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러닝에는 낭만이 있다

우중런을 하면 마음에 낭만이 차거든요

by 이달아

비 오는 날과 달리기는 겉으로 보면 상극처럼 보인다. 비가 오는 데 굳이 바깥에서 달려야 하나요?란 질문을 던지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비를 맞으며 달리는 것을 러너의 세계에서는 '우중런'이라고 한다. 영어의 rain run을 한국식으로 발음한 것이라는데, 나에게는 마치 우중런의 '중'자가 '하는 중(~ing)'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말 그대로 추적추적 오는 비를 맞으며 하는 달리기.


우중런은 꽤 각오가 필요한 일이다. 일단 복장에 신경써야 한다. 모자는 필수! 상의는 100% 젖을테고, 하의도 살아남기 힘들고, 속옷도 젖기 일쑤다. 마치 겨울 러닝처럼 들고 다녀야 하는 짐이 한가득이다. 때에 따라선 우비를 입고 뛰기도 하는데, 습도가 높은 여름날 우비를 입고 뛰자면 여기가 그냥 습식사우나구나~ 어차피 이렇게 땀날 거 우비를 왜 입지~란 생각이 절로 든다. 눈 밑 뼈에서도 땀이 나는 경험을 해보고 싶다면 장마 기간 우비런을 추천한다(...)


다음은 신발이다. 신발은 100%가 아니라 120% 젖는다. 비가 조금이라도 온다! 싶으면 1km를 뛰기도 전에 신발 앞섶이 젖기 시작한다. 빗물은 침입자처럼 천천히 신발을 파고들어 기어코 양말까지 젖기 시작한다. 젖은 양말로 발을 디디면 찝찝함은 두번째고 속도가 느려진다. 달리기 끝내고 빨리 집에 가서 씻고 싶은 마음인데, 속도도 느려지니 심적으로 힘들다. 그래서 많이 달리는 러너들은 수명을 다한 러닝화를 버리지 않고 우중런, 설중런(눈 올 때 뛰는 것)때 쓰려고 놔둔다. 말그대로 비 오는 날에는 '버리는 신발'을 신고 뛴다.


또 다른 문제는 나 같은 안경러너에게 발생한다. 비에 젖은 안경이 제 역할을 할 수 있겠나. 날이 어둡고, 비도 오는데, 안경까지 꼈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으니 돌에 걸리거나 발을 접지르는 등 사고 위험성이 있다. 따라서 (안경을 쓰지 않더라도) 챙이 넓은 모자를 꼭 쓰는 것을 추천한다.


마지막은... 냄새다. 비 냄새에 땀 냄새가 결합하여 새큼한 냄새가 나기 시작하는데, 이걸 입고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야 한다면... 그리고 바로 빨아야 한다! 놔두면 그 냄새가 배길 수도.. 배길 수도.. 배긴다구요..


으악. 역시 비 오는 날 바깥에서 뛰는 건 별로네. 하실 수 있겠다. 하지만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정반대다. 비 오는 날 꼭 뛰어보시라. 가능하면 같이 뛰는 사람들이 있으면 더 좋구요.




내가 속한 달리기 동호회는 매주 화요일 저녁에 모여 같이 뛴다. 어제는 한달 여만에 내가 동호회에 참석하기로 한 날이었는데, 아뿔싸. 비 예보가 있다. 저녁 8시에 80%라니. 거의 온다고 보는 게 정확한 예보 속에서 단톡방에 모인 친구들도 잠시 혼란스러워했지만, 대부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우중런 ㄱ"


달리기 장소에 도착하자 한 방울씩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스트레칭을 하고 웜업 달리기를 하는데, 비가 조금씩 거세지는 것이 느껴진다. 비를 피하자고 했으면 여기에 오지 않았을 터. 우중런은 이미 시작된 것을!


트랙 몇 바퀴에 모두가 비 맞은 생쥐꼴이다. 트랙을 한 바퀴, 두 바퀴, 달리기를 이어갈수록 뽀얗던 우리의 얼굴이 점점 녹진해진다. 그러나 비와 함께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아랑곳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가 묵묵히, 각자의 트랙에서 자신의 달리기를 고요하게 이어나가고 있다. 비 오는 트랙인데도 빗소리보다 숨소리와 발소리, 하나 둘 셋!하는 숫자 세는 소리가 더 크다.


옆 라인으로 스쳐지나가는 타인들의 달리기를 보는 데 왠지 모르게 찡하다. 도대체 왜 다들 비를 맞으면서 뛰나요. 붙잡고 물어보고 싶다. 아니, 더 물어보고 싶은 건 이거다. 다 같이 비를 맞고 뛴다는 알 수 없는 연대감, 이런 조온습(조명-온도-습도)을 오래 기억할 것 같다는 강렬한 느낌을 저만 받고 있나요. 그래서 여러분도 비오는 날 또 뛰러 나오실 건가요.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잔잔한 행복 속에 취해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지면이 젖어 앞서거니 뒷서거니 속도와 상관없이 멋대로 뛰는데도 "달아야~"하며 이름을 불러주며 나타나는 말갛게 갠 얼굴들이다. 아. 킥이다. 방금 잔잔한 행복이 잊지 못할 행복으로 업그레이드되었습니다. 그런 순간을 어찌 글로 남기지 않을 수 있나요.


결국 짧은 어휘력으로 이 날의 우중런이 준 감동을 다 담을 수 없어 우리는 낭만 치사, 낭만 초과라 지칭하며 자리를 떴다.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겁니다. 신발, 옷, 모자 다 버려도, 우중런을 하면 마음에 낭만이 차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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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에서 봉달호 씨는 우중런을 이렇게 표현했다. "머리에 쌓여있던 복잡한 생각이 빗물에 씻겨 내려가는 말끔함, 세상의 금기를 깨는 것 같은 황홀함.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다."*


마침 장마 기간이다.


*https://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2/08/27/KHDXL2O3OFGSNNTMYINM67AY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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