 않을 것이다. (한국과의 시차 2시간을 고려하면 사실상 7시에 시작하는 거라 큰 차이 없기도 하다. 물론 풀코스는 오전 5시에 시작하는 셈이지만!)


10km 코스도. 사실 10km 정도는 코스를 눈여겨 보지 않는다..


  드디어 8월! 8월 10일 아침에 도착해 시작 지점 바로 앞에 있는 노보텔 나트랑 호텔에 자리를 잡고, 해외 마라톤의 꽃(?!)인 엑스포에 방문했다. 방문했을 때 첫번째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우리를 본 경호원이 베트남어로 뭐라고 설명하면서 못 들어가게 막았다. 등록 완료 메일을 보여주면서 '우리는 이미 등록한 사람들이다'라고 영어로 설명했더니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아 결국 번역기 출동. 1차 관문을 통과해 인포로 갔더니 우리를 보자마자 이미 솔드아웃되었다고 설명해주는 2차 관문 등장. 또 다시 메일을 열어 등록했다는 사실과 며칠 전 받은 QR코드를 보여주었다. 다행히 모든 사람들은 친절했고 배번과 티셔츠를 무사히 받을 수 있었다.


8월 10일 엑스포에서 배번과 티셔츠 수령. 10km 주자 이름에서 날 발견!


  드디어 대망의 레이스날. 숙소가 시작 지점 코 앞이었기에 여유롭게 일어나 준비를 마쳤다. 남편은 풀코스 3시간 17분이라는 기록 소유자로 초고수지만, 남편 또한 해외 마라톤이 처음이기도 하고, 휴대용 유아차로 15kg의 41개월 아들과 함께 달릴 예정이었기에 내 페이스에 맞춰주기로 했다. 예상 페이스는 8분/1km, 완 주시간은 약 1시간 20분을 예상. 

  살살 뛸거다, 임신 중기에는 6km 이상 안 뛰어봤다, 너스레를 떨면서 주로에 입장하려는데 이런. 두번째 우여곡절 등장! 경호원이 유아차를 끌고 들어가는 우리 세 가족을 막아선 것이다. 순간 당황해서 못 들어가면 누가 뛸 것인지 논의하다가 논리적으로 잘 설명해보자, 방향을 틀어 영어로 설명했다. 그러나 의사소통 불가. 전날 나트랑 마라톤 규정을 꼼꼼히 읽은 나는 주최측 규정에 유아차를 끌고 못 뛴다는 이야기는 없었다며 구구절절 번역기를 통해 의사를 전달했지만 또 거절. 하 어쩌나. 이거 하려고 휴대용 유아차를 이고 지고 비행기로 모셔왔건만. 

  때론 문제 해결이 가까운데 있던가. 그는 (내 추측상) 주최측에서 나눠준 티셔츠가 아닌 다른 티셔츠를 입고 있는 우리를 등록하지 않은 사람이라 본 것 같았고, 티셔츠에 단 배번을 보여주자 입장이 허락됐다. 휴유우. 해외에서 뛰기 쉽지 않구만!


  새벽이라 그런지 원래 그런 문화인지 모르겠지만 사회자의 진행은 한국에 비해 잔잔한 편이었다. 조금은 조용조용? 주로에 들어서자 긴장이 풀린 나와 남편은 한국이었으면 배동성 씨가 큰 목소리로 사회를 봤을 거라며 웃었다. 


  주로에 배 불뚝 임신부 하나, 딱 봐도 세 돌은 넘어보이는 아이 하나, 그 아이가 앉은 유아차 뒤 남자 하나가 서있으니 사진 찍는 스태프들이 연신 우리를 찍어주었다. 다 뛰자마자 홈페이지에 접속해보니 나트랑 마라톤 스태프들의 사진은 어마어마했다. HD급 이상 고퀄의 사진을 몇 십장씩 올려주는 혜자 마라톤ㅠㅠ! 포커싱이 맞지 않는 사진을 포함하더라도 한 사람당 20~40장 이상의 사진이 등록되었다. 해외 마라톤하는 사진이 남기고 싶어 스냅 사진 신청할까도 잠깐 고민했었는데, 정말 좋았다. 신혼여행이자 태교여행에 걸맞는 사진을 덕분에 남겼다!


깜깜한 새벽에 시작해 뛰면서 일출을 볼 수 있고, 이 모든 변화가 몇 십장의 고퀄 사진로 돌아오는 혜자 마라톤


  5시 1분, 드디어 달리기 시작!


  나는 달리기를 시작하자마자 주목을 받지 않을까 약간(?) 기대했다. (하하) 지구 어디에서 보더라도, 앞구르기-뒷구르기-옆돌기를 하면서 봐도 나는 배가 꽤 나온 임부였기에 외국에서 온, 배가 나온 임부가, 여기까지 와서 뛴다고? 하면서 나트랑을 놀래킬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었지만 나트랑 사람들의 모든 관심은 내가 아예 아니었다. 그들은 오직 유아차를 끌고 뛰는 남편(!)에게만 집중했다.


  남편은 달리는 내내 열화와 같은 응원과 놀라움, 관심을 받았다. 내가 이해할 수 없지만 왠지 '저 사람봐!'하는 의미가 담겨 있는 듯한 베트남어, "you best runner"라며 엄지를 치켜든 한 아저씨, 혼잡한 주로를 빠져나가기 위해 남편이 질주하자 뒤에서 들려오던 오~ 비슷한 환호성들. 나트랑 마라톤 급수대에서는 바나나와 수박을 준다는 사실을 뛰면서야 알아챘는데(10km 코스도에 나와 있다..) 배고프다고 찡얼대는 아이가 양손에 수박을 들고 먹자 사람들의 얼굴에서 미소와 웃음이 환하게 터져나왔다. 뛰면서 아이에게 직접 말을 거는 분들도 계셨는데 아이가 대답하지 못하고 수줍어하자 그 또한 귀여웠는지 더 큰 미소로 화답이 왔다. :)


  남편의 유아차런은 왜 이렇게까지 주목받았을까? 레이스 후반부 들어 5km 주자들과 만나자 그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나트랑에서는 아기와 함께 유아차를 끌고 뛰는 문화가 거의 없던 듯 했다. 5km 참가자들 몇몇이 두돌, 세돌쯤 되어 보이는 아기를 자전거 스타일의 유아차에 앉히고 주로에 나왔지만 그들은 전혀 뛰지 않았다. 

  또 내 짐작이지만, 나트랑 사람들은 대체로 유아차로 이동을 잘 하지 않는 듯 했다. 아기가 걸을 수 있을 정도만 되면 오토바이에 안고 타는 문화에, 인도가 막 고르지 않아 유아차를 밀기가 어렵고, 인도보다는 차도에 더 집중되어 있는 인프라 등 여러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유아차를 잘 밀고 다니지도 않는 곳에서 꽤 큰 아이와 함께 유아차를 밀며 10km나 뛴다고? 게다가 앞서 이야기했지만 그는 초고수다. 한국에서 유아차를 밀고 나간 롱기스트런 10km를 55분 내(1km당 5분 30초 페이스란 의미)로 완주한 사람이다. 그의 유아차 질주 실력 또한 사람들에게 흥미로운 요소였을 것이다. 


10km 급수대에도 바나나와 수박을 주는 혜자로움에 더욱 감사. 덕분에 찡찡 거리는 아이를 잘 달랬다. 

 

  레이스 중후반부, 많은 수박 섭취로 쉬가 마렵다는 아들을 위해 화장실을 찾아 질주한 남편과 길이 엇갈리면서 혼자만의 달리기가 시작됐다. 가족이 함께 완주하는 사진을 못 남긴다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혼자가 되자 보이지 않던 나트랑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트랑 마라톤에 참여해 뛰는 사람들은 대부분 행복해보였다. 많은 이들이 5km에서 반환해서 돌아오는 친구와 하이파이브를 했고, 누군가는 그 더운 날씨에 케이크 코스튬을 하고 뛰었으며, 짐을 못 맡긴건지 안 맡긴건지 모르겠지만 짐이 있어도 웃으며 뛰었다. 오르막길을 걸어도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았고, 질주하고 쉬고 질주하고 쉬어도 자연스러웠다. 무엇보다 7분 30초~8분 페이스로 뛰는데, 주변에 같이는 물론 내 뒤에서 뛰는 사람도 많았다. 이 곳 사람들에게 '기록'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생각의 끝은 자연스럽게 한국의 마라톤 대회로 이어졌다. 요즘 한국의 마라톤 대회에 나가는 많은 사람들은 '참여'보다 '출전'에 가까운 몸과 마음으로 나가지 않는가. 미소와 웃음보다는 아주 결연한 표정으로 오늘 내가 이 대회를 뿌시고 말겠다는 이기겠다는 다짐들. 실제로 코로나 이후에 여러 곳에서 생겨난 체계적인 훈련 프로그램(유료 프로그램 포함)과 기록을 뒷받침해주는 20~30만원 고가의 러닝화 등을 통해 마라톤 기록이 많이 상향평준화되었다고 입을 모은다. 여기에 나이키 런 클럽 등 어플에서 볼 수 있는 지인들의 훈련 누적 기록(월 평균 OOOkm씩 뛰는)은 누군가에겐 즐거운 경쟁심이 되지만, 누군가에는 내가 뒤쳐지고 있다는 스트레스가 되고 있는 듯 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기록이 그 사람 자체를 말해주고, 아마추어로서 쉽게 달성하기 힘든 기록을 가진 사람들을 '런플루언서'라는 이름으로 약간 신격화하는 것도 사실이다. 뭐랄까. '한 번 달리기판에 입성했다면 이 정도 기록은 달성해야 열심히 했다고 할 수 있지 엣헴'하는 그런 느낌? 


  사실 나 또한 뛰면서 내 몸 -임신 27주-의 컨디션에 집중하기도 했지만, 너무 늦은 기록은 자랑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으로 레이스 후반에 페이스를 조금씩 올리고, 저 사람은 내가 따라잡아야지-하면서 뛰었다. 멀리까지와서 임신한 몸으로 뛰면서도 나트랑 사람들만큼 온전히 달리는 행위를 즐기지 못하고 있구나 생각은 잠시, 빨라지는 내 몸을 제어하기 어려운 걸 보면 나도 어쩔 수 없는 한국인..


  느리면 느린대로, 빠르면 빠른대로 자신만의 속도를 잘 지키며 뛰는 나트랑 사람들을 보며 달리기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했다.


4km 후반부부터 고저의 압박이.. 코스에 고저도는 없었잖아요....


  임신 중에도 대회는 대회! 대회빨을 받는건지 연습 때 느껴지던 배 당김도 거의 없이 10km를 무사히 완주했다. 남편과 엇갈린 탓에 기다리느라 힘들고(달리기는 중간에 쉬면 더 힘듭니다), 해가 뜨며 더워져서 힘들고(선글라스 필수), 5km 주자들이 합류하면서 사람이 많아서 힘들었지만(지그재그하면 에너지 소모가 더 크지요) 역시 피니쉬를 향해 가는 다리와 마음은 역시나 멈출 없이 뿌듯하고 좋았다. 캬. 이 맛에 달리기 하지!


  특이하게 완주 지점보다 메달 받는 곳 줄이 길었는데, 한국과 달리 스태프들이 완주한 러너들에게 메달을 일일히 목에 걸어주고 있었다! 누가 걸어주는 건 처음이야.. 이와 함께 물에 충분히 적신 작은 수건이 제공되었다. 한국은 완주하면 보통 소보루빵, 바나나, 협찬사의 에너지드링크나 음료수, 메달 등이 들어가 있는 비닐 패키지를 받는데, 엑스포에서 받은 패키지에 비슷한 류가 이미 들어가 있어서 완주 후에는 메달과 수건으로 간소화한 듯하다. 완주자에게 메달을 걸어주는 이벤트, 한국에서는 어려우려나?ㅎㅎ



메일로 받은 완주 기록증


  임신 27주 0일. 신혼여행이자 태교여행이자 첫번째 해외 마라톤이자 임신 중 마라톤 대회 출전.. 등 여러가지 명분을 안고 부푼 기대감으로 기다린 나트랑 마라톤이 무사히 끝났다. 


  역시나 가장 좋은 건 임신 7개월이 끝나가는 시점인 임신 27주에도 여전히 달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한 것. 그 뿌듯함이 나를 몇 십배 더 고양하고 성장하게 한다. 

  그 다음으로 좋은 건 임신부는 가만히 앉아 태교나 하는 존재가 아니라 평소에 하던 많은 일들을 그냥 해도 전혀 무리가 없는 사람이라는 걸 세상에 증명했다는 점이다. 세상이 알아주든 않든, 일단 내가 증명했으니 세상 또한 내 증명을 보았으리라. 


  아, 역시 쓰면서도 좋다. 이러니 어떻게 안 달리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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